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설 속으로
[······죄송합니다만, 귀하의 글은······]
명한은 첫 줄을 다 읽지도 않고 화면을 닫았다.
몇 번이나 반복한 퇴짜였다.
따라붙은 형식적인 사과는 읽고 싶지도 않았다.
"또 떨어졌네. 이젠 응모할 곳도 없는데."
명한은 국문과 대학 4년 차.
좁은 취업 문은 포기하고 소설가를 희망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어릴 적에는 글솜씨 있다는 말도 제법 들었다.
주변에서도 글 한번 써보라고 종용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 희망으로 끄적이기를 벌써 3년째.
아쉽지만, 희망은 희망일 따름이었다.
"하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려나."
가봐야 반길 사람도 없는 곳.
뒤숭숭한 생각에 명한이 뒷머리만 박박 긁었다.
띠링.
그때, 컴퓨터 하단으로 채팅이 올라왔다.
즐겨 쓰던 채팅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이걸 로그인 해 뒀나?’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시지를 클릭했다.
[신 : 명한. 무적패도 다음 화 왜 안 올라와?]
[명 : 아, 너였냐?]
소설 팬카페에서 알게 된 독자.
한자리 조회 수의 처참한 결과에도 팬이라며 자청해준 기쁨에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거의 친구 사이였다.
[신 : 기다리다가 숨넘어가겠어. 다음 화는 언제 나와?]
[명 : 에이, 씨. 심란한데 재촉하지 마. 이번에 응모 올렸다가 퇴짜 맞았다고]
[신 : 뭐? 어쩌다가?]
[명 : 글이 너무 지루하대. 나쁜 새끼들]
[신 : 하하. 네 글이 좀 늘어지긴 하지]
[명 : 넌 내 팬 맞냐? 응원해도 모자랄 판에]
핀잔에 명한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전이라면 진지하게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힘들다.
‘나한테 재주가 없나?’
어느 정도는 포기한 상태였다.
[신 : 나는 네 그 궁상맞은 글재주가 좋은데 말이야. 이곳 사람들의 취향은 나와는 좀 다른가 보네]
[명 : 계속 그러기?]
[신 : 하하하, 미안. 그래도 글은 계속 쓸 거지? 나같이 기다리는 독자도 있다고]
[명 : 모르겠어. 글은 때려치우고 고향에나 내려갈까 생각 중이야]
[신 : 뭐? 진짜!?]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채팅이었다.
‘하나뿐인 팬인데. 미안하네.’ 명한이 볼을 긁적이며 타자에 손을 올렸다.
[신 : 그만두지 마. 이 지루한 곳에서 네 글만큼 시간 보내기 좋은 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보다 신의 채팅이 먼저였다.
응원인지 악담인지 모를 모호한 내용이었다.
[신 : 응모인지 뭔지에 그냥 붙게 해 줄까? 그러면 계속 글을 쓸 거 같아?]
[명 : 에휴. 네가 무슨 수로? 그리고 그렇게 붙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내 글이 지루한 건 그대로인데]
[신 : 아니, 난 재밌다니까? 뭘 어떻게 하면 계속 글을 쓸 건데? 응?]
꽤 다급함이 느껴지는 채팅이었다.
‘어떻게.’ 명한이 한 단어에 눈을 고정한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글이 달라질까.
[명 : 경험일까? 국문과 4년짜리가 머리에서 쥐어짜기에는 글에 생동감이 너무 없었던 모양이야]
[신 : 경험? 경험만 있으면 된다는 거야?]
[명 : 말이 그렇다는 거지. 무협소설을 쓰는데 경험을 무슨 수로 하겠냐. 내 상상력과 글재주가 조악한 걸 탓해야지]
[신 : 아니야. 그 정도면 가능할 거 같아]
[명 : 뭔 소리야, 그건]
묘한 채팅에 반문을 남겼지만, 신은 그대로 채팅방을 나갔다.
‘뭐야 이 새끼.’
명한이 잠시 입술을 비죽이다 그대로 컴퓨터를 껐다.
어차피 길게 대화할 마음도 없었다.
책상에 이어붙인 침대로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꿈이라도 좀 재밌게 꾸자."
그러면 글도 좀 재밌어지려나.
궁색한 희망이었다.
#
누군가 몸을 흔드는 느낌.
명한은 부스스한 머리를 털며 깨어났다.
잠을 꽤 오래 잔 듯 전신이 뻐근했다.
"끄응. 얼마나 잔 거야?"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겨우 밀어냈다.
뿌연 방 안의 전경이 시야에 잡히고, 그 뒤를 이어서······
"으악!? 누구야, 당신!?"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나이는 15~16세 정도.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소녀였다.
하지만 그 미모를 반기기에는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도, 도련님. 저 향아에요. 도련님을 시중들고 있는 향아······"
"향아? 시중? 도련님? 무슨 소리예요?"
"절 못 알아 보시는 거예요?"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
저도 모르게 괜찮다고 끄덕일 뻔했다.
"아니, 저기 잠깐만요. 난 그쪽이 누군지 모르는데, 절 아세요?"
"세상에. 귀의(鬼醫) 어르신의 말씀이 옳았구나. 그 독이 도련님을 이렇게 만들었어."
"귀의는 또 뭐람. 이봐요, 그쪽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집에 와서······"
행패인가요.
뒷말을 맺던 명한이 멈칫했다.
그제야 눈앞의 향아가 아닌 주변 전경이 시야에 잡혔기 때문이다.
동양풍의 실내 장식과 예스러운 문.
월 45만 원짜리 원룸과는 전혀 다른 전경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걸까.
눈을 비비고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도련님, 여기 계세요. 제가 어르신을 불러올게요."
"아니, 잠깐만!"
순간, 자리를 뜨려는 향아를 향해서 명한이 무심코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손목이 잡혔다.
그리고.
[이름 : 향아]
[나이 : 16세]
[등급 : 10급]
[체질 : 벽안지체(闢眼之體) / 천상(天上)급]
[능력 : 심(6급) / 기(5급) / 체(9급)]
[생명 : 90 / 90]
[내공 : 5년 / 5년]
[무공 : 소소보(小小步) / 인하(人下)급 2성]
[사고 : 당신을 걱정하고 있다]
갑자기 눈앞으로 떠오르는 이상한 창 하나.
이름부터 등급.
체질과 능력 따위가 적힌 상태창이었다.
흔히 게임에서 사용하는 형태.
하지만 이게 왜 눈앞에 나타난단 말인가.
"······잠깐만."
근데, 묘하게 이 상태창이 눈에 익다.
그 형태만이 아니라 내용과 이름들까지.
향아, 벽안지체, 소소보 등.
전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단어들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명한의 눈동자가 천천히 내려가다 크게 뜨였다.
"내 습작?"
오래전, 소설을 연습할 당시에 쓴 글.
열정이 넘치던 시기라 온갖 설정에 그림까지 동원했었다.
지금 이 단어들은 그때 썼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건 소설 속 내용이잖아.’
현실은 아니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목소리.
명한이 시선을 옮겨서 향아를 바라봤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하지만 그 이목구비는 어딘가 낯익다.
글로 녹여낸 그 모습 그대로.
"그쪽이 그러니까······향아라고?"
"네. 도련님 시종인 향아에요. 알아보시겠어요?"
"······그럼 혹시 내가 있는 곳 이름이 뭔지도 알아?"
"네? 그야 당연히 천마궁이죠."
"하."
천마궁.
그래, 그 이름이다.
습작에서 주인공의 배경이 되는 공간.
설정상 주인공은 무림을 통일한 천마의 자식.
이 천마궁 안에서 다른 자식들과 경쟁하면서 온갖 일들을 다 겪는다.
그게 습작 속 핵심 설정.
‘그리고 이때 주인공이 당한 독의 이름이······’
"천폐독(千廢毒)."
"어? 귀의 어르신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도련님도 독의 정체를 알고 계셨던 건가요?"
"하아, 미치겠네. 이거 진짜냐?"
모든 상황이 습작 속 진행과 동일하게 흘러갔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글 쓰는 것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니까.
모든 장면, 모든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꿈인가?"
"도련님?"
"거기······아니, 향아야. 내 뺨 한 대만 때려 봐라."
"네?"
"꿈이면 좀 깨게. 한대만 세게 때려 봐."
"도······도련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생각 없이 던진 말에 향아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채 몸도 덜덜 떨었다.
단순히 상전을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아, 맞다. 이 주인공이라는 새끼······’
개차반, 망나니다.
글을 쓸 당시 망가진 주인공 캐릭터가 유행.
그 설정을 잔뜩 넣어서 만들었었다.
자신의 열등감과 두려움 따위를 주변에 푸는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
향아의 이런 반응은 주인공의 성격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려면 인정해야 하잖아."
이 모든 가정은 소설 속 내용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
눈앞의 향아의 반응도, 장소가 천마궁이라는 것도.
지금 말을 하는 명한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 역시.
인정해야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정말로 꿈이 아니라고?’
향아 대신 직접 볼을 꼬집었다.
느껴지는 건 현실이라는 고통뿐이었다.
"하아, 미치겠네. 향아야, 괜찮으니 일어나라."
"저, 정말인가요?"
"그래. 내가 뭘 좀 착각했던 모양이야."
주저앉은 향아는 일으켜 세우고 눈가를 가볍게 두드렸다.
당시의 습작은 퓨전.
현대의 기억을 가진 주인공이 무협에서 환생하며 게임 능력으로 활약하는 내용이다.
[이름 : 소백]
[나이 : 16세]
[등급 : 1급]
[체질 : 무성지체(無成之體) / 인하(人下)급]
[능력 : 심(1급) / 기(1급) / 체(1급)]
[생명 : 3 / 10]
[내공 : 1년 / 1년]
[무공 : 없음]
[상태 : 중독(천폐독) / 지속적인 생명력 감소]
그러니 당연히 주인공의 상태창도 존재한다.
익숙한 설정에 명한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젠 더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난 지금 내 습작에 들어와 있어.’
지독히도 황당한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