흙 속의 진주
낡고 오래된 책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공간.
족히 사람 서넛 이상은 넘고도 남을 만큼의 높은 책장들이 책들로 빼곡하게 차 있다.
천마신교가 중원 정벌의 대가로 뺏어온 장서들.
지방의 무관부터 유명 문파의 무공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일각무고]
하지만 무고의 모든 곳이 그런 건 아니었다.
무고는 일각부터 십각까지 차등하여 구별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무서 역시 별개로 보관되었다.
화산파, 무당파 등의 이름 있는 문파 무공은 팔각 위에.
지방의 별 볼 일 없는 무관의 무서는 일각에.
당연하게도 자격 있는 이는 모두 상위 무고를 원했다.
"······소백 도련님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소궁의 주인이 여기는 왜 왔데?"
"난들 아냐. 소궁 주인이면 오각이 기본으로 아는데."
"오각은 둘째 치고, 무공을 못 익히는 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마실이라도 나오셨나?"
그런 이유에서 이 방문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일각무고 안쪽을 서성이는 명한과 향아를 발견한 무인들이 소리 낮춰 수군거렸다.
좋은 말은 많지 않았다.
"도, 도련님 주변에서 우리를 쳐다봐요."
"신경 꺼. 신기해서 보는 거니까."
"아우. 그냥 이러지 말고 상위 무고로 가는 편이 낫지 않아요? 여기에 도련님께 맞는 무공이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천마의 자식.
즉, 소궁의 주인들은 모두 오각무고의 출입 자격을 지녔다.
무공을 배우겠다면 굳이 일각에서 헤맬 필요가 없다.
‘도련님께서 무공에 관심을 가지는 건 좋지만······’
일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왜? 건질 게 없어 보여?"
"일각무고는 지방 무관의 무공이라고 들었어요. 도련님께 어울릴 만한 무공이 있을 것 같지는······"
"요 계집이 머리에 거품만 차서는."
"아야."
명한이 향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대륙은 넓고 수련자들은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아. 지금은 비록 지방 무관이 되었다지만, 그걸 연 사람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지."
"그럼 일각무고에도 좋은 무공이 있다는 말인가요?"
"해변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지만. 분명, 이 안에도 좋은 무공은 숨어있어."
그 바늘이 무엇인지 명한은 안다.
다만······
"문제는 이 빌어먹을 무고가 더럽게 넓다는 거지."
일각무고는 바다로 쓸려나간 쓰레기 섬과 같다.
질은 떨어지지만, 숫자는 월등하다.
아파트 한 채, 아니 한 동은 훌쩍 넘을 크기의 서고에 명한은 쉬이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팔. 검색이 되는 것도 아니고.’
상위 무고라면 모르겠지만 일각은 무리.
직접 눈으로 보고 찾아야 한다.
"아이고, 소백 도련님!"
"응?"
그때, 부산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가왔다.
잘 빗어 넘긴 머리카락에 질 좋은 옷.
일각무고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무고 관리를 맡고 있는 서원승이라 합니다."
"서원승······"
기억에 있는가?
명한은 습작을 떠올렸으나 이 이름을 찾지 못했다.
비중이 적은 엑스트라거나 작중에 거론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리 오셨으면 연락을 주시지 그랬습니까. 이런 누추한 곳에서 헤매고 계시다니요."
"네가 이 무고 전체를 관리하는 사람이냐?"
"어이쿠. 감히 제가 그런 직책을 어찌 감당할까요. 소소하게 원장님을 돕고 있을 뿐입니다."
"아. 일필서생, 홍요의 제자구나."
일각부터 십각까지 무고를 담당하는 건 홍요.
자질구레한 건 그의 제자들이 맡고 있다.
말하자면 도서관의 가이드였다.
"그래,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무고가 넓어서 책을 찾기 난감하던 차였어."
"하하하. 무고가 좀 넓습니다. 그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위로 올라가시지요."
"아니, 위는 됐다. 내가 찾는 무서는 일각에 있어."
"네? 일각에요? 아니, 이런 시궁창에 도련님 같이 귀한 분의 물건이 어디 있다고······"
시궁창, 이라는 말에 주변 시선이 차가워졌다.
일각 무고는 넓고, 이를 이용하고자 온 일각 무인들도 수가 상당했다.
서원승의 목소리는 주변에 퍼질 만큼 컸다.
"일각이라 해도 충분히 도움 되는 무서들이 있다. 이름을 적어 줄 테니 찾아와라."
"아이고, 도련님. 일각의 무서들은 재능 없는 놈들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쑤셔 박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런 곳에 도련님께 어울리는 무서가 있겠습니까?"
"일각 무서는 쓰레기라 이거냐?"
"암요. 이 시궁창에는 도련님 같이 재능 넘치는 분에게 어울릴 물건이 없습죠."
"······"
재능 넘치는 분.
소백에게 어울리는 명칭은 아니다.
체질적인 문제로 무공 한 점 익히지 못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 아닌가.
무고의 관리자라는 놈이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곳의 무공을 익히면 재능 없는 놈이라 이거군.’
과한 포장으로 비아냥거리고 있을 뿐이다.
"너는 정말로 이곳, 일각의 무서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런 시궁창 무서들은 저기 저, 무지렁이들이나 익히면 족합니다. 귀하신 분은 어울리는 책을 읽어야죠. 제가 위로 잘 모시겠습니다."
"재미있게 말을 하는군."
"하하하. 제가 이 입 만큼은 자신이 있습니다."
웃는 서원승의 얼굴에 명한의 입술이 뒤틀렸다.
얼마나 업신여기면 고작 서고의 관리자가 소궁의 주인을 이리 비웃는단 말인가.
"그럼 네 말이 맞는지 한 번 내기를 해보자."
"네? 내기요?"
"그래. 네 말대로 일각의 무서가 모조리 쓰레기라면 이걸 내어주지."
명한이 품 안에서 금색 테두리의 전표를 꺼냈다.
금, 천 냥의 값어치를 지닌 전표였다.
서원승의 눈이 번쩍 뜨였다.
"처, 천 냥을 말입니까?"
"그래. 이곳의 무서를 즉석에서 익힌 뒤, 너와 겨루는 거다. 승리하면 이 전표를 네게 주마."
"하지만 제가 어찌 소백 도련님과······"
"내가 아니다. 여기 있는 향아와 겨루거라."
"도, 도련님?"
지목당한 향아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소궁에 배치된 몸종들은 노동을 위한 기본공은 익히지만, 딱 그것뿐.
소원승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정말입니까? 제가 저 어린 아이를 이기면 전표를 주시는 겁니까?"
"한 입으로 두말할까. 단, 내기는 내기이니 네가 질 경우도 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 제게는 천냥같은 거금은 없습니다."
"그리 무모한 요구는 하지 않는다. 그래, 네가 지면 이 전표를 가져가 일각 무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어주도록 해라."
"술과······고기를 말입니까?"
"단, 네 한 달 봉록을 더해서. 직접 손으로 이곳 무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해라."
증명은 쉽다.
하지만 방법과 과정은 다른 이야기.
천마궁 속, 소백의 그림을 다르게 그리려면 행보 또한 그에 걸맞아야 한다.
명한의 말에 주변 분위기가 갑자기 뜨거워졌다.
"술과 고기?"
"우리 모두에게 말인가?"
"도련님 배포가 보통이 아닌데?"
당연하게도 상황을 지켜보던 일각 무인들이었다.
처지가 어떻든 무시 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편들어 주는 말에 ‘술과 고기’라는 보너스까지.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한이 이 분위기를 타고 서원승에게 물었다.
"어떠냐? 네 말대로 일각의 무공들이 모두 쓰레기라면 큰돈을 만질 기회다."
"······제가 이긴다 해도 다른 일은 없는 것이지요?"
"물론이다. 네 말대로 재미를 위한 것이니까."
툭. 명한이 천냥 전표를 바닥으로 던졌다.
서원승은 거의 날듯이 몸을 던져 전표를 지키며 외쳤다.
"하겠습니다!"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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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아는 걱정되는 얼굴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일각의 무공을 익혀서 무고 관리인과 싸운다는 것.
이 전제 자체가 너무 불안했다.
"도련님······저는 아무래도 불안해요. 저 같은 몸종이 어떻게 무고 관리인을 이기겠어요."
"네 주인이 하는 말을 못 믿겠다는 거냐?"
"아, 아뇨! 어찌 제가 감히······. 단지 제가 패배하면 도련님 얼굴에 먹칠을 할까 두려워요."
패배로 소백의 명예가 떨어진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패배로 소백이 다시금 예전처럼 난폭하게 굴 거라는 두려움.
향아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내 것이니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뜻이라고. 오늘 너는 날 대신해서 저 오만한 놈의 콧대를 꺾을 거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이 몸의 몸종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해야지."
대체 이게 무슨 위로일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향아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태평하게 웃는 얼굴 때문에?
아니면 저 황당한 말 때문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소백의 말이면 전부 다 괜찮을 것 같은 느낌.
"말씀하신 무서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서원승이 돌아왔다.
책을 찾으라고 보낸 명한의 심부름을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래, 수고했다. 반각의 시간이면 충분하니, 차라도 한잔하고 있어라."
"하하. 반각이 아니라 며칠이라도 충분합니다."
느긋한 웃음.
명한이 입술을 비틀어 답한 뒤 책을 낚아챘다.
낡고 오래된, 다 헤진 책이었다.
"명월심법(明月心法)? 월보(月步)?"
"하나는 심법이고 다른 하나는 보법이다. 내각에서 익힌 무공은 다 잊고 이 둘만 익혀."
"······"
"괜찮아. 이 둘이면 저 얼간이 하나 정도는 충분해."
마음을 읽은 듯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 명한.
그 손길에 용기를 얻은 듯 향아가 책을 펼쳤다.
몸종의 신분으로 천마궁에 배정된 이후, 처음으로 익히는 무공서였다.
‘내각에서는 최소한의 것만 배웠지만······’
여기서는 전부여야 했다.
그래야 명한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다.
"······과연."
향아는 순식간에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눈은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마냥 무서의 글귀를 흡수해 나갔다.
엄청난 집중력이었다.
‘벽안지체. 무공의 본질을 꿰뚫어서 그 요체를 체득하게 하는 최상급의 체질.’
설정상 습작에 존재하는 모든 체질 중 한 손에 꼽히는 능력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주인공 소백을 보좌하는 역할이기에 부여했던 힘이다.
"명월심법과 월보는 본래 일월교의 비전 무공. 반쪽이라고는 하지만, 향아의 눈이라면 요체를 파악하고도 남지."
남에게는 쓰레기일 수 있으나 향아에게는 아니다.
그녀의 재능은 길바닥 돌을 보석으로 만들 정도.
‘빛나는 재능. 내가 가지고 싶었던 그런 재능인가.’
어쩌면 아이러니한 상황.
명한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허억! 헉!"
순간, 무아지경에 빠져있던 향아가 깨어났다.
명한도 불필요한 상념은 걷어내고 그녀를 부축했다.
땀범벅에 숨은 상당히 거칠었다.
"도, 도련님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죠?"
"아직 반각은 안 됐다. 요체는 파악했어?"
눈을 깜빡이며 제대로 답을 못하는 향아.
가늠이 제대로 안 되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럴만하지.’
굳이 두 번 묻지 않고 명한이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이름 : 향아]
[나이 : 16세]
[등급 : 12급]
[체질 : 벽안지체(闢眼之體) / 천상급]
[능력 : 심(20급) / 기(22급) / 체(19급)]
[생명 : 400 / 400]
[내공 : 30년 / 30년]
[무공 : 소소보(小小步) / 인하 2성]
[무공 : 명월심법(明月心法) / 지상 3성]
[무공 : 월보(月步) / 지하 3성]
[상태 : 일월전인(日月傳人) / 천상급]
[사고 : 무공을 제대로 익혔는지 걱정하고 있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일월신교의 전승자, 일월전인.
습작 전체를 다 털어도 몇 없는 전승계열 최강의 상태 중 하나였다.
걱정 같은 건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