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아닌 삶에서
천폐독은 서역 10대 극독 중 하나.
재료가 갖춰진다고 해독이 쉽게 될 물건은 아니었다.
귀의는 열흘의 시간을 제안했다.
몸 안의 독을 천천히 제거할 시간.
"열흘이라. 그 정도면 문제가 없겠어."
습작의 내용상, 이벤트가 생기는 시간은 보름 후.
명한은 충분한 시간이라 판단했다.
"고통스러울 겁니다. 천폐독은 오장육부에 스며들어서 기생하는 기생충 같은 존재. 살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하면 극통이 따라올 겁니다."
"알고 있어. 각오는 충분히 돼 있으니 걱정마."
"쉽지 않습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걱정하지 말라니까."
담담한 명한의 답에도 귀의는 망설였다.
그만큼 천폐독의 해독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온갖 재료로 몸을 보호하고 오독경으로 진기를 가다듬어도 그것은 마찬가지.
‘마비산이라도 써드리고 싶지만······’
천폐독이 워낙 강해서 먹히지가 않는다.
"귀의."
이 망설임을 읽은 명한이 입을 열었다.
4년 후, 소백이 귀의에게 답할 대사 중 하나였다.
"천폐독이 아무리 독해도 독을 쓴 자의 마음만큼 독하지는 않아. 그러니 내가 고통에 쓰러질 일은 없어."
"소백 도련님······"
"날 믿고 시작해."
"알겠습니다. 이, 귀의 도련님의 각오를 믿고 따르겠습니다."
효과는 발군.
크게 끄덕이는 귀의를 보며 명한이 옷을 벗었다.
치료를 위해서는 거대한 항아리 안에서 약물에 잠긴 채 몇 시간을 버텨야 한다.
탁한 약물의 모습에 인상이 구겨졌지만, 멋진 대사를 한 참이니 억지로 참았다.
출렁.
발끝부터 전신이 약물에 잠겼다.
"시작합니다. 고통스럽겠지만 참아 주시길."
귀의가 침통에서 침을 뽑아 꼽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명한의 머리, 거의 모든 곳에 침이 빼곡하게 꽂혔다.
실타래 바늘꽂이가 된 모양새.
"도련님, 통증은 어떻습니까?"
"괜찮으니 진행해."
"······그렇습니까?"
놀랍도록 의연한 모습에 귀의가 감탄했다.
‘굉장히 고통스러울 텐데.’
예전에 알던 그 소백이 아니었다.
아니면 이것이 본래의 모습이었든지.
어느 쪽이든 악명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
그리고 명한이 그런 귀의의 모습에 입꼬리를 눌렀다.
사실 그는 지금 고통은커녕 어떤 감각도 못 느끼고 있었다.
‘쌍각사의 마비독은 천폐독보다 위에 있지.’
미리 맞아둔 독니 한 방의 위력.
마비라는 국한된 효과로는 쌍각사가 월등했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최고급 마취약이었다.
"오장과 육부에서 독이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니 목소리도 내시면 안 됩니다."
"쓸데없이 떠들면?"
"기운이 흐트러지면 치료가 허사가 됩니다."
"알겠어. 치료는 의사의 말을 따라야지."
약은 약사에게 병은 의사에게.
명한이 조용히 눈을 감고 귀의의 치료에 집중했다.
말없이 침 꽂는 소리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 안 돼요. 지금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기를 얼마나 됐을까.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향아였다.
"네년이 지금 누구 앞을 막는 것이냐!? 비켜라!"
"안 돼요! 도련님께서 손님을 받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이! 건방진! 지금 아가씨께서 병중에 있는데, 네년 따위가 앞을 막겠다고!?"
목소리는 크게 번져서 명한의 귀에도 들어왔다.
향아의 목소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낯설었다.
‘누구지? 이 시기에 소백을 찾는 사람은 없었는데.’
명한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가볍게 당황했다.
"당장 비키지 않으면 네년의 목을 베겠다!"
"비, 비킬 수 없어요! 도련님께서 손님을 받지 말라 했으니 저는 비키지 않을 거예요!"
"네년이!"
격앙되는 목소리에 명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상황이 꽤 다급했다.
"안됩니다, 도련님. 지금 움직이시면 치료가 전부 엉망이 되고 맙니다."
낌새를 읽은 귀의가 곧바로 만류했다.
"고작해야 몸종 하나입니다. 치료가 끝나고 책임을 물어도 그만입니다. 지금은 치료에만 집중하시죠."
그리고 이어진 답.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귀의는 천마신교의 제일가는 의사.
소백은 어찌 되었든 천마의 자식이다.
몸종에 불과한 향아와는 비교될 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이곳 사람의 생각이야.’
명한은 아니었다.
"지금 감히 누가 내 처소 앞에서 소란이냐!?"
묵은 숨을 뱉듯, 밖으로 외쳤다.
"도련님!"
"치료는 다시 하면 된다. 하지만 저 아이가 죽으면 누가 되살린단 말이냐."
"고작 몸종에 불과합니다."
"내 몸종이다. 내가 곁에 둔 아이야. 거두는 것도 내가 한다."
치료가 어긋나면 손해가 생기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어린아이를 포기할까?
현생에서 지겹도록 한 것이 포기다.
여기서까지 그럴 생각은 없다.
항아리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천폐독의 독기가 발작을 시작합니다]
순간, 머리가 핑 돌며 감각이 되살아났다.
오한과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정도의 감각이었다.
하지만 멋지게 털고 일어나서 그게 무슨 추태인가.
자존심에 그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악물고 항아리 밖으로 걸어나갔다.
드르르륵―!!
거칠게 열리는 문에 당황하는 흑의의 남자들.
그리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향아.
울컥, 하고 올라오는 감정은 제법 뜨거웠다.
으드득.
명한의 이가 거칠게 마찰했다.
"개나 소나 날 우습게 여기는군."
"······급한 일이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다섯 번째 소궁의 호위를 맡고 있는 흑풍이라 하옵니다."
"네 이름 따위를 알고 싶은 것 같아? 당장 꺼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슥, 밀고 나와 귀의 쪽을 가로막는 흑풍.
나머지들도 저마다 무기를 쥔 채 방위를 점했다.
호위가 소궁의 주인 앞에서.
명한의 눈꼬리가 크게 치솟았다.
"뭐 하는 짓이냐?"
"아가씨께서 귀의를 찾습니다."
"그래서? 네 아가씨 명령이니 내 처소에서 귀의를 잡아가겠다? 내 몸종을 협박하면서까지?"
"말로 끝나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명한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흑풍, 그리고 나머지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마른 눈동자에 새겨진 감정은 ‘멸시’.
천마의 자식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래. 그런 취급이었지.’
천마궁의 망나니.
고려의 피가 섞인 혼혈.
무공 한 줄 익히지 못한 무능력자.
습작에 끄적인 글 몇 줄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던 감정이 피부로 전해졌다.
벽에 박힌 못처럼 선명했다.
"이런 기분이었나. 정말 개 같네······"
왜 소백의 성격이 그렇게 됐는지.
지독하게 발버둥 치며 자신을 증명하려 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해하신 거로 판단하겠습니다. 귀의 어르신은 모셔가죠."
순간, 손을 뻗어 귀의를 잡아채려는 흑풍.
"난 허락한 적 없다."
명한이 이 손을 중간에서 낚아챘다.
단번에 일그러지는 흑풍의 표정.
‘너 따위가 감히?’라는 생각이 여실히 읽혔다.
명한의 가슴 속 불꽃이 조금 더 거칠게 타올랐다.
"아가씨의 명령입니다. 손 놓으시죠."
"말했을 텐데? 난 허락한 적 없다고."
"이러시면 곤란······큭!"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는 흑풍.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당혹감이 넘쳐 흘렀다.
"곤란? 소궁의 잡일이나 하는 놈이 내게 곤란이라 말한 거냐?"
"크, 크으윽!!"
"답해."
"크아아악!!"
이번엔 흑풍의 오른손이 기형적인 방향으로 뒤틀렸다.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지독한 기운 때문.
내공을 사용하여 방어하려 했지만, 종잇장처럼 찢으며 들어왔다.
‘천마궁의 망나니에게 이런 내공이 있었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부들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외쳤다.
"저, 저는 다섯 번째 소궁의 아가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시면 궁과 궁의······"
"끝까지 답을 안 하는군."
"이러시면 정말로 곤란해질 뿐입니다!"
"두 번이라."
우드득―!
"크아아아악!!"
삽시간에 흑풍의 오른손이 수수깡처럼 부서졌다.
관절이 어긋나거나 신경이 다친 수준이 아니었다.
바짝 말린 빨랫감처럼 손 전체가 비틀렸다.
재생 불가능한 상처.
흑풍을 따라서 왔던 검수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지랄도 풍년이네."
명한이 이번엔 반대쪽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검은 선 하나가 바람처럼 날아가 검수들 사이를 스쳐 갔다.
"커억!"
"끄으으윽!"
"모, 몸이 말을 안 들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검수들.
검조차 휘두르는 놈이 없었다.
흑풍의 얼굴 위로 고통과 경악이 뒤섞였다.
‘이건 불가능해! 어떻게 흑 14수를 일수에?’
데려온 이들 전부가 일류무사에 근접한 실력.
알려진 소백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이 새끼들은 소궁의 궁주가 아주 허수아비로 보이나 봐? 소궁 처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서 검을 뽑아?"
"무, 무슨 짓을······!?"
명한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흑풍을 질질 끌며 검수 하나하나를 전부 밟았다.
검을 쥐는 손이었다.
우득. 우득. 우드득.
한 놈, 한 놈 고통스럽게 전부 밟아 주었다.
받은 만큼.
아니, 그 몇 배의 이자를 얹어서 돌려주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비명이 잦아들었을 때.
넋 놓은 흑풍을 보며 말했다.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해. 감히 소궁 처소에서 소란 피운 무지렁이들을 대신 징죄했다고."
감정적인 반응이라는 건 안다.
어쩌면 손해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울고 있는 향아.
자신을 향한 모멸적인 눈빛.
글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 감정은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고 싶지 않았다.
"나, 소백이 그리 말하더라고."
이건 글이 아닌 삶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