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너는 나와 싸우고 있었다. 바로 나, 왕일과 말이다!”
두 사람의 주위로 바람이 일었다.
처음엔 미풍으로 주위의 풀이파리를 흔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이내 그것은 힘을 더했고 흙과 돌을 끌어 모으더니 이내 광풍이 되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도를 든 것도 내 손이고, 내공을 움직이는 것도 내 의지다!”
돌과 흙을 품은 거친 바람과 달리 부드럽고 세상 무엇보다 깨끗한 바람이 왕일의 백회혈을 통해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단전과 중단전, 상단전에 깃들어 있던 내력이 도를 향해 치달렸고, 몸 구석구석에 퍼져있던 내력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것들이 떠나며 빈 곳으로 새롭게 흘러들어온 기운들이 자리했다.
이미 검은 완전히 빠져 땅에 뒹굴고 있었고, 피는 멎어 있었다.
“불사심공이 죽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느냐? 그럼 너는 무엇이지? 불사심공을 익혔다고 자신하는 넌 무엇이냐? 넌 검을 들고, 내공을 움직이기 위한 인형에 불과한 놈이냐? 그것들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냐?”
이 물음에 허장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
불사심공을 단지 죽은 사람을 위한, 그것을 부리기 위한 내공심법이라 치부한다면 그것을 익힌 자신도 죽은 시체여야 했다.
“도구가 의지를 가진 짐승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도는 여전히 구부러지고 있었다.
거기다 왕일의 쏟아내는 내력이 높아질수록 점점 속도를 더해갔다.
“이, 이럴 수는 없어!”
허장천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자신이 그간 쏟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불사심공을 익히고자 발버둥 치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것들이 모조리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난, 난…….”
허장천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왕일의 말처럼 자신은 그저 도구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사심공만 익히면 최고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죽은 사람을 위한 내공심법을 가지고자 했다면, 일단 자신이 죽어야 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면 스스로를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어야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추구한 불사심공을 익힌 것은 살아있는 자신이었다.
결코 그가 처음부터 원했던 불사심공의 마지막이 아닌 것이다.
“아니야!”
쾅!
허장천의 외침과 함께 결국 도가 부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력을 담고 있던 매개체가 없어지며 강한 충돌이 발생했다.
왕일이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갔고, 허장천도 마찬가지였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주위로 흙먼지와 돌멩이가 마치 암기라도 되는 것처럼 쏘아지며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죽어!”
먼저 반격한 것은 허장천이었다.
석휘명과 혈천강시를 흡수할 때 나타났던 것과 같은 붉은 막이 그의 몸을 두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붉게 타올랐다.
그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
그의 눈도 붉게 변해있었다.
온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허장천의 몸과 정신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는 왕일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었다.
왕일은 알몸이었다.
온 몸의 털이란 털은 죄 사라진 상태였다.
그의 눈자위는 하얗게 변해 있었으며, 그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검은 눈동자는 허장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렵지 않다.’
자만도 아니었고, 자신감도 아니었다.
허장천의 몸부림은 왕일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
왕일이 손을 뻗자 부러진 도가 빠르게 날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쥔 왕일이 손에 힘을 주었다.
‘넌 나를 보는 것 같구나.’
왕일이 땅을 박찼고, 그런 그의 몸이 흰색으로 감싸였다.
아니, 이내 그것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희고 검은 기운이 왕일의 몸을 휘돌았다.
‘세상을 증오하던, 모든 것에 분노를 품었던, 그리고 또한 절망했던…….’
허장천의 모습은 과거의 왕일이었다.
붉게 물든 몸은 그가 가졌던 붉은 눈과 다를 바 없었다.
퍽!
“끄윽…….”
허장천의 입에서 신음이 새나왔고, 그의 고개가 밑으로 숙여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심장을 뚫고 들어간 검붉은 도신이었다.
“나는 비록 짐승일망정 내 의지로 살아갈 것이다. 넌 네가 바랐던 것처럼, 네가 추구했던 것처럼 도구로 죽어라.”
왕일이 손을 놓자 허장천의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두 손은 가슴에 박힌 도를 굳게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빼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더욱 깊게 찔러 넣는 중이었다.
“나, 난 죽음으로 완성될 것이다. 기다려라. 내가 완전한 불사심공을 익히는 그때, 널 죽여주겠다.”
허장천은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손에 힘을 주었다.
죽음이 찾아온 순간, 그는 자신의 죽음이 불사심공을 완벽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바랐던 것처럼.
“끝까지 도구가 되려 하는구나.”
허장천을 일별한 왕일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 인간이 되기 위해, 누군 인간인 것을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짐승이 되기 위해, 짐승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군.”
이 세상은 인간과 짐승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인간도 짐승도 아닌 맹목적인 믿음에 휘둘려 도구가 되는 삶도 있었다.
“서방!”
화영영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외전(1)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적우가 소리를 지르자 왕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적 부교주는 왜 하자는 건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교주님의 무위라면 정파의 대가리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거기다 지금 온 사파들이 우리를 추앙하고 있습니다. 마도천하를 이룰 수 있는 기회란 말입니다!”
적우는 삼 일 째 왕일을 설득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정파 놈들이 모두 뒈질 때까지 싸우자고?”
“몇몇 문파만 제거하면 될 일입니다.”
“과연 그럴까? 봉문 한답시고 문 걸어 잠근 놈들을 두들겨 패면 끝날까?”
“…….”
적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파의 질긴 놈들이 그냥 있을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쓸 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지부를 늘리는 것에나 신경 써. 어차피 막을 놈들도 없잖아.”
“나중에 문제의 소지가 될 겁니다.”
“적당히 먹으면 돼. 일부러 시비 걸라고 하지 말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정파가 아니라 사파입니다. 분명 객점이나 홍등가…….”
말을 하던 적우가 가만히 왕일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아,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물러가겠습니다.”
“뭐?”
지금까지 신나게 떠들던 적우였다.
그런데 갑자기 알겠다고 물러가려하자 이번엔 왕일이 그를 불렀다.
“무슨 소리야?”
“예?”
“왜 갑자기 그러냐고.”
“시키신 대로 일을 처리하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왜?”
“아니, 시키신 대로 한다는데도 불만이십니까? 그럼 당장 정파놈들하고 붙을까요?”
“그게 아니잖아!”
“그럼 뭘 어쩌란 겁니까?”
아주 모르쇠로 나왔다.
“이게……!”
“그만해 서방.”
화영영이 들어오며 왕일을 말렸다.
“적 부교주는 그만 가봐.”
“예.”
화영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우가 허리를 숙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야! 거기 안 서!”
쫓아 나가려는 왕일을 화영영이 붙들었다.
“서방, 왜 그래?”
“아니 저 자식이 날 무시하잖아!”
“무시 할 만 하니까 하지. 솔직히 이번 계획을 짠 건 나잖아?”
화영영의 말에 왕일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왜 치려고? 쳐봐! 쳐봐!”
쪽!
들이대는 화영영의 볼에 왕일이 입술을 맞췄다.
“흥!”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는 화영영이었지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적우 저놈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어. 사파를 먼저 통일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해 낸 것은 내가 아니라 화매일 거다. 그렇게 말하면 어디 덧나? 어째서 저 따위로 하고 나가냔 말이야.”
“그거야 대놓고 면전에서 바보라고 말하기 싫으니까 그렇겠지.”
여기서 발끈 할 것 같았으면 볼에 입맞춤을 하지도 않았으리라.
“교주, 항복이네.”
그 순간 악불군이 항복이라고 말을 하며 들어섰다.
그러자 왕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영영을 외면하고 악불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르시겠습니까?”
“모르니 항복이라는 거 아닌가.”
악불군의 뒤를 따라 사마유운 등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거기에는 아까 도망치듯 사라졌던 적우도 있었다.
“바보인 저도 아는데 여러분들이 모른다니 이상하군요.”
그러면서 쭈욱 훑어보는데, 그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나도 아는 걸 모르는 너희들은 바보보다 못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허, 교주. 이제 그만 그 눈깔 치우시는 게 어떠신가? 하극상이란 좋은 말이 떠오르기 전에 말이네.”
아무래도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말씀 드리지요. 어째서 허장천의 검이 제 호신강기를 뚫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제 도가 그놈의 가슴에 틀어박힐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말을 마친 왕일이 화영영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달싹였는데, 그 뜻은 분명했다.
[바보.]
화영영도 모르는 사람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서방, 죽는다.”
“흠흠, 일단 제가 싸우는 것을 보셨다면 두 번이나 그것에 관한 실마리를 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것을 떠올리고 써먹었으니까요.”
“두 번?”
사마유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예. 그중 하나는 그놈이 제 도를 잡았을 때였습니다.”
“아!”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탄성을 내뱉었다.
단순히 찌른 것 말고도 잡는다는 것부터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내가 왜 그것을 생각 못했지? 분명 교주의 도에는 강기가 둘러쳐졌을 것이니, 일체의 충돌 없이 잡는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리고 그보다 먼저 실마리를 준 것이 있었지요. 놈이 석휘명과 혈천강시의 내공을 흡수한 것 말입니다.”
“흡성대법?”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럼 두 가지를 놓고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었다.
“쯧쯧.”
왕일이 혀를 차자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진동을 일으켰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살기를 뿜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왕일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허장천이 익힌 불사심공은 같은 내공을 익히고 있으면 흡수가 가능한 대법이었습니다. 혈천강시를 이용할 때부터 개발한 것이겠지요. 그의 본류인 고루문이 하고자 했던 방법이었을 테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석휘명과 혈천강시의 내공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다만, 그러려면 자신의 백회혈을 열어야 하는데 아마도 그것을 망설였을 겁니다.”
“그 전에도 막강하지 않았나?”
“혈천강시를 제작할 정도면 자신의 몸에도 술수를 부렸겠죠. 거기다 약도 한몫했고요. 어쨌거나 내력을 흡수하고 제 도를 잡았을 때, 그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몸을 검이 뚫었을 때는 확실해졌죠. 탄자결이 아니라 흡자결로 제 내공을 끌어당겼다고 말입니다.”
“그 전까지는 서로가 밀어냈기에 충돌이 발생한 것이고?”
“예.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바로 놈을 찌른 한 수였습니다. 놈이 달려들 때, 전 도를 내밀며 강기를 씌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흡자결을 이용해 놈의 내공을 끌어들였죠. 그랬더니 제가 힘을 주기도 전에 도가 그놈의 강기를 타고 빨려 들어가더군요. 놈이 흥분한 덕분에 그런 모든 것들을 잊은 것이 저를 도왔지요. 뭐,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상대했을 터지만.”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불사심공이라…….”
악불군이 왕일을 아래위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그놈은 자네가 익힌 것이 불사심공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진정 그리 믿었다면 놈이 흡자결을 썼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제가 불사심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놈이 흡자결을 썼을 때 충돌이 일어났겠지요.”
동류의 내공에도 성질의 차가 있어 흡자결을 운용한다면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어찌 그리 확신에 차서 외쳤을까?”
“아집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익힌 것이 진짜라는.”
왕일의 말마따나 허장천은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불사심공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따위 것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불사심공이든 아니든 그것을 익힌 사람은 저고, 그것을 쓸 사람도 저니까요. 누가 뭐라든 무슨 상관입니까?”
“맞는 말이네, 그나저나 듣고 보니 교주 자네는 헛고생을 한 셈이군.”
사마유운의 말에 왕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헛고생이라니요?”
“자네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공을 들였던 것은 반탄기가 아닌가?”
“아!”
모두가 탄성을 터뜨렸다.
사마유운의 말처럼 왕일이 어렸을 때부터 공을 들인 것은 반탄기였다.
그런데 정작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은 흡자결이니, 반탄기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반탄기를 익혔기에 흡자결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상대의 내공에 반응하는 속도가 빨랐으니까요.”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말을 마친 사마유운이 왕일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뭘 하고 싶은가?”
“예?”
“사파일통이야 자네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을 이루고 난 뒤에는 뭘 하고 싶으냐는 말이네.”
“듣고 싶습니까?”
“듣고 싶네.”
이것은 사마유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이들의 행보도 왕일의 생각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에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이참에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완전히 바꿀 생각입니다.”
“뭘?”
“사파는 악랄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협공도 마다하지 않으며, 비겁한 수를 써서 정파를 억압한다고 하는 소문 말입니다.”
“어떻게?”
소문을 조작할 수는 있겠지만, 사파 자체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많아서 인식을 바꾸기는 힘들었다.
“제 계획이 실현되면 중원에는 정파와 사파, 그리고 쓰레기가 남을 겁니다. 또한 사파를 생각하면 강함이라는 말이 떠오르겠죠.”
“정파를 쓸어버릴 건가?”
“처음부터 말씀을 드렸습니다. 끝나지 않을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어냔 말일세.”
“비무대회입니다.”
“뭐?”
왕일이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
육 개월 뒤, 중원 각지에 방이 나붙었다.
<정파와 사파의 우위를 가리는 비무대회를 개최한다. 봉문을 했다는 핑계는 용납하지 않겠다. 초대장을 받고도 응하지 않는 정파는 나 혈우마제 왕일이 친히 다시 초대장을 들고 찾아갈 것이다.>
오만한 내용을 담은 머리글을 시작으로 밑으로는 개최할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
“무지하게 몰려왔네?”
화영영이 연단위에서 화석평야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많으면 좋지. 그만큼 소문을 내줄 사람들이 많다는 거니까.”
반대편에는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정파를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괜찮으시겠지?”
한쪽에서 눈을 빛내며 서있는 사마유운 등에게 시선을 준 화영영이 물었다.
“대체 누굴 걱정하는 거야? 염려 마.”
대답하는 왕일을 힐끗 바라 본 화영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왜?”
“저분들이 패하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죽일까봐 걱정하는 거야. 그랬다가는 비무대회고 뭐고 바로 여기가 정사대전의 장으로 변할 테니까.”
“아무렴 그렇게 생각이 없으시려고. 내가 분명히 정사대전은 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설마하니 죽이시겠어?”
왕일이 정파 쪽 진영을 보며 눈을 빛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함부로 못 달려들도록 기를 꺾어 놓으면 되잖아.”
보통 비무대회라면 가장 강하다 생각되는 이가 마지막을 장식하겠지만, 이번엔 예외였다.
왕일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차례를 제일 앞에 놓은 것이다.
그러니 정파 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상대가 나설 것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면, 저들도 깨닫는 것이 있겠지.”
둥!
북이 울리고 왕일이 의자에서 일어나 평야의 중심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지?”
“누구 아는 사람 없어?”
사파에서 대진표를 발표한 것과는 달리 정파는 아직 상대할 사람을 공표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했기에 왕일이 걸어 나올 때는 조용했던 사람들이 정파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사람을 보고는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 그분이다!”
“누구?”
“그렇군. 그나저나 아직 생존해 계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누구냐고.”
“그 왜 있잖은가. 무당의 별…….”
“뭐? 신검 태현도사님 말인가?”
이름이 알려지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신검 태현.
이미 전전대의 인물로 무당의 별이라 불리며 정파의 최고수로 자리한 사람이었다.
몇 십 년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가 죽지 않고 그것도 정정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는데, 그런 인물을 한 번에 알아본 이의 안목을 더 칭찬해주고 싶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정파에서 사람들을 깔아둔 것이리라.
“와~ 이거 볼만 하겠는데?”
“그러게 말이네. 태현도사님이라면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걸세.”
사람들의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두 사람이 만났다.
“허허허, 최연소 마교 교주의 위에 오른 것을 축하드리오.”
수염이 발에 닿을 정도로 길었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허리는 꼿꼿했다.
그리고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워 모호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고맙소.”
“이 늙은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으신지?”
“모르오.”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니, 교주께서는 최선을 다하도록 하시구려. 이 나이 먹도록 검과 놀다보니 깨달음이란 것들이 자주 찾아오더이다.”
“알겠소.”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태현이 검을 뽑아들고 한 차례 휘두르더니 그대로 서있었다.
왕일에게 선공을 양보하려는 모양이었다.
“사양하지 않겠소.”
왕일도 도를 뽑았는데, 이번에 새로 장만한 것으로 강도는 이전의 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날카로움은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속전속결! 결코 변명 따위는 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앞으로 나설 마교 고수들을 위해서도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의 내력을 모두 한 곳으로 집중시키며 왕일이 땅을 박찼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허공으로 뛰어오른 왕일이 도를 내리찍을 때 태현의 검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검의 떨림을 이용해 왕일의 도에 실린 힘을 흩어버리려는 모양이었다.
‘웃기지 마! 땅에 박아주마!’
왕일은 이 한 수로 끝낼 생각이었다.
따다다다다다다당!
검이 연신 도의 옆면을 후려쳤지만 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힘을 간직한 채 여전히 태현의 머리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쉽지 않을 것이오!”
호기롭게 외친 태현이 뒷다리에 힘을 주고는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얕은 수로는 왕일의 도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쾅!
검과 도가 부딪치며 굉음과 함께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컥!”
신음을 흘리며 뒤로 정신없이 물러서는 태현의 온 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검과 부딪친 도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고, 그 파편들이 마치 암기처럼 쏘아져 태현에게 틀어박혔던 것이다.
“이런 암수를…….”
태현은 분노했지만, 왕일은 분노한 태현의 말을 받아줄 정신이 아니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힘 조절을 못했구나.’
예전의 도라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높아진 내공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아니, 그보다 태현의 무위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낮은 것이 문제였다.
모든 것이 문제였고,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벌어진 상황이었다.
“비무에서 암기를 썼다!”
“암수를 사용했다!”
“무림 동도들이여! 사파를 벌합시다!”
“비겁한 사파놈들을 무찌릅시다!”
“와아~”
먼지를 피우며 시커멓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왕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토록 하지 말라고 당부한 일을 자신이 저질렀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서방, 잘 했어.”
화영영이 어느새 다가와 왕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네. 정파와 사파가 사이좋게 한 곳에 어울려 지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저놈들을 보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치고 들어오지 않는가. 정파의 생각도 같을 것이네.”
사마유운도 옆에 섰다.
“저는 처음부터 교주님이 사고 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적우가 말을 하며 손을 내밀었는데, 그곳에는 부러진 도가 들려있었다.
“교주,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신명나게 한 판 어울려 보자고.”
악불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팔이 잘린 후로 새롭게 연마한 도법을 실험할 것이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이 모든 것의 발단이 된 쓰러진 태현의 시체를 일견한 왕일이 도를 받아들고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그런 왕일의 곁을 사파의 무인들이 빠르게 달려갔다.
왕일이 결코 원치 않았던 정사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그의 손에 의해서!
“젠장! 오냐! 네놈들이 바라는 대로 해주마!”
왕일이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더니 땅을 박찼고, 그런 그의 뒤를 화영영과 사마유운, 적우 등이 뒤따랐다.
“하하하하! 내가 바로 악불군이다!”
어느새 빠르게 쏘아져 나가는 악불군의 도에 한 사람의 목이 잘렸고, 피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마교의 교주인 혈우마제 왕일이 만들어갈 마도천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가가, 어서 가세요.”
멀어지는 마을을 보며 허진영이 머뭇거리자 허혜령이 그의 손을 끌었는데, 그녀의 품에는 어린아이가 안겨 있었다.
“언젠간 다시 돌아 올 수 있겠지.”
허진영이 품을 두드렸는데, 그곳에는 혈천강시의 제조법이 들어있었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 그곳은 서장이라 명명된 곳이었다.
외전(2)
백발에 긴 수염을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기른 신선풍의 노인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끈질긴 녀석들, 아무리 내가 길렀다지만 정말 상대하기 싫은 놈들이야.”
혼자서 중얼거리며 산을 오르는 노인이 무엇을 느낀 듯 옆에 솟아오른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흠… 말로는 들었지만 전설인줄 알았는데, 내가 실제로 볼 줄이야.”
무엇을 본 것일까?
옆에 있는 봉우리라고 해도 거리가 무려 이백여 장이나 떨어진 곳이었고, 더군다나 지금은 밤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무엇을 봤다는 것이다.
“그렇지! 저놈이 제격이다! 지금까지는 너무 세속에 물든 놈들만 상대해서 그런 것이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노인이 신형을 훌쩍 날렸는데, 거의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높게 솟아오른 나무의 끝을 가볍게 밟으며 몸을 옮기는 노인.
어느새 노인의 품에는 칠팔 세 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사나우면서도 서글프게 산중을 울렸다.
“거, 시끄럽네. 콱 죽여 버릴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죽일 마음은 없는 듯, 발걸음만 놀리는 노인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육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
“교주님! 도대체 어디에 계시다 오신 겁니까!”
노인이 시끄럽다는 듯 귀를 막았다.
“자그마치 육 년 입니다! 어찌 그동안 소식 하나 없을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다 지금 무림맹 놈들이 갑자기 미쳤는지 우리를 건드려 볼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설마 그게 누구 때문인지 모르시진 않겠죠?”
“적 부교주, 그러니까 내가 왔잖아. 아직 내 방 있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노인은 바로 소년을 데리고 갔던 그 노인이었다.
“좋습니다. 교주님이 돌아오셨다는 것을 알면 놈들도 태도를 바꾸겠지요. 그나저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체 어디 다녀오신 겁니까?”
“흐흐흐,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러 갔었지.”
“예?”
“역시나 그것은 뛰어난 마공이었어. 익힌 놈들이 멍청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고.”
“서, 설마 그 저주받은 마공을 실험하느라 지금까지 안 돌아오셨던 겁니까?”
“어허, 이사람. 저주받은 마공이라니!”
노인의 호통에 적 부교주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걸로 잡아먹은 애들이 몇인데 저주받은 게 아니고 뭡니까? 잘하면 살귀요, 못하면 색마에, 주화입마 걸리기 딱 좋고, 어느 날 미친개마냥 돌아다니다 객사한 놈이 몇인 데요!”
적 부교주의 추궁에 노인이 인상을 썼다.
“이번엔 성공했다니까! 양의분심공이 임자를 만났단 말일세!”
“확신하십니까?”
적 부교주의 미심쩍어 하는 눈빛을 피하듯 노인이 잠시 시선을 하늘로 들었다.
“살기가 좀 짙어진 것 빼고는 문제없었다니까. 색을 밝히기는커녕 아직 여자가 뭔지도 모른다네.”
“…몇 살 인데요?”
“이제 열두셋 됐을까?”
그 말에 적 부교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그렇지요! 교내에서 가장 오래 버틴 아이도 발작이 열넷에 왔습니다. 그 애가 얼마나 무골이었는지는 교주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천살단의 차기 단주로 키우려는 것을 교주님이 가로채셨으니 말입니다. 그런 아이도 버티지 못했는데, 정말 이번에 만난 아이가 열넷을 넘기리라 자신하십니까?”
“…아마도?”
“아마도는 무슨 아마돕니까! 앞으로는 절대! 절대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혹시라도 그 애가 성공…….”
“지금 그런 것 신경 쓸 때가 아니라니까요! 무림맹 놈들도 놈들이지만, 서장과 북해, 남해도 심상치 않단 말입니다. 그게 다 누구 때문입니까? 바로 교주님이 그 저주받은 마공을 가지고 장난을 치셔서 그런 것 아닙니까? 하시려면 들키지나 마시지, 왜 교주님이신걸 밝히셨냐고요!”
“그게 어떤 무공인데! 당연히 출처를 밝혀야지!”
당당한 노인의 말에 적 부교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좀 낮은 급의 애들도 있잖습니까. 어째서 직계 아니면 장로들의 자식들이었습니까?”
“그 정도는 돼야 몸이 좀 실하더라고.”
“그게 말이 됩니까?”
“당연히 되지! 그리고 이제 그만 해. 그래서 내가 왔잖아. 시끄러운 녀석들 좀 밟아주려고 말이야.”
노인의 태도에 적 부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교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아셨지요?”
“알았다니까!”
노인, 즉 교주와 적 부교주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곳.
이곳의 이름은 마교였다.
노인의 정체는 마교 역사상 가장 강한 교주라 불리는 혈우마제 왕일이었고, 부교주 또한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교주를 했을 정도로 강한 제천궁수 적우였다.
“그나저나 ‘신선’ 놈들도 나왔어?”
왕일의 물음에 적우가 입술을 씰룩였다.
“정파가 총 출동한 마당에 골방 늙은이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오랜만에 움직일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아주 팔팔하게 뛰어다닌답니다.”
“하긴… 이런 일이 아니라면 언제 골방에서 나오기나 하겠어? 그나저나 아주 작심을 하고 칼을 갈고 있었을 테니 상대하기가 좀 까다롭겠구먼.”
“정말 걱정하시는 겁니까?”
적우의 은근한 물음에 왕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걱정이야 되지. 얼마나 만져줘야 할 지 고민되잖아. 너무 만져주면 아예 죽이라고 달려들 테니까 말이야.”
말을 하며 걸어가는 왕일의 등을 바라보는 적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육십여 년을 봐온 등이지만, 여전히 듬직하구나.’
두 사람의 우정은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그 꼬마는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그 녀석? 늑대들이랑 살고 있더라고. 믿어져? 늑대들이 애를 키웠더라니까? 처음에 말을 가르치느라 좀 애를 먹었지.”
“이름은요?”
“내가 하나 멋들어지게 지어줬지. 백오라고 말이야.”
“백오요?”
“응. 흰 까마귀. 그 놈처럼 특이한 인생은 없잖아? 그래서 특이한 놈이란 뜻으로 지어준거야.”
“과연 그 아이가 양의분심공을 익힐 수 있을까요?”
“적 부교주도 기대가 되긴 하지?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찾아봐. 불사심공을 바탕으로 만든 양의분심공을 제대로 익혔다면 찾지 않아도 만나게 되겠지만.”
“그렇겠지요.”
말을 하면서도 적우는 백오란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무리 특이한 놈이라고 해도 절대 양의분심공을 익히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라도 한 잔 할까?”
“벌써 술타령이십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적우도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