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왕일은 쓰러지고 싶었다.
몸뚱이며 팔다리에 틀어박힌 비도는 타는 듯한 아픔을 주었는데, 아마도 독을 바른 모양이었다.
‘당가 놈이 있으니 당연한 것인가?’
등짝은 아예 감각도 없었다.
뭔가가 와서 부딪치는 느낌이 전부였다.
그리고 종남파 무인의 검과 부딪칠 때는 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제갈가 무인은 비도가 떨어졌는지 검을 앞세우고 달려들었는데, 그가 합류하면 더 이상 버티기는 무리일 것 같았다.
아니, 당장 종남파 무인이 휘두르는 검을 막을 힘도 없었다.
강맹한 기운을 품고 검이 짓쳐들어왔다.
‘이대로 끝인가?’
닿지 않았음에도 코끝이 찡할 정도로 종남파 무인의 검에 실린 위력은 강했다.
쾅!
바로 눈앞에서 화려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충격에 고개가 뒤로 홱 젖혀졌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 자리를 제갈가 무인의 검이 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적우!’
종남파 무인의 검을 막은 것은 적우가 날린 무형시였고 제갈가의 무인이 후속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적후연이 날린 무형시가 그의 옆구리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왕일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인 두 명이 싸움에 합류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큭!”
도를 땅에 찍어 신형을 바로 세운 왕일이 신음을 흘렸다.
그 충격에 몸을 찌르고 있던 비도들이 흔들려서였다.
찔렸을 때보다 더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을 참고 왕일은 도를 휘둘러야 했다.
교묘하게 무형시를 흘려버린 남궁가의 무인이 정면에서 연꽃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막을 수 있을까?’
살려면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리고 도를 굳건히 쥐고 있어야 했다.
‘끊임없이 샘솟는 내력? 웃기는 소리였군.’
흔히들 탈태환골의 고수들은 내력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지금 왕일의 입장에서는 헛소리였다.
이미 단전은 텅텅 비어있었다.
쥐어 짜내도 나올 구석이 없었다.
‘단전!’
그때 왕일의 머리를 단전이란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 단전은 어디지?’
왕일은 자신의 단전을 떠올렸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
모두 세 개의 단전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저 좀 더 큰 단전일 뿐이었다.
스스로 몸 전체를 단전이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 멍청한 녀석! 그걸 잊고 있었다니!’
도를 휘두르며 의념을 몸 전체로 집중했다.
‘내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라!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라!’
왕일의 의지가 단순히 세 개의 단전에 머무르지 않고 몸 전체로 뻗어나갔다.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답해라!”
마지막 생각은 입 밖으로 나왔다.
쾅!
연꽃은 허무하게 조각조각 갈라져 버렸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왕일이 도를 높이 쳐들고 외쳤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그것을 알고 있는 이는 왕일 자신뿐이었다.
불안한 마음에도 한 가지 가능성을 목표로 노력해온 결과였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믿고 갈고 닦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파지지지지직!
순간 왕일의 몸에서 강한 뇌전이 뿜어지며 가까이 다가온 사대문파의 무인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큭!”
이전과는 다른 힘을 내포한 뇌전이었다.
쥐어 짠 내공이었음에도 그것은 세 개의 단전에 머물고 있는 힘을 합친 것보다 더 강했다.
그것을 단순히 처음 썼던 뇌전이라 생각해 버티려던 사대문파의 무인들이 일시에 신음을 토했다.
그리고 뇌전의 영향으로 그들의 몸이 한 순간 멈춰버렸다.
퍽!
가장 먼저 죽은 것은 당가의 무인 두 명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머리를 무형시에 관통당해 목 윗부분이 형체도 없이 부서졌다.
뇌수와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쾅!
두 번째로 횡액을 맞은 것은 종남파의 무인이었다.
왕일이 휘두른 도를 막으려 검을 움직였지만, 부딪치자마자 검은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의 목을 왕일의 도가 횡으로 갈랐다.
서걱.
너무도 조용한 마찰음과 함께 종남파의 무인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남은 제갈가의 무인과 남궁가의 무인이 눈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왕일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동귀어진의 수를 쓰더라도 왕일을 죽일 셈인 것이다.
“늦었다!”
그렇다.
왕일의 말대로 너무 늦었다.
차라리 아까 적후연의 무형시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제갈가의 무인은 그때 검을 휘둘렀어야 했다.
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왕일을 죽였어야 했다.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생각에 목숨을 아낀 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 돌아왔다.
채채채채채채챙!
제갈가 무인의 검과 남궁가 무인의 검이 춤을 추었다.
왕일이 반탄기를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남파 무인과 싸우며 왕일이 느꼈던 감정을 그들 두 사람이 느끼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사신이 강림하고 있었다.
피윳!
무형시 한 발이 제갈가 무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 왕일의 도가 그의 배를 노리고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왜?’
제갈가 무인의 배를 도가 파고드는 그 순간, 왕일은 의문을 느꼈다.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한다면 피하거나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가 무인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 배를 들이민다고 느낄 정도였다.
‘함정!’
순간 왕일이 도를 빼려고 했지만 제갈가 무인의 손이 더 빨랐다.
어느새 검을 놓아버린 그가 두 손으로 왕일의 팔을 붙잡았던 것이다. 일부러 즉사 하지 않을 곳에 왕일의 도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놈도?’
기회를 노리듯 달려드는 남궁가의 무인을 향해 뇌전을 뭉쳐 뿜던 왕일은, 그가 검을 던져 뇌전을 막는 것을 보고 제 삼의 인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궁가의 무인도 왕일을 끝내려 덤빈 것이 아니라 행동을 제약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의 의도대로 나머지 한 팔도 붙잡히고 말았다.
“흥!”
코웃음을 친 왕일이 온 몸에 강한 뇌전을 둘렀다.
“으윽!”
도에 배를 뚫린 제갈가의 문인은 물론이거니와 팔을 잡고 있던 남궁가의 무인도 이내 부르르 떨며 괴로워했다.
그렇지만 결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는데, 오히려 손아귀의 힘이 더욱 강해져 왕일로서는 그야말로 옴짝달싹 못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렇다고 위기는 아니었다.
막상 마무리를 지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까.
‘젠장!’
왕일은 달려오는 복면인보다 뒤로 나가떨어지는 사마유운을 욕했다.
‘온갖 허세는 다 떨어대더니 겨우 한 놈을 못 막아?’
아직까지도 구양신마 고학규와 놀고 있는 악불군도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백날 싸우는 걸 좋아하면 뭘 해? 싸움 실력이 늘어야지!’
마지막으로는 겨우 두 명에게 꼼짝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내가 이룬 것이 이런 것인가?’
분노는 오기로 바뀌었다.
“절대 아니야!”
뇌전이 더욱 거세졌다.
이제는 왕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뇌전으로 인해 주변 일대가 환히 밝혀질 정도였다.
옷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제갈가와 남궁가의 무인들의 살에서 김마저 올라왔다.
‘됐어!’
자신을 붙들고 있는 팔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왕일이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때,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복면인이 검을 찌르고 있었고 목표는 심장이었다.
‘나라고 못할 것 같으냐!’
솔직히 검에 몸을 들이민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 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당연한 행동이리라.
그런 마음을 먹고 나자 제갈가의 무인이 자신의 도에 몸을 던진 행동이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푹!
“컥!”
피와 함께 신음을 토한 왕일은 순간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가의 무인은 자신의 도를 맞으면서도 신음도 흘리지 않았고 얼굴 표정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못난 놈!’
그리고 스스로 죽을둥살둥 발버둥 치며 열심히 노력하고 수련했다지만 세상엔 그보다 더한 힘을 쏟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며 살았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내가 당한 고통과 내가 겪은 불행이 가장 크다고 여기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과 불행을 당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것을 깨달아서였다.
신음을 흘리고 스스로를 자책한 그 모든 것이 검이 몸을 파고들며 벌어진 일이었다.
“흡!”
숨을 깊게 들이 쉰 왕일이 손에 힘을 주자 도에 찔렸던 제갈가의 무인이 결국 팔을 놓쳤다.
도가 몸속에 파고들었기에 뇌전에 영향을 더 받은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팔이 풀려나자 왕일은 미련 없이 도를 놓아버렸고, 그 손으로 자신을 찌른 복면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죽어보자!”
복면인의 멱살을 잡은 왕일이 그대로 끌어당겼는데, 그로 인해 검이 손잡이까지 깊숙하게 박혔다.
두 번째로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 살을 검이 베며 지나가는 것은 그리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퍽!
왕일의 이마가 복면인의 얼굴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그리고 왕일의 발은 어느새 복면인의 낭심을 때리는 중이었다.
“컥!”
얼굴을 받혔을 때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던 복면인이었지만, 낭심을 걷어차인 통증은 참기 힘들었는지 외마디 신음과 함께 허리가 숙여졌다.
“너 이 개새끼야!”
그때를 놓치지 않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복면인의 검에서 빠져나온 왕일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남궁가 무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치는 것이었다.
쾅!
바위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남궁가 무인의 얼굴이 함몰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왕일은 땅을 박찼다.
허공으로 뛰어 오른 사마유운의 검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콰콰콰콰콰콰쾅!
사마유운의 검에서 시작된 빛으로 만들어진 폭포는 복면인이 있던 자리를 완전히 초토화 시켜 버렸다.
남궁가의 무인과 제갈가 무인의 시체는 형체조차 남지 않았고 조각조각 갈라져 비산하는 흙더미와 섞여 흩어졌다.
“그만!”
공격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복면인을 향해 적우와 적후연이 무형시를 날리려고 하자 사마유운이 그들을 제지했다.
“으음…….”
복면은 이미 갈가리 찢어졌고, 입고 있는 옷 또한 넝마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몸은 여기저기 쩍쩍 갈라졌으며 그곳에서 연신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복면인은 그런 모습으로 서있었다.
결코 무릎을 꿇거나 하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오?”
사마유운의 말에 복면인, 아니 이제는 복면이 사라진 그가 얼굴을 가린 가면을 쓰다듬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네.”
“그럼 어째서 그런 몰골로 다니시는 게요?”
-황제는 호전적인 인물이네. 거기다 독선적이지.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네. 선황제께서 날 붙여 놓으신 것도 무림에 대한 의식을 바꿔주라는 의미였네. 하지만 반만 성공했지.
-흥! 당신이 무림을 지켜주고 있었단 말로 들리는군.
-무림이 아니네. 이 민초들를 지키고 싶은 것뿐이네.
민초를 지킨다는 표현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무림과 황실이 대립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힘없는 백성이었다.
아무리 은밀하게 작업을 하더라도 단순히 세를 줄이려는 것과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에 결국에는 파탄이 일어날 터였다.
“가시오!”
사마유운이 차갑게 말을 던졌다.
그는 가면인이 충분히 자신을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공격을 하면서도 가면인에 집중시키지 않고 넓게 퍼뜨려 공격을 한 것이었다.
그 결과 가면인이 살 수 있었다.
-이제 한동안은 황실에서 개입하지는 않을 걸세.
가면인은 짧은 전음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
“어떤가?”
“이해할 수 없는 회복력입니다.”
왕일을 진찰한 의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나?”
“물론입니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검을 교묘하게 맞으신 덕분으로 내장에는 상처를 입지 않으셨습니다.”
사마유운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면인과 같은 고수가 단순히 방향이 어긋났다고 해서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목적이 왕 대주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희생을 치른 것은 말이 안 돼.’
단순히 찌른 검에 내력을 한 번 더 뿜어내면 될 일이었다.
그랬다면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무인의 생명은 끝났을 가능성이 있었다.
“으음…….”
사마유운의 상념을 깨뜨린 것은 왕일이 흘린 신음소리였다.
“오, 왕 대주. 괜찮은가?”
“한 번 찔려보실래요?”
왕일의 말에 사마유운이 피식 웃었다.
“괜찮은 모양이군.”
“그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습니까? 아니면 사로잡았습니까? 사로잡았다면 어디 있습니까?”
왕일의 관심은 온통 가면인에게 쏠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