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가까운 기억이라서일까?’
사마유운에게 느꼈던 경외감과 그와 화영영의 관계를 의심해 품었던 살의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점차 지금의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감정은 또렷해지고 마치 그 자리에 진짜 있어 그 감정을 다시 느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허장천과의 만남.
‘왜 난 쇄비와 무상을 펼치지 않았을까?’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확실하게 죽었을 것이니까.
이어진 천선부에서 나온 네 명의 무인들과의 비무가 보였다.
‘이 때도 쇄비와 무상을 펼치지 않았지.’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는 쇄비와 무상을 펼칠만큼의 내력이 없었다.
하지만 온 몸에 숨어있는 내력을 깨달았을 때에도 쇄비와 무상을 펼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또 다시 죽을 위기를 겪게 만들었다.
‘남궁민을 상대했을 때도 그랬지. 내 실력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당연히 쇄비와 무상을 시전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내가 깜짝 놀랄 일도 없었을 테니까.’
결국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남궁민을 상대할 때는 내력이 부족하다 해서 죽을 염려도 없었고, 쇄빙와 무상을 펼쳤다고 내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자만! 그랬나? 난 자만심에 들뜬 멍청이였던가?’
지금 생각하니 확실했다.
‘이제 난 죽는 걸까?’
다시 눈앞은 환한 백색의 공간이 되었다.
더 이상 보여줄 것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많은 일을 겪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뭉뚱그리니 겨우 몇 가지였고, 만난 사람들도 적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뭐냐!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나에게 바라는 게 대체 뭐야!’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에서 왕일은 들어주는 이 없는 곳에 소리를 질렀다.
그래선지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내가 미치기를 바라는 걸까?’
한 적도 없는 소리들을 마치 자신의 내면이 바라던 것인냥 들려줬던 것이 떠올랐다.
‘어쩌라고? 분노하라고? 아니면 그걸 인정하라고? 내가 비열하고 제 욕심만 차리는 놈이며, 음흉한 놈이란 걸 인정하란 거냐? 그래! 인정한다! 네가 이런 걸 보여주지 않더라도 난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다!’
왕일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 스스로 이미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또한 그 대부분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 중에는 무고한 이도 있었으며 죽이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음에도 죽인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적은 수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악인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 나 악인이다! 솔직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컸었지만,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부모님을 죽이고 동생들을 죽이고 마을사람들을 몰살시킨 그놈들과 별반 차이 없는 놈이란 말이다!’
결국 속마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들과는 다르다고, 난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결국엔 똑 같은 놈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뺏은 것은 같았으니까.
그토록 증오하며 절치부심 노력해 결국은 그들과 같은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뭘 더 바라는 거야! 인정 했잖아! 뭘 얼마나 더 까발려야 해!’
백색의 공간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왕일을 가둬두고 있을 뿐이었다.
또 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그 속에서 왕일은 이곳에서 보게 된 자신의 인생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추했다.
하지만 변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갈고 닦아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굳혔다.
‘이제 와서 설마 내가 마음을 고쳐먹고 산골에라도 들어가리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죄책감에 영웅 흉내라도 내는 것을 바란 거냐? 웃기지 마! 난 짐승이다! 예전엔 어떤 모습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의 난 짐승이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마리 짐승이란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공을 익힌다고 하는데, 개소리 말라고 그래. 무공을 익히는 그 순간부터 모든 무림인이 짐승이다! 또한 가진바 권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조롱하며 멸시하는 놈들도 짐승이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말이 틀린 것 같았다.
‘훗! 이제 보니 아니었군. 내가 짐승인 것은 맞는데,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었어. 짐승들의 세상에 인간들이 살고 있는 것이었다. 남의 재물을 탐하는 자, 남의 여인을 탐하는 자, 남의 생명을 탐하는 자! 아니, 욕심이 있는 모든 자들이 짐승이다! 그런 짐승들 속에 인간이 섞여 있는 것이란 말이다!’
짐승들의 세상에서 통하는 것은 오로지 힘이었다.
권력이든 지식이든 무공이든, 어떤 것이라도 상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왕일은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을 짐승들의 세계라 여긴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힘에 목을 매고 갈구하는 것이라 여겼다.
자신도 한 마리 짐승이기에.
‘왜 욕심이 없고 자기 목숨을 버려 상대를 구하는 것이 칭송을 받는지 아느냐! 그건 그런 인간이 적기 때문이다! 모두 짐승이기 때문이다! 내게 인간이 되길 바라지 마라! 난 짐승으로 살아갈 것이다!’
왕일의 지난 행로가 보여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들의 세상이 아닌 짐승들의 세상이 바로 현재의 모습이라는 것.
“난 짐승이다!”
외침과 함께 눈을 뜬 왕일은 놀란 얼굴의 사람들을 보았다.
아니, 또 다른 짐승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더 이상 죄책감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후회는 있을지언정 죄책감을 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세상은 짐승들의 세계이므로.
***
“한 시진?”
“예.”
겨우 한 시진이란 말에 왕일은 황당함을 느꼈다.
‘아무리 못 해도 며칠은 지났을 거라 생각했거늘…….’
“별다른 변화는 없었고?”
“예. 그저 쓰러지신 후에 누워만 계셨습니다.”
어떤 깨달음이나 그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운아는?”
“악화되고 있습니다.”
“가보겠다.”
왕일이 일어날 때까지 적우를 제외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화영영도 왕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결코 의미가 없진 않았어.’
아기를 향해 가면서 왕일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든 경험이 단지 자신이 짐승임을 인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지 않았다.
환골탈태도 그 어떤 징후도 없었지만 왕일은 자신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확인을 할 필요는 없었다.
몸이 느끼고, 마음이 느끼고, 정신이 느끼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왕일이 들어오자 아기의 몸을 닦고 있던 사마은숙이 황급히 일어섰다.
분명히 놀란 얼굴이었는데, 그렇게 뒤로 넘어간 왕일이 너무 일찍 모습을 드러냈기에 그런 것일 터였다.
“모두 나가있어.”
왕일은 모두가 있는 곳에서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과 아기를 번갈아 쳐다보는 이들의 눈길에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서방…….”
“화매도.”
화영영이 처음으로 말을 걸었지만 왕일은 그녀도 허락지 않았다.
“알았어.”
왕일이 대장이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는 일은 이곳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은연중 왕일의 태도가 사람들이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디 볼까?’
뜨거웠다.
‘열이 심하군.’
아기의 양 손을 잡은 왕일이 천천히 내공을 일으켰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떤 식으로라도 아기의 몸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변화가 일어난다면 다른 방도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겠지.’
실보다도 가는, 머리카락을 수백, 수천 조각으로 갈라놓은 것 같은 내공이 천천히 아기의 혈맥으로 파고들었는데, 이만한 굵기의 내공이라면 사마유운이라고 해도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었다.
‘됐어!’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는 없었지만, 내공은 더욱 질기고 짙어졌다.
또한 단전들이 서로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내공이 유기적으로 움직였으며, 몸 구석구석에 퍼진 세맥들 속에 숨어 있던 내력들도 왕일이 내공을 움직이자 꿈틀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짜릿하군.’
첫 느낌은 몸 전체가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 짜릿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쾌감을 주는 짜릿함이 아니라 기분 좋은 흥분을 가져다주는 느낌이었다.
그 흥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다.
‘휴우~ 실수할 뻔 했구나.’
내공이 끊길 뻔 했다.
회수하는 게 아니라 그냥 끊겼다면 여린 아기의 몸에 내공이 그대로 남았을 것이고 그것이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는 힘들어.’
혈맥이 굳어가는 정확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의원들도 손을 놓은 입장이니 병명을 몰랐고, 병명을 모르니 치유법도 알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약하고 힘이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 짐승들의 세계라지만, 지금 여기서 맥없이 아기를 죽게 하기는 싫었다.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위선의 껍질은 뒤집어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억지로 짐승의 모습을 보이려 하지도 않을 터였다.
마음이 일면 하는 것이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것이었다.
‘네가 죽건 살건 너를 통해서 내 모든 위선의 껍질을 벗어버리겠다.’
어찌 보면 독선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는 이러한 마음가짐은, 짐승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인간적인 것이었지만 왕일 스스로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이내 왕일이 뭔가 결심을 굳힌 듯 아기의 백회혈로 장심을 이동시켰다.
‘그나마 가장 많이 열려있는 곳이 백회야. 아마도 아기라서 그렇겠지?’
백회는 태어났을 때 가장 많이 열려있지만, 또한 가장 빨리 닫히는 혈이기도 했다.
‘불사심공! 이것에 걸어본다.’
왕일은 아기를 다른 개체로 보지 않았다.
아기를 따로 떨어져 있는 자신의 혈도라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불사심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
문을 열고 나오는 왕일의 얼굴엔 땀과 함께 만족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들어가 봐.”
왕일의 말에 가장 먼저 방으로 뛰어 들어간 것은 사마은숙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화영영이 따랐고, 나머지는 모두 왕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분타주.”
“말씀하십시오, 주군.”
적우가 주군이란 말을 했음에도 심초운이나 진승한, 막달평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천선부놈들 말이야.”
“예.”
“여전히 우리를 노리고 있겠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력을 추스르는 것인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온다는 사람들은?”
“내달 초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이번에 들어온 것들은 모조리 쫓아내 버려.”
“예?”
“왜?”
“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적우는 솔직히 왕일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모두가 첩자로 의심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렇게 쫓아내면 기껏 사람들을 이주시킨 것도 단순히 심부름꾼을 불러 모은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회를 봐서 말씀을 드려야겠구나.’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왕일의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벽력탄을 던진 놈에 대한 단서는?”
“없습니다.”
“하나만 물어보자.”
“예.”“우리가 먼저 천선부 놈들을 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하냐?”
뜬금없는 왕일의 물음에 적우가 살짝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굳이 먼저 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곳 지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허가장은 없애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천선부에서 좌시하지 않을 테니 그것이 문제지요.”
“나서고 싶어도 나서지 못하게 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굳이 천선부와 싸울 필요는 없겠지요.”
“좋아! 그놈들에게 납득을 시키면 된다는 말이지. 나와 싸우는 것보다 허가장을 포기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말이야.”
“예? 아, 그렇게만 된다면 놈들도 잠잠할 것입니다. 일단 봉문에 들어간 문파들이 봉문을 풀기 전까지는 단독으로 덤비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봉문이란 것은 한두 달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길게는 몇 십 년이고 짧아도 몇 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산서지부가 확고히 자리를 잡는데 충분했다.
마교라는 든든한 본가가 있으니까.
“방법이 있으십니까?”
“응.”
간단하게 대답하는 왕일을 보면서 적우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뒤치다꺼리를 하게 될 거 같은데…….’
그리고 그것이 한두 번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 가봐. 나중에 내가 부를 테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왕일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왜 그래?”
생각에 잠겨있는 적우의 어깨를 막달평이 툭 치며 물었다.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적우는 알 수 없는 불안함과 함께 오한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