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벌써 보름. 이놈은 대체 뭘 기다리는 걸까?’
분타와 마교, 두 곳 모두에서도 허장천의 움직임은 없었다.
‘나를 포기한 것인가?’
그렇다면 문제가 더 심각했다.
그놈은 그런 줄 몰라도 왕일은 안심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분들은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아무리 뒤져도 사마유운 등의 행적은 파악되지 않았다.
‘숨바꼭질 같군.’
서로가 숨어 누가 빨리 찾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숨바꼭질?’
순간 왕일의 머릿속에 재밌는 계획이 떠올랐다.
‘어차피 이제 슬슬 방향을 바꿀 때도 되었으니, 이쯤에서 나도 사라져 버릴까?’
지금은 곧장 광서를 향하고 있었다.
일직선이었다.
하지만 왕일이 노리는 최종목적지는 마교가 아니었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모닥불이 한 차례 일러이더니 갑자기 왕일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져버렸다.
마치 그 자리엔 모닥불만 있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일순 숲이 조용히 일렁였다.
쫓던 목표가 사라지자 당황한 것이었는데, 언제 그랬었냐는 듯 숲은 곧 침묵했다.
‘허장천 그놈이라면 날 발견했을 수도 있지.’
아무리 귀신 같은 신법으로 빠져나왔다고 해도 허장천의 무위를 생각하면 자신을 발견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면?’
허장천이 할 일은 두 가지였다.
‘날 찾아 헤매거나 지키기 위해 움직이겠지.’
왕일은 허장천이 허가장을 완전히 버렸다고 믿지 않았다.
허가장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에는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모습을 드러낼 거야.’
허가장은 철저한 감시 하에 놓여있었다.
사소한 변화라도 일어난다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허가장을 친다!’
허장천이 허가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허가장을 공격하면 허장천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일단 나중 일이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목표부터 박살내는 것이 먼저였다.
왕일의 발길이 부지런히 서쪽을 향해 움직였고, 그곳은 바로 당가가 자리한 사천이었다.
***
‘철저하게 밟아준다!’
왕일이 천선부에서 가장 껄끄럽게 생각하는 곳이 바로 사천당가였다.
독만큼 음험한 것은 없었으니까.
물론 왕일 자신에게는 아니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걱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내 힘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
다른 곳을 친다면 혹시나 그릇된 생각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사천당가를 단신으로 무너뜨린다면 결국엔 힘 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었다.
그것이 왕일이 노리는 것이었으며 당가를 치는 이유였다.
‘응? 내 행적이 들켰나?’
왕일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사천당가는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불야성처럼 환하게 밝혀진 상태였다.
그리고 경계를 서고 있는 이들의 움직임이 마치 당장이라도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대비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들켰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내가 남쪽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췄기에 미리 대비를 하는 것인가?’
자신이 모습을 감춘 지 오늘로 보름 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니 얼추 시간을 따져 습격을 대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확신하는 것 같은데?’
왕일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보여줄 수 없는 경계였다.
‘응?’
왕일의 눈이 당가에서 벗어나 서쪽으로 향했다.
‘누구지?’
무척 빠른 속도로 당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인물이 있었는데, 경공실력만 놓고 본다면 왕일과 비슷한 경지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당가의 정문을 부수는 봉두난발의 인물을 보며 왕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개방인가?’
몰골만 본다면 개방의 고수라 여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왕일을 황당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 당경이 여기 왔다! 당화미는 어디 있느냐!]
“뭐?”
숨어있던 곳에서 벌떡 일어설만큼 왕일은 크게 놀란 상태였다.
“당경?”
당경은 석휘명이 기억을 잃었을 당시에 썼던 이름이었다.
당화미의 남편이었던 당정이 기를 때 붙여준 것이었다.
“그럼 저놈이 석휘명?”
아무리 봐도 봉두난발의 괴인은 덩치가 일반인과 같았다.
도저히 그 작디작았던 석휘명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왕일이 놀라는 와중에도 당경이라 칭한 괴인은 당가를 무인지경으로 누비며 때려 부수는 중이었다.
‘진짜 휘명일까?’
이제는 당경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당화미를 향해 분노를 뿜어낼 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아버님을 배신하고 뒷구멍으로 애새끼를 싸지른 주제에 감히 아버님을 죽이다니! 요녀 당화미는 어서 모습을 보여라!]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가 왕일에게 확신을 주었다.
“진짜 휘명이구나!”
당화미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었다.
“대체 어찌된 일이지?”
석휘명의 외모와 함께 놀라움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무위였다.
마치 왕일 자신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일방적으로 당가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암기가 날고 독이 뿌려지고 검이 춤을 추었지만 어느 것 하나 석휘명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불사심공!”
왕일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마 불사심공을 익힌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석휘명의 지금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미쳤구나.”
그 옛날 철심문의 문주가 그랬던 것처럼 무리하게 백회를 열고 불사심공을 익히다 주화입마를 맞은 것과 같이 석휘명은 자신의 선조가 범했던 과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랬군. 나를 경계한 것이 아니었어.”
당가의 경계는 석휘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거 어쩌면 잘 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당가를 부수고 있는 석휘명을 보며 왕일은 이 기회를 살리기로 했다.
“하나보단 둘이 나은 법이지.”
당가를 향해 신형을 날리는 왕일은 석휘명이 현재 당경이라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
“경아! 나 왕일이다! 내가 도우러 왔다!”
무너진 당가의 담을 넘으며 왕일이 소리를 질렀다.
“왕일아!”
당경이 왕일을 보더니 반가운 목소리를 내며 한 달음에 달렸다.
“죽은 줄 알았잖아!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눈물을 글썽이며 와락 안는 당경을 뿌리치려던 왕일은 당경의 머릿속이 엉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만히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현재의 내 모습은 기억하면서 내가 죽은 줄 알았다고?’
왕일은 패진무관에서 생활하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석휘명은 단숨에 그를 왕일이라고 부르며 반겼던 것이다.
하지만 내뱉은 말이 문제였다.
‘대체 지금의 나를 언제의 나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마 어르신은? 마 어르신은 어떻게 됐어?”
‘마 어르신? 마호성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때?’
패진무관에서 의문의 복면인들에게 쫓기던 때와 혼동하는 모양이었다.
“저놈들이 죽였다! 당 어르신을 죽인 것처럼 저놈들이 죽였다!”
왕일이 달려오는 당가의 무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당화미가 죽였다! 당화미가 자신의 치부를 숨기고자 당 어르신과 함께 마 어르신도 죽인 거다!”
왕일의 말에 당경이 땅을 박차고는 달려오는 이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용서하지 마! 죽여라, 경아!”
당경의 등을 보며 왕일이 소리를 질렀다.
‘훗! 쉽군.’
자신의 의도대로 당경이 움직이자 왕일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디 얼마나 잘 싸우는지 볼까?’
석휘명이 친구란 생각은 없었다.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도 없었다.
왕일에게 있어 지금 석휘명은 자신의 일을 대신해주는, 자신에게 이러한 힘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을 내보여주는 도구일 뿐이었다.
‘이제부터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석휘명이 자신의 부하로 인식된다면 나머지 천선부는 허가장이 무너진다고 해도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들이 멸문할 수도 있었으니까.
‘절대고수 두 명이면 그놈들만으로는 무리지.’
정파의 모든 힘을 끌어 모으기 전에는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교다! 마교가 쳐들어왔다!]
외침이 당가를 휘돌았는데, 누군가 왕일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아까 외친 왕일이라는 이름으로 인해서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마교? 마교가 어디 있느냐! 마교가 어디 있느냐!]
잘 싸우던 석휘명이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살기를 일으키며 왕일을 향해 달려왔다.
아까처럼 반가워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싸우고자 하는 얼굴이었고, 몸짓이었다.
‘빌어먹을!’
마교라는 말이 석휘명의 정신을 흔들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당정이란 이름과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당가와 싸운 것처럼, 마교라는 이름과 왕일이라는 존재로 인해 적대하는 대상이 바뀐 것이다.
“경아! 당화미가 도망간다! 당정 어르신을 죽인 당화미가 도망간다!”
“나는 석휘명이다!”
왕일의 외침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순간 왕일이 기지를 발휘했다.
“허장천이 당화미와 같이 도망간다!”
석휘명의 고개가 왕일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엔 당가를 빠져나가는 일단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여인과 노인, 아이 등 싸움에 참여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처음에는 석휘명 혼자였기에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이제는 왕일까지 나타난 상황이었다.
왕일이 혼자 왔을 리는 없으니 마교가 쳐들어 온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대피시키는 중이었다.
챙!
석휘명의 고개가 돌아갔을 때, 왕일의 도가 그의 목을 후려쳤다.
그런데 왕일이 예상했던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막아?’
부지불식간의 기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석휘명은 왕일이 날린 도를 막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석휘명의 기도가 변했다.
“왕일!”
음성에서 쏟아지는 살기는 왕일의 전신을 쭈뼛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 도둑놈! 감히 우리 가문의 것을 도둑질 하다니!”
파지지지직!
석휘명이 말을 하는 동안 뇌전을 뿜었지만 그것은 석휘명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석휘명의 기운을 더욱 사납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진짜 불사심공을 익혔구나!”
머리가 어찌 되었든 석휘명은 뇌전까지도 구사할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라면 작심하고 뿜어낸 뇌전에 아무런 형향을 받지 않았을 리가 없었으니까.
“내가 석가장의 후계자다! 내가 바로 진정한 불사지존의 후인이란 말이다!”
말을 하면서 석휘명이 도를 휘둘렀는데 그 궤적을 따라 뇌전이 춤을 추었다.
***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가주인 당종휘의 물음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괴인이 당가의 지부를 무너뜨리며 당가를 향해 오고 있다는 서찰을 받은 것이 사흘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당종휘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당가의 가주였고, 이곳은 사천의 패자 당가였으니까.
그러나 막상 닥친 괴인의 힘은 놀라웠다.
당가의 어떤 독도, 어떤 암기도 괴인을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옷을 녹이고 피륙에 상처를 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상처도 곧 아물었다.
결국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따라서 왕일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는 마교가 당가를 치는 것이라 판단했다.
“아무래도 저 괴인은 마교의 소속이 아닌 모양입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싸우는 두 사람의 무위는 보는 사람을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한 번의 부딪침으로 인해 건물이 날아갔고, 한 번의 격돌로 인해서 단단한 연무장이 거의 오 장이나 푹 파였다.
“누군지 알겠느냐?”
당종휘의 고개가 옆에 서있던 당화미를 향했다.
“그, 그게…….”
당화미는 석휘명이 외치는 소리와 왕일이 내지른 소리를 들었기에 두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때의 치부를 알고 있는 것은 그들 두 사람과 동생인 당종성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