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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136화 (136/138)

136화

일면식도 없는 무인이.

이름도 모르는 무인이.

“어째서!”

쾅!

분노를 담아 휘둘렀다.

원망을 담아 휘둘렀다.

답답함을 담아 휘둘렀다.

그러나 그 공격은 석휘명이 내민 팔에 막혔다.

도는 석휘명의 손에 꽉 잡힌 채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소음들이 파도가 되어 왕일의 귀를 때렸다.

“교주님!”

“하하하하하! 오늘 마교는 사라진다!”

“서방!”

“화 장로! 피해!”

“우야! 안 돼!”

“아버지!”

슬픔과 분노, 절망과 환희가 어우러져 왕일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 때문이다!’

스스로의 자만이 가져온 결과였다.

얌전히 분타나 교에 틀어박혀 교의 힘을 이용했다면 이런 절망스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되지도 않을 얕은 잔꾀를 부리려 천방지축으로 쏘다닌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멍청한 놈!”

자책으로 얼룩진 왕일이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더니 비틀었다.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 석휘명의 손아귀에서 도를 빼들더니 한 바퀴 돌았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온통 붉었다.

진승한은 한쪽에서 피를 게워내고 있었으며, 막달평은 그런 진승한을 공격하려는 한 명의 괴인을 향해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화영영은 어느새 석휘명의 등 뒤까지 도착해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등을 향해 또 다른 괴인이 날카로운 손톱을 찌르는 중이었다.

적우와 적후연은 이미 한 차례 충돌이 있었는지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가슴은 붉은 핏줄기를 뿜어내는 상태였다.

악불군은 한 쪽 팔이 잘린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으며, 사마유운은 부러진 검으로 허장천을 향해 공세를 펼치는 중이었다.

또한 그런 모습들과 함께 왕일의 눈을 가득 채운 것은 널브러진 시체들과 땅을 흐르는 피, 그리고 부상당한 몸으로 적을 향해 몸을 날리는 교의 무인들이었다.

‘못난 놈! 대체 얼마나 더 받아야 만족한단 말인가!’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인생을 평가해주고 있었다.

과분한 사랑과 넘치는 애정, 그리고 충분할 정도의 충성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교주라는 직위가 가져다 준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교주의 자리에 올라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죽음의 순간에 분노한 것은 스스로가 가진 것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람들을 스스로가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또 잊어버렸단 말인가!’

이미 자신을 위하는 이들의 고마움을 알고 있던 왕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가슴에 새기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죽음의 순간에 처했을 때, 그의 뇌리를 장악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인생이었고 불행했던 과거뿐이었다.

“우어어어!”

짐승과 같은 괴성을 지르며 휘돈 왕일이 들고 있던 도를 힘껏 던졌는데, 그것은 석휘명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붉은 번개처럼 쏘아진 도는 막 화영영의 등을 찌르려던 괴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아악!”

쾅!

비명과 충돌음이 동시에 터졌다.

도가 얼굴을 향해 날아옴에도 불구하고 괴인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지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화영영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왕일은 화영영의 비명을 들었음에도 석휘명이 손을 뻗어왔기에 그녀에게 갈 수 없었다.

땅에 쓰러지는 화영영의 모습이 느리게 왕일의 눈으로 흘러들어왔다.

고통스러운 그녀의 얼굴이, 눈을 타고 흐르는 안타까움이, 입으로 새어나오는 절망이 왕일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석휘명이 찔러오는 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일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눈에 도를 박은 채 화영여의 등을 밟아가고 있는 괴인이었다.

왕일이 던진 도가 눈을 찌른 채 덜렁거리고 있었음에도 괴인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텅!

왕일을 공격하던 석휘명의 손이 마치 강한 타격이라도 입은 것처럼 튕겼다.

왕일이 있는 힘껏 휘둘렀던 도를 한 손으로 받아낸 석휘명이었건만, 이번엔 공격을 했음에도 손해를 입었는지 튕겨지는 손과 함께 몸도 뒤로 물러섰다.

퍽!

막 화영영의 등을 밟으려던 괴인의 턱을 왕일의 발이 후려쳤다.

우드득!

턱에 타격을 받은 괴인의 얼굴이 위로 쳐들리며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목이 한 뼘은 늘어났는데, 목뼈가 모조리 부러지며 자리를 이탈한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괴인의 입에서는 어떤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여파로 몸이 들렸기에 화영영을 공격하는 것은 실패했다.

퍽!

왕일의 주먹이 괴인의 복부를 후려치자 활처럼 접히며 몸 전체가 붕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왕일의 무릎이 괴인의 눈에 박혀있던 도의 손잡이를 때렸고, 도가 괴인의 뒤통수를 뚫어버렸다.

“이거였어.”

쓰러지는 괴인의 머리에서 도를 뽑아내며 왕일은 뇌리에 잠들어 있던 오랜 기억 한 가지를 꺼낼 수 있었다.

[세상을 둘러싼 것이 기운이고, 그것을 매일 호흡하며 들이마시는 인간일진데 어찌 한줌의 내공도 없겠느냐? 다만 그것을 활용할 방법을 모르고, 또한 그 양이 적어 없다고 여길 뿐이지. 일례로, 내가 직접 목도한 사건을 얘기해주마. 어느 마을에서 객점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곳에 어린아이를 업은 한 여인이 있었다. 나는 다른 이들을 구하는 와중이라 그 여인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지. 마침 그때 대들보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벌어졌다. 그 여인이 서 있던 그 자리로 말이다. 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죽었나요?]

[그랬으면 너에게 얘기를 하겠느냐? 그 당시 그 여인은 놀라운 힘으로 떨어지는 대들보를 쳐냈다. 무공이라고는 익혀본 적이 없는 여인인데도 말이다.]

[와아!]

[그 뒤에 내가 여인을 안고 객점을 벗어났고, 덕분에 잠깐 살필 수 있었다. 여인의 몸에서는 한줌의 내공도 발견할 수 없었지. 그녀 자신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더구나. 스스로도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납득을 못하더란 말이다. 자, 이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기, 즉 내공이라는 말이다. 살아오면서 쌓아두었던 내공이 위기의 순간에 그녀를 구하고는 다시 숨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 너에게도 어딘가에 숨어 있는 내공이 있을 것이란 말이다. 만일 그것을 찾아내고 그것이 숨어 있는 장소를 알게 된다면 내공을 쌓을 수 있지 않겠느냐?]

왕일은 착각했었다.

몸 전체에 퍼져있는 내공을 마호성이 말했던 그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분노와 절망에 차 휘두른 도는 석휘명의 손짓에 막혔었다.

그것은 분명 몸 전체에 퍼져있는 내공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막힌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내공을 이용한 것은 맞지만, 그 생각이 달랐다.

절망도 아니었고 분노도 아니었다.

그의 뇌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오로지 화영영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녀에 대한 애정이었다.

“결국 그 힘이 숨어있던 곳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던 거야.”

육체가 전부가 아니었다.

가슴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육체와 정신, 가슴이 한 데 모아질 때 그 힘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방…….”

“사랑해.”

뜬금없는 말이었다.

간결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화영영의 입을 다물게 하였고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또한 등에 깊게 나있는 상처의 고통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게 하였다.

***

이미 싸움은 멈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왕일이 화영영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 어찌 네놈이?”

놀란 허장천의 주위에는 멀쩡한 괴인 하나와 석휘명이 호법이라도 되는 듯 서있었다.

왕일이 석휘명을 튕겨버리고 괴인을 죽이자 서둘러 자신을 지키고자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놈이냐?”

왕일이 괴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냔 말이다!”

허장천은 왕일의 물음에 대답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놈이 내 부모님과 동생들을 죽인 놈이냐?”

왕일은 왕일대로 허장천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궁금한 것만 물었다.

“대답해라! 어찌 네놈 같은 반푼이가 내 혈천강시를 죽일 수 있단 말이냐! 네놈은 정녕 불사심공을 익힌 것이 맞느냐!”

반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허장천은 왕일을 온전한 불사심공을 익힌 이로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놈이 내 가족을 죽인 놈이냐?”

“맞다! 이제…….”

허장천이 뭐라고 말을 더 이으려는 그때, 이미 왕일은 허장천의 바로 앞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

“괜찮은가?”

사마유운의 물음에 지혈을 한 악불군이 휑한 왼쪽 어깨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뭐, 죽지 않았으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새 사마유운의 주위에 살아남은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어쨌거나 허가장으로 가지 않은 것은 잘한 선택이었군.”

사마유운 등은 허가장을 단숨에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와중에 왕일이 분타를 뛰쳐나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발길을 돌렸다.

화영영이 다급하게 전서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당가로 향한 결정적인 계기는 의문의 인물이 당가의 지부들을 박살내며 곧장 당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허장천이 왕일을 끌어들이고자 준비한 계획은 정작 너무 꼭꼭 숨어 다닌 왕일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결국 화영영과 사마유운을 끌어들이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저 정도면 수비가 아니라 공격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사마유운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공격을 하려다 오히려 튕겨나가는 석휘명과 혈천강시였고,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왕일의 몸짓 하나하나에 석휘명과 혈천강시가 튕겨나가 제대로 된 공격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어찌 본다면 왕일이 여유를 두고 그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놈들이 혈천강시일까요?”

“아마도…….”

이건 무림에 있어 악몽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속셈일까요?”

석휘명과 혈천강시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허장천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왕일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같이 싸우거나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회를 노리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 우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군.”

사마유운을 비롯해 누구도 혈천강시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허장천에게도 일패도지 하는 상황이었다.

괜히 왕일을 도운답시고 허장천에게 달려든다면 오히려 왕일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참에 좀 떨어지세.”

사마유운의 손짓에 살아남은 이들은 천천히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괜찮을까요?”

화영영이 걱정 가득한 눈길을 왕일에게 던지며 물었다.

“그건 하늘이 알겠지. 하지만 교주가 쓰러진다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네.”

사마유운의 말은 정확했다.

만일 왕일이 죽는 상황이 닥친다면 천하는 허장천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리라.

“그리고 그때는 후일을 기약해야겠지.”

지금 이 자리를 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왕일이 쓰러지면 도주하기 위해서.

“자, 그만 가세나.”

마지막까지 왕일을 바라보느라 걸음이 더딘 화영영이었는데, 그런 그녀의 소매를 사마유운이 잡고 끌었다.

***

‘이 빌어먹을 새끼!’

왕일은 보는 것처럼 여유가 없었다.

석휘명과 혈천강시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었지만 머릿속을 파고드는 허장천의 음성은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왕일의 정신과 내공을 흩트리는 허장천의 음성은 왕일로 하여금 석휘명과 혈천강시의 공격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죽여 버린다!’

쾅!

마음먹고 땅을 박차면 어느새 석휘명과 혈천강시가 정면에서 그를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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