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35)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시간이 지나자 머리가 조금씩 식어갔다.

습작 속에 들어와 있는 현실.

이 가정은 여전히 와닿지 않지만, 부정하지 못하는 건 지금 주변의 현실이었다.

여전히 걱정스럽게 보는 향아.

옛 중국 복식대로 펼쳐진 방의 전경.

그리고 거울에 비친 앳된 얼굴까지.

"잘생기긴 했네."

설정상 당대 천마가 동방 최고의 미녀를 납치하듯 얻은 것이 주인공 소백.

말하자면 중화 최고 혈통과 고려맥의 혼혈이었다.

‘무성지체’라는 특이 체질만 아니었어도, 주인공은 천마의 총애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혼혈에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체질.’

힘과 혈통이 우선시되는 천마궁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아니, 인정받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향아야."

명한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향아를 불렀다.

"네, 네?"

"내가 쓰러진 것이 언제라고 했지?"

"전날 궁곡 도련님의 초대를 받고 난 다음이요."

이곳이 습작 속의 세계임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곳을 탈출하기? 습작 속 제왕이 되기?

아니다.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다.

"궁곡. 그래, 그런 흐름이었지."

궁곡은 주인공 소백과는 배다른 형제 사이.

천마궁 48 소궁중 서열 14위에 위치한 인물이다.

천폐독을 사용해서 주인공 소백을 죽이려 한 범인이기도 하다.

‘이야기 초반의 주된 빌런. 하지만······’

그건 고작 시작일 뿐이다.

습작 속 소백은 온갖 고초를 다 겪는다.

위기는 밥 먹듯이 찾아오고 죽음에 가까운 상처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역경과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주인공.

과거, 명한은 그것이 왕도라 여겼다.

"미쳤다고 그걸 겪냐?"

하지만 명한은 그 흐름을 따라갈 마음이 없다.

이 습작을 쓴 것은 자신이고, 모든 내용 모든 장면 또한 전부 알고 있다.

‘그래. 내 작품에서까지 병신 취급받을 순 없지.’

알고도 당하면 그건 머저리일 뿐이다.

"소백 도련님, 깨어나셨습니까?"

그 순간.

문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들어보는.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독에 당한 뒤 소백을 찾아오는 사람이라면 하나뿐.’

신산귀의(神山鬼醫).

흔히, 귀의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귀의인가. 들어와."

명한은 최대한 어색함 없이 그를 호출했다.

이내, 천이 걷히며 주름 가득한 노인이 들어왔다.

푹 파인 눈은 산자보다 죽은 자에 가까웠다.

‘습작 속 묘사 그대로의 모습.’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몸 상태는 어떠신지요?"

"네가 말해 봐. 몸이 무겁고 머리가 어지러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독입니다. 누군가 도련님 음식에 독을 탔더군요."

"내 음식에?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배다른 형제, 궁곡.

범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대응할 어떤 수단도 없었다.

"암각(暗閣)에서 조사 중입니다. 다만, 음식을 나르던 아이가 이미 시체로 발견된 것으로 봐서는······"

"이미 감췄다는 말이네."

"적지 않은 시일이 요구될 것 같습니다."

"됐어."

"네?"

"독을 먹이고 숨기려고 작정했다면, 이미 전후사정을 전부 고려했다는 얘기잖아. 이렇게 뒤진다고 잡힐 사람은 아니겠지. 쓸데없는 인력낭비는 하지 마."

귀의가 명한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소백 도련님이 이런 느낌이었나?’

이질적인 반응이었다.

"그보다 천폐독은 어떻지? 해독은 가능하겠어?"

"네. 천폐독은······음? 도련님께서 어찌?"

"그건 중요하지 않아. 해독은?"

"아······그건 좀 시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천폐독은 서역 십대 극독 중 하나. 제 처방으로 독기를 눌러두기는 했으나, 쉬이 해독될 물건이 아닙니다."

"역시 그런가."

이 내용 또한 알고 있었다.

귀의는 실제로 몇 년에 걸쳐서 해독을 시도하나, 모조리 실패했다.

이유라면 독을 쓴 궁곡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녀의 출신은 귀의의 대척점에 있는 독곡(毒谷).

암중에서 펼쳐지는 독의 싸움에서 밀린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귀의가 소백의 진영으로 합류하기는 하지만······’

습작 기준으로 4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명한은 4년이나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귀의. 네 약황비전(藥皇秘典)이 아직 팔성이었나?"

"······네?"

"백약문의 약황비전 말이야. 10성에 도달하지 않으면 영약의 도움 없이는 치료가 어렵겠지?"

"도, 도련님께서 그걸 어떻게?"

그야 내가 썼으니까.

명한이 속내는 숨기며 말을 이었다.

"아쉬울 따름이야. 백년백황이나 적수같은 영약이 있었다면 경지를 끌어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도련님께서 약황비전(藥皇秘典)을 알고 계십니까?"

"그게 궁금해?"

"약황비전은 궁에서 소실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전인또한 없어진 지 오래. 도련님께서 그 내용을 어찌 알고 계십니까?"

명한이 소백의 얼굴로 웃었다.

귀의의 평생소원이라면 약황비전의 후반부를 보는 것.

그리해야 십성에 도달.

그의 본래 사문, 백약문(百藥門)에 본적을 올릴 수 있다.

갈망을 알면 낚는 건 쉽다.

"만약 내게 그런 영약이 있다면 어떨 거 같아?"

"도련님께 있다는 말입니까?"

"묻고 있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귀의는 천마궁 내의 중도세력 중 하나.

자식 간의 경쟁으로 만들어진 각 세력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빼어난 실력으로 수많은 곳에서 회유를 시도했지만, 특유의 깐깐함으로 지금껏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4년 후에는 내 편이 되지만, 그건 너무 늦지.’

그사이에 겪을 고초 따위, 경험할 생각이 없었다.

"으음. 도련님께서 어떻게 이 내용을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제게 도움을 주신다면 저 역시 상응하는 방식으로 은혜를 갚겠습니다."

"내 휘하로 들어오는 건 어때?"

"도련님."

"어차피 너한테 궁내의 권력이 큰 가치가 없다는 건 알아. 그렇기에 지금껏 수많은 회유를 뿌리쳐 왔던 거겠지."

"그걸 아신다면 무의미한 권유는 하지 마시죠."

"의미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날 따라온다면 적수만이 아니라 백년백황. 그리고 소실된 약황비전의 후반부를 볼 수 있게 해 줄게."

크게 던진 미끼에 귀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마따나 지금 명한이 던진 미끼는 그의 일생일대 소망이 뭉친 패키지 상품.

만약, 조금이라도 소백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덜컥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인물은 다름 아닌 소백.

천마궁 내의 유명한 망나니이자 내놓은 자식이다.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외인의 혈통.

이 딱지는 섣불리 믿음을 주지 못하게 했다.

"얼굴을 보니 생각을 알겠네."

그리고 그건 명한 또한 꿰뚫고 있는 부분이었다.

어차피 한 번에 낚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낚시는 인내심의 싸움.

"당장 강권하지는 않을게. 천천히 지켜보며 생각을 정리해."

"으음······"

"그래도 이렇게 말로만 하는 건 약하겠지. 급한 건 역시 적수려나? 그것부터 구해올게."

"정말입니까?"

"한 시진 후에 와. 그때 건네줄게."

아직은 적수가 손에 없다.

하지만 어떻게 얻는지는 이미 안다.

그걸 위해 필요한 시간이 대략 두 시간.

"배웅은 필요 없지?"

습작 속 주인공.

적응의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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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궁은 기본적으로 미로다.

본래부터 천산을 기반으로 중원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어적인 행태로 구축된 요새.

속속들이 전부 꿰차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나를 제외하면.’

명한은 이 천마궁의 설계자.

첫 작품이라는 열정으로 모든 미로, 모든 장소를 직접 스케치했다.

그 분량이 얼추 셈해도 100페이지.

‘그때의 난 미친놈이었지.’

열정이라는 말도 가벼웠다.

"묘사대로라면 대충 여기인가."

내실의 안쪽, 책장으로 가득 찬 방.

얼핏 봐서는 특별한 것이 없지만, 명한에게는 그 구조가 눈에 훤했다.

책장 안쪽의 기관을 작동시키고, 횃대를 돌렸다.

그르르릉, 하는 울림과 함께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 도련님 이게 대체 뭐죠?"

"일종의 비상구. 내궁까지 침범당했을 때를 대비한 통로야."

"이런 통로는 어떻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 통로와 맞닿은 영역이지."

천마궁 지하에는 지난 세월이 모조리 묻혀 있다.

은거에 들어간 전대의 검마.

마교를 침범했다가 천마에게 당한 중원의 고수.

세월에 의해서 만들어진 천혜의 영약이나 무덤과 함께 묻혀버린 무공서 등.

마굴이며 보물산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걸 다 챙길 수는 없지.’

소백의 수준을 고려하면 가능한 장소는 단 하나.

"설마 이곳을 내려가시게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손님이 찾아온다면 네 주인은 독에 당해서 몸져누웠다고 전해."

"하지만······"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향아.

몸종이 주인을 걱정하는 마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눈이었다.

평소 소백의 태도를 생각하면 괴리감이 있는 모습.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설명하기에는 긴 인연이 엮여 있었으니까.

소백만큼 괴롭고 힘든 삶을 사는 것이 향아.

명한이 그녀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련님?"

소백이 아닌 자신이라면 어떨까.

작가가 등장인물의 결말을 바꾸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 이곳을 현실이라 생각하기로 했다면······’

고통과 시련보다는 행복과 기연이 낫다.

언제나 막히기만 했던 현실과는 다른 세상이니까.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

멍한 얼굴의 향아의 머리를 다독이며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컴컴한 통로의 음습함이 온몸을 감싸고.

깊은 울림이 발소리로 이어지기를 잠시.

[쌍각사(雙角蛇)의 굴에 진입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창이 눈앞으로 나타났다.

던전에 들어왔을 때 생성되는 일종의 알림말이었다.

흔하지만, 그만큼 직관적인 방식.

[쌍각사(雙角蛇)의 굴을 통과해라]

[의뢰 등급 : 65급]

[제한 시간 : 6시간]

[완료 보상 : 지중(地中)급 무공 비급, 인상(人上)급 영약]

현재 소백의 등급은 1.

지금 던전의 등급은 무려 65급이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도 많이 봐 준 형국.

하지만 명한의 얼굴에서 읽히는 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래. 하나씩 먹어보자고."

자신감과 설렘.

다가올 것에 대한 흥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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