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약이 되는 법
"쿨럭!!"
흑풍과 그 무리가 물러나자마자.
명한이 검붉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눈과 코. 침을 꽂았던 머리에서도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소백 도련님!"
다급히 귀의가 다가와 명한을 부축했다.
얼굴은 잿빛에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 이런! 독이 혈맥을 역행하고 있어!"
맥을 짚은 귀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천폐독의 독성이 완전히 폭주해서 날뛰고 있었다.
"쿨럭. 쿨럭. 소리치지 마. 귀가 울리니까."
"도련님! 농담할 상태가 아닙니다!"
"알아. 천폐독이 폭주해서 기경팔맥을 긁고 있는 거지?"
명한이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습작 기준, 이런 천폐독은 발작은 몇 번에 걸쳐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오독경을 사용한 폭주.’
명한의 내공이 얼마나 된다고 흑풍을 제압했겠는가.
전부 천폐독을 오독경으로 유인해서 짓누른 것이다.
당연히 그 부작용은 컸다.
폭주한 독은 사지를 녹이고 있었다.
"알면서 이리 여유를 부리십니까!? 일단 세맥을 막아야겠습니다."
"세맥을 막으면 내공은?"
"내공이야 별수 없지요. 우선은 천폐독을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건 좀 곤란해."
몇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세워둔 계획이 있다.
주변 말들을 움직이며 대응하겠지만, 만일의 상황도 고려해야 할 터.
명한 자신의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된 거 거칠게 가야겠네.’
아픈 건 싫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귀의. 천폐독의 독성과 맞설 만한 독물이 있다면 어때?"
"이독제독을 의미하는 겁니까?"
"독과 독을 충돌시킨 뒤 오독경으로 제어하는 거야. 약황비전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지 않나?"
"가능은 합니다만······대체 그런 극독을 어디에서 구한단 말입니까?"
"여기."
명한이 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스슥, 하는 마찰음과 함께 쌍각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흑풍의 무리를 제압했던 것도 바로 이 쌍각사였다.
"쌍각사!!"
귀의답게 단번에 쌍각사의 정체를 간파했다.
"어때? 쌍각사의 독이면 천폐독에도 밀리지 않는데."
"허어. 대체 이런 영물을 어디에서 구하신 겁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고. 어때?"
"으음. 독과 독이 맞물린다는 가정하에 오독경으로 이를 제어한다면······가능성은 있습니다."
습작 후반부, 혈염마녀에게 직접 듣는 방법이다.
독과 독을 충돌시켜서 하나의 단(團)으로 만드는 방식.
‘지독한 고통이 따른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좋아. 해."
쌍각사의 이빨이 팔뚝을 파고들었다.
#
"말했잖아. 오빠한테는 미래가 안 보인다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
"미안하지만 가능성 없는 일에 목매는 남자만큼 매력 없는 것도 없어. 이제 그만하자, 우리."
한때 연인이라 부르던 이의 선언.
몇 마디 말은 칼보다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어째서 그렇게 말을 하는 거야.
말은 혀끝을 맴돌았지만, 끝내 나오지 못했다.
연인이었던 이의 냉정한 말보다 더욱 무섭게 몸을 옥죄는 사실.
"알고 있잖아. 내겐 재능 따위 없다는 거.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거."
말뚝처럼 박힌 현실이었다.
#
"······이런 시팔."
잠에서 깨어난 명한이 잇소리를 냈다.
짧은 꿈.
잊었다 생각한 아주 더러운 기억이었다.
"독이 머리까지 헤집어 놓은 건가."
짜증 섞인 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얻어맞은 것 같은 그런 격통이었다.
[천폐독의 독성과 쌍각사의 독성이 충돌합니다]
[독성이 뭉쳐서 하나의 단(團)으로 연성됩니다]
[세맥이 활성화 됩니다]
[기(氣) 수치가 증가합니다. + 5]
[내공이 증가합니다. + 30년]
[독에 대한 저항력이 증가합니다]
[특성, 백독불침이 추가됩니다]
[오독경의 경지가 상승합니다]
[등급이 상승합니다]
[등급이 상승합니다]
······
그리고 발견한 수십 개의 알림창.
쌍각사에게 물리고 난 뒤, 천폐독과 충돌한 결과였다.
오래된 알림창부터 하나하나 넘겨 가며 읽었다.
‘천폐독의 폭주는 막은 건가.’
통증은 있었지만, 속이 문드러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 은인. 지켜준다.
이에 반응하듯 쌍각사가 소매에서 기어 나왔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혀를 날름거렸다.
마치 ‘난 잘했다.’라고 시위하는 모습이었다.
"네가 뭇 사람보다 낫다." 명한이 가볍게 웃으며 쌍각사를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썩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골골거렸다.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그리고 이어서 방안으로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 귀의였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
"말도 마십시오. 천폐독과 쌍각사의 독이 얼마나 치열하든지. 밤새 한숨도 못 쉬었습니다."
"고생했어. 덕분에 단은 안정적으로 연성된 것 같아."
"역시 연단술에 대한 걸 알고 계셨던 겁니까?"
"연단술이 백약문의 전유물은 아니니까."
기운을 뭉쳐서 하나의 단으로 구축하는 기술.
이를 연단술이라 하며, 대표적으로 귀의의 백약문이나 혈염마녀의 독곡이 이를 다룬다.
"오독경에 연단술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오독경은 남만 오독문의 상징이지. 그리고 오독문은 중원 모든 독문의 시초라고 할 수 있고."
"설마, 오독문이 독곡의 시초라는 겁니까?"
"말하자면 길어. 오독문의 후예 중 일부가 갈라져 나와 만든 것이 독곡. 혈염마녀는 그 후손이고. 오독경에 연단술이 숨겨져 있는 건 당연한 이치야."
"허······그걸 도련님께서 어찌?"
그야 직접 짠 설정이니까.
명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건 설명하기 힘들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됐고, 향아는 어디 있지?"
대충 얼버무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약을 달이고 있습니다."
"그래? 놀랐을 텐데 쉬게 하는 편이 낫지 않나?"
"······"
멀뚱히 바라보는 귀의.
"왜?"
"도련님. 제가 아는 사십 팔궁의 소백 도련님이 정말로 맞는 겁니까?"
"뭔 소리야, 그건."
"제가 아는 도련님은 이런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힘과 재주를 숨기는 것은 그렇다 쳐도······고작 몸종 때문에 이런 모험을 하시다니요."
당연한 의문이었다.
소백은 망나니에 이기적인 쓰레기.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몸종을 던지면 던졌지, 챙겨 줄 위인은 절대 아니었다.
귀의가 그간 봐 온 모습도, 향간의 소문도 이를 뒷받침했다.
"사람이 죽을 뻔하면 바뀐다고 하잖아. 가족이 보낸 독을 삼킨다면 그러고도 남을 거 같은데."
"으음. 역시 독에 대해서······"
"알잖아. 천마궁이 넓어도 천폐독 같은 걸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거. 그래도 어떤 면으로는 어머니인데, 이런 취급을 받으면 사람이 돌지."
어찌 됐든 거짓말 같은 건 없다.
실제로 독을 당하고 난 뒤 소백의 몸에 명한 자신이 들어온 거니까.
죽을 고비를 겪고 사람이 바뀐 셈이다.
"미리 적응해 둬.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니까. 난 이제 무엇도 포기하지 않아. 내 사람이면 지키고 내 적이면 없앨 거야."
무엇이 득인지 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할 수 없는지의 문제.
‘전처럼 그런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아.’
명한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싶었다.
#
[이름 : 소백]
[등급 : 10급]
[체질 : 연단성체(練團成體) / 천하급]
[능력 : 심(13급) / 기(15급) / 체(15급)]
[생명 : 200 / 200]
[내공 : 60년 / 60년]
[독단 : 60년 / 60년]
[무공 : 오독경 / 지중급(6성)]
[상태 : 백독불침]
[사역수 : 쌍각사]
명한이 상태창을 두 눈으로 훑었다.
전과 비교하자면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다.
등급도 오르고 백독불침이라는 추가 상태도 생겼다.
백 가지 독이 안 듣는 신체라는 의미.
독에 대한 저항력이 늘어나는 매우 좋은 패시브였다.
게다가······
"천폐독이 사라지고 체질이 바뀌었어."
두 독이 충돌하여 독단을 이룬 결과.
연단술은 기(氣)를 다루는 고등의 기술 중 하나다.
이를 완성한다는 건 새로운 운영체계의 설립과 같다.
기를 응집하지 못하는 소백의 ‘무성지체’대신 연단을 기본으로 하는 ‘연단성체’로 바뀐 것이 그 증거.
현재 명한의 내공은 단전에 채워진 ‘내기’의 바닷속에 커다란 ‘독단’이 들어와 앉은 격이다.
"쓰는 방식은······"
감각적으로 내공을 움직였다.
마치 양손에 들린 야구공처럼 각기 다른 방향의 기운이 느껴졌다.
‘움직이는 건 가능해. 하지만······’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밥을 먹는 느낌이었다.
가능은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단을 움직여서 내기를 이끄는 건 쉽지 않네. 역시 메인 시스템을 잡아줄 심법이 필요해."
심법은 내공이라는 에너지를 운용하는 항법장치.
아무리 설비와 에너지가 좋아도 항법장치가 엉망이면 제대로 배를 몰 수 없다.
포용성이 높은 심법이 필요했다.
"역시 그곳을 한 번 들려야 하는 건가."
"어디를 들려요, 도련님?"
때마침 들어오는 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약탕을 든 향아였다.
옆에 쪼그려 앉아서는 조심스레 따랐다.
"귀의는 어디 가고?"
"아무래도 소궁을 찾아가 봐야겠다고 나가셨어요."
"소궁? 아, 다섯 번째 소궁을 찾아간 건가."
한바탕 살풀이를 했으니 나름 뒷수습을 하러 간 것이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데.’
다섯 번째 소궁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명한은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뒷감당할 방법 역시.
"혹시 도련님께 안 좋은 일이 생기진 않겠죠?"
"왜? 그 검은 놈들의 주인이 찾아와 해코지할까 봐?"
"저는 괜찮지만, 도련님께서 다칠까 봐 걱정돼요."
"걱정은."
명한이 향아의 머리를 힘주어 헝클었다.
곁에 있는 누군가 이렇게 걱정해주는 기분.
꽤 반가운 것이었다.
"다섯 번째 궁의 주인이라면 나도 알아. 은소소. 성질 사나운 암호랑이지."
"히익. 으, 은소소 아가씨라면 광검(狂劍)?"
"오. 너도 그 별칭을 알고 있는 거냐?"
"죄, 죄송해요! 제가 그만 말실수를······"
"됐다, 됐어. 그 암호랑이가 미친 검인 건 사실이니까."
깜짝 놀라 바동거리는 향아를 다독였다.
그녀의 이런 반응은 극적이지만 유별난 건 아니다.
다섯 번째 궁의 광검 은소소.
그 이름이라면 천마궁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비호 세력 없이 재능 하나로 한자리 소궁을 차지한 미친 검수’
그야말로 검의 천재였다.
"저, 정말로 도련님은 괜찮은 거 맞죠?"
"이 천마궁은 그야말로 복마전이야. 온갖 괴물이 득실거리는 마굴이지. 뱀과 그림자는 무서워도 성난 호랑이는 귀여울 뿐이야."
"저, 저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정 이해가 안 되면 체득하러 가자."
"네?"
눈 동그랗게 뜬 향아를 잡아서 일으켰다.
쇠뿔도 단번에 빼라 했으니, 지금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 어디를 가시게요?"
"일각무고(一角武庫)."
천마궁의 계급체계 중 가장 아랫단에 있는 이들.
일각(一角)에게 개방된 서고였다.
본래라면 천마의 혈육, 소궁의 주인인 명한에게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는 공간.
"보물을 찾으러."
하지만 찾는 이가 이야기의 저자라면 다르다.
평범한 곳에 숨겨진 보물.
그 매력적인 설정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