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터지게 영약을 먹는 법
명한은 곧바로 통로를 역행해서 올라왔다.
남은 시간은 넉넉하게 한 시간.
하지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깜빡했어. 중간에 한 명 더 있다는 걸.’
굵직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깜빡했던 인물.
귀의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다.
"······미천한 종년 따위가!"
"조금 늦었네."
방문 앞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소백에게 독을 쓴 장본인, 궁곡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은 지금 독 때문에 상태가 많이 안 좋으세요."
"그러니까 내가 몸에 좋은 약을 가지고 왔다고. 내가 동생에게 몹쓸 짓이라도 할 것 같나?"
"아니, 전······"
"종년 따위가 꼬박꼬박 말대답하다니. 네년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스르릉.
섬뜩하게 들려오는 마찰음.
그대로 두면 사달 날 분위기였다.
명한이 걸음을 서둘러 문을 열었다.
"거기까지만 하지?"
그곳에 있는 건 검을 뽑아 든 장신의 청년.
거울 속, 소백과 닮은.
하지만 어머니는 다른, 궁곡이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군. 이 형님이 꽤나 우스웠던 모양이야."
"독에 당한 게 얼마 전이야. 경계하는 건 당연한 조치 아닌가?"
"경계라. 좋은 마음가짐이지. 하지만 그걸 하찮은 몸종 따위가 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
궁곡의 검이 향아의 턱 끝에 닿았다.
천마의 자식 끼리 직접적인 충돌은 불가능하지만, 몸종은 충분히 가능하다.
"검은 이만 내리지? 누가 보면 네가 독을 쓴 범인인지 알겠어."
"뭐?"
"한달음에 달려와서 칼부터 꺼내는 꼴이 영 마뜩잖아서. 독에 안 죽으니 확인 사살이라고 하고 싶은 건가?"
"소백. 소백아. 네가 독에 당하더니 머리가 이상해졌구나."
"원래부터 이상했는데? 그 칼 들고 살풀이 한 다음에 확인해 볼 거냐?"
명한은 되레 강하게 나갔다.
궁곡의 성정은 전형적인 외강내유.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은 물러터진 놈이다.
기세등등한 시선에 궁곡이 움찔하고 검을 내렸다.
"그래. 그렇게 얌전하니까 얼마나 좋아."
"이······! 미천한 새끼가!"
그래도 발끈하는 마음은 남았던 모양.
궁곡이 검을 치켜들어 명한의 턱 끝에 댔다.
"뭐하자는 거냐? 나랑 칼부림하자고?"
"내가 못 할 것 같나?"
"하면? 뒷감당할 자신은 있어? 혈염마녀가 기뻐할까? 자식새끼가 천마궁 금기를 어기고 칼부림했다고."
"큭! 네놈이!"
파르르르.
궁곡의 검 끝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살짝 피부를 베고 들어와 피까지 맺혔다.
하지만 그것뿐.
궁곡은 그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는 모친인 혈염마녀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현대로 치자면 전형적인 마마보이였다.
‘그게 궁곡이라는 인간의 한계지.’
경계해야 할 대상은 궁곡이 아닌 혈염마녀였다.
명한이 턱 끝의 검을 잡아서 밖으로 밀었다.
"이런 헛짓거리는 그만두지. 왜 찾아온 거냐? 간병같은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어머니의 약을 전달하러 왔을 뿐이다!"
"혈염마녀가? 병 주고 약 주고인가."
"닥쳐! 어머니께서 친해 내리신 약이니 받기나 해라!"
불식 간에 손을 뻗어 손목을 잡는 궁곡.
애초에 무공이 없는 명한은 피할 재간이 없었다.
아니, 피할 이유가 없었다.
[이름 : 궁곡]
[나이 : 22세]
[등급 : 38급]
[체질 : 화곡지체(火谷之體) / 지상급]
[능력 : 심(20급) / 기(40급) / 체(42급)]
[생명 : 500 / 500]
[내공 : 90년 / 90년]
[무공 : 염화심법(炎火心法) / 지상급 9성]
[무공 :백염공(白炎功) / 지중급 8성]
[무공 : 파산공(破山功) / 인상급 5성]
[사고 : 독이 통한 것인지 의심하고 있다]
서로의 신체를 접촉하기 위해서.
궁곡의 정보와 함께 예상대로의 사고가 읽혔다.
혈염마녀 성격상 확인하고 싶어했을 터.
자식인 궁곡을 보내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뭐 하는 거냐?"
"······어머니가 주신 선물이나 받아라."
궁곡이 손목을 슬쩍 놓으며 바구니를 건넸다.
표정은 관리하고 있지만, 심경은 감추지 못했다.
독이 통했다는 기쁨.
‘머저리 같은 새끼.’
명한은 당장이라도 그 주둥이를 잡아서 ‘독 따위는 문제가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짧게 혀를 차는 것으로 참았다.
지금 당장은 궁곡과 혈염마녀 쪽에서 중독된 것으로 아는 편이 유리했다.
"몸 관리 잘 해. 덜컥 독 같은 거에 죽지 말고."
"꺼져.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망나니 같은 새끼. 얼마나 가나 보자."
득의함은 숨긴 채 화난 척 돌아서는 궁곡.
자기 딴에는 연기라고 하는 꼴이다.
명한이 그 발자취를 끝까지 살피고 난 뒤 문을 닫았다.
"향아야, 소금 뿌려라."
일단은 넘어갔다.
#
문을 닫자 힘이 풀린 듯 명한이 주저앉았다.
귀의의 처방으로 천폐독을 억누르는 것도 일시적.
슬금슬금 그 독성이 몸을 헤집고 있었다.
얼굴이 상당히 창백했다.
"죄송해요, 도련님."
그 옆으로 향아가 쪼르륵 다가왔다.
"네가 왜 미안해하는 거냐?"
"전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어요. 제가 궁곡 도련님을 제대로 설득했다면······"
두려움과 죄책감이 반씩 섞인 얼굴이었다.
아니, 두려움 쪽이 한 육할은 됐다.
‘평소에 얼마나 들들 볶았으면.’
명한이 짧게 한숨을 토하며 향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움찔하고 몸을 떠니, 작은 동물과 같았다.
"그 망나니가 설치는데 네가 어찌하겠냐. 내가 올 때까지 시간을 잘 끌었으니, 잘못한 것은 없다."
"저, 정말인가요?"
"내가 너와 농담이나 주고받을까?"
"아, 아뇨! 감사합니다, 도련님."
평소와 다른 반응에 향아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이 예쁜 아이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고.’
지랄은 온갖 지랄로 다 했는지.
이제부터라도 잘해주자.
그리 생각하며 구석으로 손을 뻗었다.
과자가 접시째 남아 있었다.
"수고했으니 과자라도 먹고 있어."
"······네? 제가 이걸 먹어도 되나요?"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 봐봐. 먹어도 아무렇지 않아."
한 입 베어 물고는 남은 걸 전부 향에게 넘겼다.
그녀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큰 눈을 깜박이다, 양손으로 과자를 받았다.
그래도 명령은 어길 수 없는지.
아니, 과자가 맛있어 보이는지 구석으로 가서 조금씩 갉아먹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다람쥐 같았다.
아삭아삭아삭아삭.
‘정말 다람쥐 같네.’
저 작은 아이의 두려움을 걷어내려면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럼 이제······"
과자 삼매경에 빠진 향아는 내버려 둔 채 궁곡이 가지고 왔던 바구니를 풀었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약재가 여럿이었다.
‘참 악랄한 여자란 말이야.’
표면상 그녀가 전달한 것들은 모두 약재.
몸을 보호하고 체력을 회복하는 효능을 지녔다.
하지만 이는 천폐독과 만나면 모조리 독이 되는 것들.
독을 쓴것도 모자라 확인 사살까지 하려는 심성이다.
"소백의 모친에게 천마를 빼앗긴 원한이라고는 하지만, 자식에게까지 이러다니. 독하다 독해."
약재는 한곳으로 모아 정리해 두었다.
속셈을 안다면 그걸 이용하는 것은 재량이다.
독이 되는 약재라지만, 어쨌든 약재는 약재.
‘독과 약의 쓰임은 하기 나름이지.’
명한이 품 안에서 낡은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쌍각사의 굴에서 보상으로 얻은 지중급 무공서였다.
"오독경(汚毒經)."
남만의 독문, 오독문의 비전 무공서.
오독문이란 온갖 흉험한 독충과 벌레 등에 통달한 이들의 집합체.
천폐독에 미치는 독성을 제어하기에 이보다 좋은 무공도 얼마 없었다.
"습득, 오독경."
습작은 기본적으로 게임 기능을 기반으로 한다.
무공을 익히고 그 경지를 높이는 것도 동일.
소백의 체질은 내기의 흐름이 제한되는 절맥이나, 오독경은 엄밀히 말해서 내공과 상관없다.
다루는 건 어디까지나 독기.
짧은 명령어에 오독경이 먼지처럼 변하더니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어떻게 기운을 느끼는지.
어떻게 기운을 운용하는지.
한 번에 각인되었다.
‘신기한 감각. 하지만 어색하진 않아.’
숨 쉬는 것과 같았다.
기능에 대해 모든 걸 제어하진 못하지만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보내준 선물은 감사히 먹어야지."
혈염마녀가 보내준 약재들을 하나씩 꺼내서 먹었다.
백 년 묵은 하수오, 수십 년 된 영지, 설산에서 구해온 홍초 등.
값어치로만 따지자면 수천, 수만 금이 넘을 진귀한 것들이었다.
[10년 내공이 증가합니다]
[5년 내공이 증가합니다]
[체(體)가 1 증가합니다]
[기(氣)가 5 증가합니다]
[오독경의 경지가 상승합니다. 2성 -> 3성]
[오독경의 경지가 상승합니다. 3성 -> 4성]
과연 비싼 값 하는 약재들이었다.
순식간에 15년 내공과 기본 속성치가 증가했다.
심, 기, 체의 기본 속성은 무공의 위력을 결정하는 필수적인 요소.
흔히 말하는 심공(心功), 기공(氣功), 외공(外功)의 근간이다.
내공과 생명수치를 제외하더라도 기본 스텟의 향상은 언제나 환영할 일.
혈염마녀가 알았다면 배를 잡고 뒤집힐 상황이었다.
"끄윽. 약 먹다가 배 부르는 건 처음이네."
볼록 나온 배를 툭툭 치며 명한이 웃었다.
초반, 주인공 소백을 괴롭히는 가장 큰 약점은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체질.
기본 심법조차 다루지 못하니 내공은 티끌만치도 쌓을 수 없었다.
게다가 몸 안에는 천폐독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무용지물.
후에 이를 보완할 방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반병신인 상태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독경이 있지."
오독경은 독을 다루는 자에게는 일종의 바이블.
천폐독을 해소하지는 못해도, 독이 약성을 잡아먹지 못하게는 할 수 있다.
밑거름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무공이었다.
‘게다가 이 오독경은 후일을 위한 필수 무공이지.’
몇 년 후에 벌어질 남만 이벤트.
키 아이템으로의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쉬익······?"
그렇게 명한이 오독경을 예찬하던 순간.
쌍각사가 밖의 인기척에 반응하며 혀를 날름거렸다.
올 사람이 왔다는 의미.
명한이 괜찮다는 듯 머리를 톡톡 쳐, 소매 안으로 집어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 저 귀의입니다."
"들어와."
약속했던 시간이었다.
#
귀의는 방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움찔했다.
약에 통달한 인물답게 방 안에 남은 약향을 단번에 간파한 것이다.
‘전부 천폐독을 악화시키는 약재들.’
누가 손을 썼는지는 안 봐도 훤했다.
"도련님. 혈염마녀께서 약재를 보냈습니까?"
"몸보신하라고 넉넉하게."
"설마 드신 건 아니겠죠?"
"보낸 성의가 있는데 어떻게 무시하겠어."
배를 툭툭 치며 가볍게 대꾸하는 명한.
그 모습에 귀의가 깜짝 놀라며 그의 손목을 황급히 잡았다.
천폐독이 발작하면 처방으로는 누르기 힘들다.
‘도련님이 죽으면 해답을 들을 수 없어.’
그 이유에서라도 아직은 죽으면 안 된다.
"······어?"
헌데, 명한의 맥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약을 먹었다면 천폐독이 악화하여 오장과 육부에서 독기가 올라와야 정상.
하지만 명한의 맥은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천폐독마저 지금은 잠든 것처럼 조용했다.
"독을 제압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지."
"······오독경?"
경맥을 타고 흐르는 기운.
귀의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독을 연구하기 위해서 남만을 떠돌기를 8년.
독특한 기운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다.
"천폐독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독을 다룰 줄 알아야 하지."
"대체 언제 오독경을 연마하신 겁니까?"
"이 복마전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름의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오독경은······"
"호기심은 거기까지만. 어때? 이 상태면 천폐독을 밀어낼 수 있겠어?"
귀의가 입술을 달싹였다.
호기심은 강했으나 답이 우선이었다.
길게 뻗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입이 열린 건 향이 하나 타기도 전.
"말해 봐."
"첫째는 강한 양기를 품은 영약입니다."
"백 년 산삼이라면 가능하겠어?"
"네. 백 년······네?"
"이 정도면 충분한지 묻고 있어."
명한이 가슴 안쪽에서 백 년 산삼을 꺼냈다.
짙은 약향에 귀의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어, 어떻게 이런 귀한 물건을?"
"충분한가 보네. 그럼 다른 조건은 뭐야?"
"허, 허어."
백 년 산삼을 도라지처럼 취급하고 있다.
‘소백 도련님께 천마궁 약실이 허락됐을 가능성은 없어. 대체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겨우 당혹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다, 다음으로는 적수와······"
"여기 가지고 왔어."
"극도의 음기를 지닌 물이······"
"한빙호의 물이면 되겠지."
말할 때마다 툭툭 던지는 재료들.
귀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지금 명한이 내놓은 재료들은 하나하나가 진귀했다.
몇만 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들 정도.
‘대체 이걸 소백 도련님이 어디에서?’
천마궁 최하서열의 소궁주가 구할 물건이 아니었다.
"호기심으로 망설일 셈이야? 아니면 기회를 잡을 거야? 네 눈앞에 있는 적수는 거짓이 아닌데."
"······"
기색을 읽은 명한이 적수를 손끝으로 밀었다.
반짝이는 알갱이 형태의 구슬은 거짓으로는 꾸밀 수 없는 진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귀의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도련님 편에 서게 되면 일전에 말씀하신 것들도 가능해지는 겁니까?"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알겠습니다. 저, 귀의. 앞으로 도련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생각은 많았지만,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그만큼 귀의의 ‘약황비전’과 ‘백약문’에 대한 열망은 깊었다.
천마궁의 서열 다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그 나이에 무릎 꿇으면 관절염 생겨. 일어나."
그리고 그 사실은 누구보다 명한이 제일 잘 알았다.
무릎 꿇은 귀의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상부상조로 생각하자고.’
닥쳐올 수많은 시련에 대비하기 위한 첫 번째 패.
"해독부터 할까?"
준 만큼 부려먹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