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도를 제대로 휘두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석휘명의 몸놀림이 더욱 영민해지며 도의 방향을 바꿔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혈천강시가 공격해 들어오니 어쩔 수 없이 방어를 해야 했다.
‘이놈들도 변한 것 같아.’
주문이 들림과 동시에 석휘명과 혈천강시의 몸도 이전보다 더욱 단단해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조화속이야?’
몸과 정신의 일체를 이룬 왕일은 그것으로 현 상황을 타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단숨에 석휘명과 허장천을 제거하고 길고 길었던 원한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또 다시 자신을 가로막는 벽이 생긴 것이다.
‘그랬다 이거지?’
찔러오는 석휘명의 손을 칼등으로 쳐낸 왕일의 눈이 허장천을 향했다.
‘이번엔 네놈이란 말이지?’
순간 왕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
왕일은 지금까지처럼 다시 자신을 가로막는 벽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벽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과 그로 인해 쓰러지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분노를 동반한 채 다가왔지만, 한 번도 그를 무너뜨린 적은 없었다.
벽을 부수며 한 단계 더 높이 올라섰고, 그로 인해 현재의 자신이 되었다.
마치 그를 지금에 이르게 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막아선 것 같았다.
‘널 부수면 어디까지 올라갈까?’
허장천을 죽인다고 해도 또 다른 벽이 가로막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이제는 그 벽이 무얼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올라가주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벽이 있다는 것은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그 벽을 부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럼 다시 성장할 것이었다.
“한 번 해보자고!”
쾅!
발로 석휘명을 차버린 왕일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마치 도망치려는 모습 같았지만, 왕일이 한 행동은 땅을 박차고 허장천을 향해 신형을 날리는 것이었다.
쐐액!
도에서 시작된 바람이 전면을 휩쓸었다.
날카로운 가시와 같이 도의 환영이 무수하게 바람을 타고 흘렀다.
쇄비!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잎이 바람의 힘을 빌려, 아니 바람을 일으키며 허장천을 향해 쇄도했다.
콰콰콰콰콰쾅!
석휘명과 혈천강시가 그 앞을 막아섰다.
제 몸이 절단 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쇄비의 공세를 몸으로 막아낸 것이다.
‘멍청한 놈!’
왕일은 허장천이 자리를 옮기지 않고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그 주문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란 강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먼지가 가시고 허장천의 놀란 얼굴이 드러났다.
이미 주문은 멈춰 있었다.
“어째서?”
의문과 경악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뭐가?”
묻는 왕일은 천천히 내력을 끌어올리며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쇄비를 쏟아내며 허비한 내력을 보충하는 동안 허장천이 도망가지 않는다면 그로서도 바라는 일인 것이다.
“왜 주문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거지?”
“머리가 아프긴 했지.”
“그게 아니란 말이다!”
허장천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고.”
말을 하는 동안 석휘명과 혈천강시의 상태를 살폈는데, 그다지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옷은 누더기가 되었지만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판단하기 쉽지 않군.’
꼿꼿하게 서있는 석휘명과 혈천강시는 마치 벽이라도 된 것처럼 허장천의 앞에 서있었다.
“네놈은… 네놈은 불사심공을 익힌 것이 아니었느냐?”
“계속 헛소리 할 거야?”
“불사심공은 처음부터 죽은 이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무공이다!”
결국 허장천이 속에 있는 말을 내뱉었다.
“뭐?”
“불사심공의 기원이 뭔지 아느냐? 강시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백독문이 불사지존을 만들어 낸 곳이란 말이다! 결코 살아있는 놈은 불사심공을 익힐 수 없어!”
허장천의 외침을 들으며 왕일은 기가 막혔다.
‘미친놈!’
자신의 심장은 아직도 펄떡이며 뛰고 있었다.
결코 죽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더 들을 필요도 없군.’
생각대로 되지 않아 정신이 나간 것이라 치부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놈 취급하는 놈과 더 이상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쓸 데 없는 일이라 여겼다.
“네놈이 불사심공을 익혔다면 백독문에 전해 내려오는 불사지존마저 무력하게 만든 주문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니, 네놈이 익힌 것은 불사심공이 아닐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왕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불사지존을 무력하게 만들어?’
아무래도 불사지존이 죽은 것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비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배후에 백독문이 자리했고.
“그리고 불사심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결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소리를 지른 허장천이 석휘명과 혈천강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웃기지 마!”
이미 쇄비를 펼치며 소모한 내공은 모두 채운 상태였다.
그렇기에 왕일은 이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럴 자신도 있었다.
쾅!
“큭!”
도를 내지른 왕일이 신음과 함께 뒤로 튕겨나갔는데, 그곳에는 붉은 구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체 뭐야?”
왕일은 저릿한 손을 느끼며 구체를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일격을 간단히 튕길 정도로 구체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강했던 것이다.
그 힘을 다시 반탄기로 돌리지 않았다면 팔이 터져나갔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흐흐흐. 이제 너에게 진정한 불사심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마.”
붉은 구체가 서서히 흐려지며 허장천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그의 손에 잡힌 석휘명과 혈천강시는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뼈와 살가죽만 있는 상태였다.
“불사심공을 익혔다면 내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는데, 그렇지 않은 너에게 남은 것은 비참한 죽음뿐이다.”
왕일은 허장천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말도 듣고 있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죽은 거냐?’
허장천이 손을 털자 부서지는 석휘명의 모습이 왕일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로써 또 하나의 은원이 사라지는 구나.’
은원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많은 것을 베푼 석휘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석휘명이 한 줌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중이었다.
“백회를 연 내게 있어 이제 적은 없…….”
“닥쳐.”
허장천이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왕일이 그것을 끊었다.
“벽은 벽답게 닥치고 그곳에 서있으면 되는 거야. 알았냐? 부서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 되는 거라고.”
도를 고쳐 쥔 왕일이 땅을 박찼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부수기 위해서.
“부서지는 것! 그게 네 운명이다!”
벽은 더 이상 절망과 좌절의 상징이 아니었다.
자신을 성장시켜줄 밑거름과 동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달려가는 왕일의 얼굴에 두려움은 없었다.
***
쾅!
도와 손이 부딪쳤는데, 물러난 이는 도를 든 왕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왕일의 얼굴에는 한층 짙어진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약해!’
붉은 막과 부딪쳤을 때보다 훨씬 약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사실 지금도 왕일 스스로가 반탄기를 운용했기에 뒤로 물러난 것이지 허장천의 힘에 의해 튕겨져 나간 것은 아니었다.
‘꺼내기 전에 해치운다.’
왕일이 허장천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힐끔 바라 보았다.
분명 허장천은 검을 주무기로 사용했던 사람이니만큼 검을 든다면 지금보다 상대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자만을 하고 있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 지금이 기회였다.
“죽어!”
왕일이 도를 내리찍을 때 그것을 맞이한 것은 역시나 허장천의 손이었다.
이미 소매부분의 옷은 모조리 사라진 상태였지만, 드러난 손에는 어떤 상처도 없었다.
쾅!
폭음이 터졌지만 이번엔 다른 결과가 만들어졌다.
왕일이 발을 땅에 박고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은 더 단단해지고, 더 빨라지는 것뿐이야.’
왕일이 접근전을 택함으로써 왕일과 허장천의 전투는 더 이상 화려함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로 변했다.
바짝 달라붙어 한 순간의 방심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생사투가 된 것이다.
폭음과 강기가 만들어 낸 경기(勁氣)가 휘몰아쳤고 옷은 누더기가 되어갔다.
서로의 기운이 너무도 강해 몸은 보호할 수 있었지만, 옷까지 보호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내력에선 뒤지지 않는다! 또한 단단함도 내가 우위야!’
허장천은 육신을 무기로 사용하였지만 왕일은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부딪치는 상황에서 왕일이 유리한 것은 분명했다.
퍽!
“윽!”
지루하게 이어질 것 같은 공방이 허장천의 한 수로 인해서 변해버렸다.
지금껏 반탄을 통해 왕일의 도를 받아내던 허장천이 도를 잡아버렸던 것이다.
싸움의 양상이 내력대결로 바뀌었다.
“흐흐흐, 과연 네가 버틸 수 있을까?”
왕일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는 당장이라도 도를 놓고 뒤로 물러나고 싶었다.
“으음…….”
신음과 함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는 내력대결로 인해서 나타난 증상이 아니었다.
그의 등을 뚫고 들어온 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한 순간의 부주의가 이런 결과를 만들었구나.’
허장천의 허리에는 검이 없었다.
검집은 그대로 있었지만 어느새 그것이 뒤를 돌아 왕일을 찔렀던 것이다.
훌륭한 이기어검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왕일은 도가 허장천의 손에 붙들린 순간 도를 놓으려 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찔러오는 검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쳐버렸고,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내력을 받아내느라 어쩔 수 없이 내력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검은 호신강기마저 뚫고 등에 틀어박혔다.
‘왜?’
왕일은 지금 이 순간, 어째서 검이 튕겨 나가거나 폭발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찌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면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강기를 뚫을 수 있는 것은 강기뿐이었다.
또한 강기와 사람의 몸이 만나면 사람의 몸은 터져나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검은 왕일의 몸을 찌른 상태로 매달려 있었다.
허장천이 교묘한 수를 쓴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검을 뽑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흥분한 척, 당황한 척, 그리고 자만한 척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위선의 탈이었던 것이다.
“과연 네놈에게 무엇이 남을까?”
도신의 밑동과 도첨 부근을 움켜쥔 허장천이 점점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끼이이잉!
도가 울었다.
왕일의 내력과 허장천의 내력이 충돌하는 와중에도 도는 굳건하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허장천이 힘을 주는 순간 조금씩 구부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부러질 것만 같았다.
‘부러지는 거냐?’
왕일은 도를 아꼈다.
그 단단함이 좋았고, 투박했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날카로움을 갖춰가는 것이 마음에 들었었다.
마치 자신처럼 아무것도 없던 모습에서 점점 하나의 몫을 해나가는 도를 보면서 자신을 투영하기도 했었다.
어찌 보면 도는 그의 인생을 대변한다 할 수 있었다.
왕일도 도와 같이 처음에 가진 것이라고는 단단한 몸뚱이밖에 없었다.
거기에 오기와 고집이 더해져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무공을 익히고 내력을 얻은 것은 그것의 부산물일 뿐이었다.
끼이이잉!
도가 다시금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작별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듯이.
그리고 그것을 아쉬워 한다는 듯이.
‘무엇이 남느냐고?’
왕일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었다.
가족들이 떠나고, 장수련도 떠나고, 석휘명도 떠나고, 이제는 도마저 그의 곁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왕일은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도가 부러지는 것이지 자신이 부러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언제나처럼 눈을 앞으로 향한 채 한 걸음 뗄 것이었다.
그 걸음 앞에 낭떠러지가 있을지, 아니면 단단한 땅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걸어갈 것이었다.
오늘 한 걸음 내딛었음에도 내일 돌아보면 같은 자리일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두려워 제자리에 머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왕일이었다.
“응?”
허장천이 미간을 찌푸렸는데, 왕일의 배를 뚫고 나왔던 검신이 점점 모습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검이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남느냐고?”
입가에 미소를 띤 왕일이 내력을 끌어올렸다.
“너는 누구와 싸우고 있던 거냐?”
키이이이이잉!
왕일이 내력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도가 거친 외침을 터뜨렸고, 이내 붉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내가 들고 있던 도와 싸우고 있던 거냐, 아니면 내가 가진 내공과 싸우고 있던 거냐?”
“으음…….”
이번엔 허장천이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불어나는 내력에 대항하느라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