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자신이 당정을 배신하고 다른 이와 정을 통한 것도 모자라 자식들까지 당정의 아이들로 속여 길렀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으니까.
“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이미 당가는 그 형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는 중이었다.
“형님, 일단 자리를 피하시지요.”
당종성의 말에 당종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그 자리를 벗어났다.
***
쾅!
격돌에서 손해를 본 것은 왕일이었다.
‘뭐가 이렇게 단단해?’
단단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통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훨씬 강한!
‘그냥 죽일 것을 그랬어!’
철심문의 후예라는 것을 너무 가볍게 본 대가였다.
훙!
석휘명의 주먹이 부지불식간에 찔러왔고, 황급히 목을 튼 왕일의 코로 매캐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완벽히 피하지 못했기에 머리카락이 석휘명의 주먹에 맺혀있는 경기에 휘말리며 타들어간 탓이었다.
‘경공도 뛰어날까?’
문득 왕일은 이 자리에서 석휘명과 싸우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리고 멀어지고 있는 당가의 인물들도 신경이 쓰였다.
‘좋아!’
결심을 굳힌 왕일이 도를 쥔 손에 힘을 주고는 달려드는 석휘명을 향해 휘둘렀다.
“웃!”
왕일은 이 한방으로 석휘명을 떨어뜨려 놓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어느 정도만 거리를 벌리면 그 틈을 타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던 것인데, 석휘명의 대처가 왕일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흘려?’
왕일의 도와 석휘명의 손이 만나는 그 순간, 석휘명의 손이 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한 마리 뱀과 같이 영활하게 움직인 석휘명의 손이 도를 타고 넘으며 힘이 향하는 방향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석휘명의 손에 들린 도가 빠르게 차지했다.
이대로 도가 완벽하게 휘둘러진다면 왕일의 팔꿈치 어림을 벨 것이 분명했다.
“흥!”
코웃음을 흘린 왕일이 도에 자신을 맡겼다.
도를 억지로 세우려 하지 않고 몸 전체를 도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쏘아 보낸 것이다.
쾅!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돈 왕일이 발로 석휘명의 얼굴을 후려쳤다.
‘빌어먹을!’
정신이 어떻게 되면서 고통을 느끼는 감각마저 상실한 것인지 석휘명은 아무런 충격도 없는 듯 했다.
이미 당가의 인물들은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제와 쫓아가봐야 잡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죽여 버린다!’
오로지 석휘명에게만 집중하기로 했다.
쾅! 쾅! 쾅! 쾅!
화려한 초식도 천변만화하는 기교도 없었다.
왕일과 석휘명 사이에는 힘과 힘, 그리고 정직한 휘두름만이 존재했다.
‘무기는 내 것이 월등해!’
석휘명의 몸뚱어리가 단단하고 내공이 우위에 있다고 해도 왕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튼튼한 도가 있었으니까.
그것이면 충분했다.
‘초식? 쓸 기회를 안 주면 되지!’
석휘명이 무공에 있어서 더 뛰어날 순 있겠지만, 그것을 발휘할 틈을 주지 않는다면 그만이었다.
‘이대로 둘 중의 하나는 죽는 거야.’
내가 화려한 공격을 하려 해도 그럴 여유가 있어야 했고, 상대가 그것을 받아주어야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란 생각으로 가만히 한 자리에 서서 도를 휘두르는 왕일은 오로지 힘과 힘의 대결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쾅!
처음엔 왕일의 생각대로 되는 듯 했다.
도와 도가 만나며 경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고, 한 순간만 실수해도 상대의 도에 몸을 내줘야만 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뀌었다.
도와 도가 만나는 순간 왕일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석휘명이 도를 살짝 비튼 것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때부터였다.
왕일의 신형이 마치 폭풍 속에 떠있는 가랑잎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격의 속도도 처음과 같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공격이 아니라 방어에 급급했다.
내리 찍고, 휘돌리고, 뒤트는 것은 석휘명이었으며 왕일은 그 공격에 황급히 도를 가져다 대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났던가?’
같은 조건에서 왕일과 석휘명은 응용이라던가 임기응변에서 확실히 차이가 났다.
거기다 싸우면 싸울수록 석휘명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런 움직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석휘명이 나이가 많다는 것도, 숱한 싸움을 벌였다는 것도, 한 사람의 무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 뛰어나다는 것도 확실했다.
그 모든 것들이 왕일을 압박하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것은 연륜으로, 숱한 싸움은 경험으로, 무인이라는 것은 강인함으로 변해 왕일을 짓눌렀다.
퍽!
결국 왕일은 틈을 보였고, 그것을 석휘명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발이 왕일의 옆구리를 후려친 것이다.
“큭!”
당장 옆구리가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찾아왔으며, 뒤이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옆으로 접혔다.
그때를 노리고 차올린 석휘명의 발은 고개를 틀어 간신히 피했지만, 턱이 얼얼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길!’
오히려 빗맞은 것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중심을 잡지 못할 정도로 균형 감각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석휘명을 떨어뜨릴 요량으로 도를 휘둘렀으나, 그 움직임은 허우적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예기도, 힘도, 정확성도 떨어진 도는 허공을 부유하며 휘청거렸다.
“컥!”
석휘명의 주먹이 정확히 명치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 순간 석휘명이 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대체 얼마나 더!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한단 말인가!’
왕일은 억울했고, 답답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 순간 또 다른 벽이 가로막았고, 뭔가를 이뤘다 느낀 순간 그것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끝은 없었다.
간신히 뛰어넘고 부쉈다 생각하고 앞을 바라보면 이미 새로운 벽은 벌써부터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지 너무 높고 멀리 있어 그것이 벽이란 사실을 알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지친다.’
이대로 쉬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이 수레바퀴 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절대자라는 것은 없어.’
이것이 왕일이 내린 결론이었다.
독불장군으로 저 잘난 맛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세상을 휘저어도 결국엔 자신보다 강한 인간을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세력에 휘말려 죽음을 맞던가.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죽음을 맞아야 해?’
분노가 솟구쳤다.
너무도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였고, 삶이 너무 허무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기쁨과 행복이란 말은 왕일의 인생에 있어서 어색하기만 한 말이었고, 슬픔과 고통, 아픔과 절망은 친숙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끝나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비참했다.
그래서 분노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자신의 목을 자르기 위해 내려오는 도를 보는 것밖에는.
빡!
왕일이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갑자기 날아온 뭔가가 석휘명의 얼굴을 후려쳤고 그 덕분에 도의 위치가 바뀌었다.
휘잉~
눈앞을 스쳐가는 도를 보면서 왕일은 살았다는 것보다 누가 자신을 구해줬는지가 더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겨우 불량품 따위가 내 소중한 실험체를 죽이면 안 되지.”
멀어지려는 의식 속에서 왕일은 자신을 구한 이가 누군지 볼 수 있었다.
“너…….”
석휘명을 공격하고 뒤이어 자신을 제압한 이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허장천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진즉에 깨달아야 했었다.
몸이 망가지고 정신마저 피폐해진 석휘명이 이렇듯 단시간에 고수가 되어 나타난 것에는 철심문의 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루문의 후계자인 허장천의 힘이 더해졌기에 석휘명이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죽인다!”
석휘명은 자신의 공격을 방해받은 것에 분노했는지 허장천을 향해 도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삐익!
허장천이 호각을 꺼내 불자 석휘명이 괴로운 듯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개가 주인을 물려하면 쓰나.”
쓰러진 석휘명의 머리를 발로 밟은 허장천이 왕일의 흐려지려는 눈을 응시했다.
“결국엔 네놈들 모두 내 손아귀에 들어왔구나.”
“이, 이…….”
뭐라 말을 하려던 왕일의 턱에 강한 일격이 가해졌고, 왕일은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힘이 전부인줄 아는 무식한 놈들 같으니라고, 쯧쯧.”
허장천이 바닥을 박박 기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석휘명과 축 늘어진 왕일을 보며 혀를 찼다.
그가 보기에 이들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진 것이 무언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기에 수월하게 잡았구나.”
허장천은 오로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생각이 없었다.
그랬다면 살수들을 키우고 허가장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을 것이었다.
“자, 그럼 가볼까?”
발광하다 지쳐버린 석휘명을 옆구리에 끼고 왕일에게 손을 뻗으려던 허장천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퍽!
검 한 자루.
허장천을 뒤로 물리게 만든 것은 검 한 자루였고, 그것은 손잡이까지 땅에 완전히 틀어박혀 있었다.
“멍청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우리의 소중한 교주라오.”
표표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사마유운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악불군과 적후연, 남찬우가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간 못 말리는 서방이라니까.”
왕일의 옆에는 어느새 화영영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적우와 진승한, 목불곽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자, 이제는 그대가 혼자인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시는지?”
사마유운의 말에 허장천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흥! 이따위 것들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나?”
이미 주위는 마교인들로 포위된 상태였다.
“자신을 너무 과신하는 것 아니오? 아까 힘만 아는 멍청이 어쩌고 한 것 같았는데.”
“과신이 아니라 자신감이고 확신이다!”
삐이익!
허장천이 호각을 불자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두 개의 인영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던 혈천강시들이었다.
“숨겨 두었던 밑천을 다 까발리신 모양이오. 그럼 이 자리에서 결판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만.”
사마유운이 땅에 박혔던 검을 뽑아 들었고, 그와 동시에 석휘명의 눈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 허장천이 천하를 얻기 위한 첫 발걸음으로 네놈들의 목숨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일촉즉발의 대치가 이뤄지는 가운데, 왕일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적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
“으음…….”
정신을 차린 왕일이 눈을 떠 가장 먼저 본 것은 붉은 눈으로 광소를 터뜨리며 사람을 찢고 있는 석휘명이었다.
그 시체에서 뿜어진 붉은 핏물이 허공을 붉게 수놓았고, 고통에 찬 시체의 얼굴이 왕일을 향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안타까운 손짓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마지막 폐부 깊숙한 곳에서 솟아 나온 공기의 힘을 빌려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교주… 죄, 죄송…….”
무엇이 죄송하다는 것일까?
어째서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죽음의 순간에, 몸이 찢어지는 아픔을 표현하는 것보다도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을 표출하기 보다도 용서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일까?
왕일은 혼란스러웠다.
노려보는 석휘명도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오는 화영영도, 그리고 그 뒤에서 붉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화영영의 뒤를 쫓는 놈도 왕일의 시선을 붙잡지 못했다.
왕일의 눈은 그 시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죽은 이는 자신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약할 것이 분명한 그였지만, 죽을 것이 분명한 선택이었지만, 그는 왕일의 앞을 막아섰다.
‘왜?’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자신은 죽음의 순간이 목전에 닥쳤을 때 후회하기 바빴다.
분노에 정신을 빼앗겼다.
남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뿐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저 무인은 그런 모든 것에 앞서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