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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116화 (116/138)

116화

“닥쳐!”

소리친 고진규가 검에 내공을 불어넣자 마치 지옥의 염화인 것처럼 붉은 아지랑이가 활활 타올랐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주위의 온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그리고 고진규를 중심으로 살얼음이 만들어졌고, 쏟아지는 빗방울이 그것을 두드려 깨뜨리는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괜찮겠어? 고추가 바짝 오그라들었네. 지금도 작은데, 그러다 아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거 아냐?”

왕일이 고진규의 사타구니를 응시하며 말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온 전장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 개새끼…….”

고진규가 발작을 하려 할 때, 전장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비명소리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는데, 그 대부분의 주인이 마교인들이었던 것이다.

“흥!”

콧방귀로 마음을 안정시킨 고진규는 이제 왕일이 동요하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같은 마교인들의 죽음을 좌시하지는 않겠지.’

사대문파에 요청해 받아낸 것은 각 문파가 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있던 모용중걸과 같은 숨겨진 힘이었다.

그들 네 명이 지금 전장에 피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초반에 나서지 않은 것은 마교와 패진무관의 고수들이 서로 어울리며 짝을 찾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고수들의 싸움은 한 번 상대가 정해지면 쉽사리 끝나지 않았기에 그들이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이들이 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마교의 고수 한 사람에 패진무관의 무인들 서넛이 달라붙었지만 어쨌거나 상대를 정하고 격전을 치루는 와중이었고, 그때, 그들이 뛰쳐나와 싸움에 가담했다.

“많이도 끌어 모았네. 그리고 머리 굴리느라 힘들었겠어.”

고진규와 고학규가 키운 힘도 있었지만, 지금 마교인들과 싸우는 것은 은거했던 노고수들이나 낭인들이었다.

대부분 사파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는데 마교에 밉보이거나 정파에 추적을 당하던 고수들이 고진규, 고학규 형제의 밑에 있었던 것이다.

‘말은 편하게 해도 네놈의 속까지 같지는 않겠지.’

고진규는 왕일이 틈을 보이길 기다렸다.

그때 지금껏 끌어모았던 내공을 한 방에 터뜨릴 작정이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저들이 아무리 죽어나가도 내게서 틈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을 거야. 내가 좀 이기적인 놈이거든. 나와 안면이 있는 몇은 절대로 이 자리에서 죽을 사람들이 아니니 신경을 쓸 이유가 없잖아. 그러니 그렇게 기다려봤자 네 내공만 소모시키는 결과일 뿐이야.”

왕일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도저히 전장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먼저 달려들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잊어버린 사람이 있지 않아?”

왕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장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뒤쪽에 쳐져있던 사마유운이 싸움에 가세한 것이다.

“알았으면 이제 들어와 봐.”

왕일이 도를 고쳐 쥐며 고진규를 노려보았다.

‘젠장!’

고진규는 끝까지 싸움에 뛰어들지 않은 사마유운의 상세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힐끔 바라 본 사마유운은 어딜 다쳤냐는 듯이 강맹한 위력의 강기를 수없이 날리고 있었다.

“오냐! 네놈부터 죽여주마!”

고진규가 땅을 박찼고, 붉은 아지랑이를 따라 주변의 빗방울들이 얼어붙어 우박으로 변하고 있었다.

***

“하앗!”

고진규가 달려오자 왕일이 기합소리와 함께 온 몸에서 하얀 뇌전을 뿜어냈다.

그러자 번개가 구름을 따라 유영하는 것처럼 땅을 적신 물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따다다다다다당!

뇌전과 우박이 만나며 우박이 터져나갔고, 마치 은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이며 일대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콰쾅!

두 사람의 기운이 맞부딪치며 흙탕물이 파도처럼 사방으로 밀려나갔다.

“아악!”

비명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흙탕물에 실린 음기와 뇌기를 맞은 가까이 있던 무인 하나가 쓰러졌는데, 그의 옷은 얼어서 바스러지거나 시커멓게 타서 재가 되었다.

“으음…….”

단순히 여파에 맞은 무인이 그러할 정도였으니, 당사자인 왕일과 고진규가 느끼는 고통은 그보다 더했다.

아무리 몸을 흐르는 호신강기가 막아주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담겨있는 기운이 그것을 뚫고 내부를 진탕시켰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이 동시에 뒤로 튕겨나갔다.

“영감, 제법 하는데?”

입가의 피를 닦는 왕일의 혈색은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고진규는 그러지 못했다.

꿈틀거리는 기운이 뱃속에서부터 그를 괴롭혀 그것을 억누르느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이다.

‘교주가 과연 나보다 약할까?’

왕일은 고진규와 싸우며 그들 형제를 패퇴시킨 사마유운의 무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군. 네놈의 뇌기가 문제였어.”

“뭐?”

“그렇다면 불사지존이란 놈의 얘기도 이해가 되지.”

“무슨 말이야, 영감? 겁먹고 정신줄이라도 놓은 거야?”

갑작스레 불사지존을 언급하는 고진규를 향해 왕일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뇌기가 몸을 파고들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못하게 방해를 했다. 그러니 상처나 내상을 입는다고 해도 상대보다는 그 정도가 덜하겠지. 분명 불사지존도 뇌기를 익혔을 것이다.”

고진규가 생각하는 불사지존의 전설이 탄생한 배경이었다.

“첫째, 그런 말은 어디에도 없어. 둘째, 난 신경 안 써. 셋째, 영감도 신경 쓸 필요 없어. 여기서 죽을 테니까.”

말을 마친 왕일이 먼저 땅을 박찼다.

그리고 곧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고진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잔재주를 피우는구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결국 공격을 하는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고진규와 같은 고수는 상대를 놓쳤다고 해서 그리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훙~ 훙~

고진규가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찔렀는데, 마치 화가 난 고슴도치가 가시를 곤두세운 것 같았다.

어디에서 공격하더라도 고진규에게 직접 피해를 입히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파지지지직!

천둥소리도 없었건만 벼락이 지상을 밝혔다.

고진규의 검이 만들어낸 잔상 하나하나에 벼락이 떨어지며 커다란 횃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과 같은 모습을 만들었다.

‘왜?’

고진규는 왕일의 공격을 막으면서 의문이 들었다.

여태 왕일이 뇌기를 제대로 활용해 싸운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뇌기를 익히고 있다는 것도 그저 백독문과 싸울 때 강시를 터뜨리는 것을 보고 추측한 것이 전부였었다.

‘마치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왕일은 자신이 뇌기를 익혔다는 것을 확실하게 만방에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큭!’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효과적인 것은 분명했다.

검을 타고 흐른 뇌기가 빗물에 젖은 온 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저놈도 무리를 하는 것이 분명해.’

고진규의 내공은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고, 피부는 따끔거렸으며, 내부는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고진규는 그러한 것들을 꾹 눌러 참으며 왕일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콰쾅!

‘응?’

천둥소리와 함께 주위가 밝아졌는데, 지금까지 왕일이 만들어낸 뇌전이 만들어 낸 것보다 수백 배는 더 밝은 빛이 주위를 밝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근원지는 바로 자신의 머리 위였다.

고진규가 머리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붉은 횃불이 하얀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벼락을 맞았구나!’

사람이 배고프면 밥을 먹듯, 뇌기를 익힌 사람에게 벼락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일 것이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저놈이 벼락을 불러들였나?’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도 어렵지만, 그 자리에 정확히 벼락이 떨어질 확률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희박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왕일은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만들면서 말 그대로 벼락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늦었다!’

이미 왕일의 도가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일단 쳐내고…….’

검으로 도를 후려치면 공중에 떠있는 왕일이기에 튕겨져 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대가로 내상을 입거나 땅에 박힐 수도 있었지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최소한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으니까.

캉!

쇳소리가 들리며 일단 고진규의 뜻대로 왕일의 첫 일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아니, 역공이 성공했는지 왕일의 도가 허공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고진규는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젠장!’

고개를 빠르게 내린 고진규의 눈에 불꽃을 뿜으며 다가오는 커다란 주먹이 보였다.

‘속임수였다니!’

경극배우처럼 과장된 몸놀림과 허세에 속아 넘어 간 꼴이었다.

자신이 한심했다.

그러나 자책을 다 하기도 전에 왕일의 주먹이 배에 틀어박혔다.

“컥!”

피를 뿜어내는 고진규는 배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내력을 다 싣지 못했고, 그로 인해 창자가 가닥가닥 끊어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혼자 죽을 것 같으냐!’

아픔을 참으며 검을 빙글 돌린 고진규가 검봉을 아래로 향하게 한 후에 왕일의 등짝을 목표로 곧장 찔렀다.

퍽!

‘됐다!’

분명히 왕일의 등을 관통했고, 찌른 느낌도 있었다.

손맛이 묵직했다.

하지만 고진규는 곧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왜?’

피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검에 찔린 왕일의 신형이 점점 흐릿하게 변했다.

‘잔상…….’

처음 왕일과 붙었을 때 이형환위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자신했던 자신이 다시 한 번 한심스러웠다.

‘허세든 이형환위든 그것을 펼치는 시점이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니.’

아무리 좋은 초식도 알맞은 순간에 펼쳐야 그 위력을 십분 발휘하는 법이었다.

그것은 무공을 처음 배울 때 사부들이 강조하는 것이며 초식을 계속 반복수련 하는 것도 그때문이었다.

내가 펼치고자 하는 순간에 원하는 초식을 쏟아내기 위해서.

그런데 그것을 잊고 있었다.

기본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가 지금 그의 등에 작렬했다.

쾅!

우득!

왕일의 발이 숙여진 고진규의 등을 후려쳤고,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진규가 흙탕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아니, 그의 몸이 반쯤 땅에 묻혔다.

***

“진규야!”

고진규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고학규가 그를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악불군과 심초운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놈들!”

급한 마음에 내력을 쏟아 부으며 강맹한 위력의 초식들을 쏟아내었지만, 악불군과 심초운은 평생 합공을 익힌 사람들처럼 그것들을 때로는 흘리고, 때로는 둘이 같이 막아내면서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놈!”

왕일이 쓰러진 고진규를 발로 걷어차 옆에 있던 무인에게 건네주는 것을 본 고학규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분노가 그를 가득 채웠다.

동생을 쓰러뜨리고 함부로 대하는 왕일에 대한 분노도 있었고, 자신을 꼼짝달싹 못하게 붙들고 있는 악불군과 심초운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고학규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구절심!”

고학규의 분노를 가득 담은 음성이 전장 곳곳에 퍼졌다.

그렇다.

고학규는 그의 제자인 구절심에게 가장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싸움이 치열해지고 숨어있던 사대문파의 고수들이 행동을 개시하면 구절심이 기습을 하기로 약조가 되어있었다.

구절심이 데리고 있는 전력만 해도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이 할은 충분하고도 넘치는 전력이었다.

그들이 혼전의 와중에 싸움에 투입되었다면, 어쩌면 이길 수도 있었다.

고학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구절심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무리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여기서 자신들이 죽고 나면 구절심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구절심이 어째서 이런 행동을 벌이고 있는지 고학규는 이해할 수 없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분노했다.

“그놈은 왜 불러? 아, 보고 싶으면 나중에 교로 찾아와라. 그놈을 지객당주에 앉히기로 했으니까 네놈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은 대접할 거다. 물론 여기서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악불군의 말이 고학규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놈이 배신을 했다는 말이냐!”

“왜 화를 내고 그러냐?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인데. 네놈의 제자가 배신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안 그러냐?”

“닥쳐라!”

마교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워줬더니 배반을 하고 교주자리를 노렸던 자신들의 형제를 빗대어 말하는 악불군에게 고학규가 바락 외쳤다.

“네놈들이 고수로 만들겠다며 우리 형제들에게 한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죽을 고비를 수십 번 넘기고서야 겨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로지 힘을 추구하며 힘이 정의란 사고를 심어준 것도 너희들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이냐! 우리는 너희가 가르친 대로 행한 것뿐이다!”

고학규, 고진규 형제와 같이 처음 실험에 참여했던 인원은 백여 명 이었다.

그 중에서 형제인 두 사람이 살아남은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웃기고 있네. 네놈들의 처지를 잊었단 말이냐? 너희들은 팔려온 놈들이었다. 돈을 주고 우리가 샀단 말이다. 그런데 힘 좀 생겼다고 주인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 그리고 그 힘도 우리가 주었는데?”

가난한 집안에서 쌍둥이는 그야말로 골칫덩어리였다.

거기다 딸린 식구들이 많다면 웬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뭄이라도 만난다면 몰래 내다버릴 짐에 불과했다.

고씨 형제가 그러했었다.

아홉 형제의 막내들로 태어난 두 사람은 대륙을 휩쓴 가뭄에 굶어죽을 처지였다.

그런 그들을 마교에서 돈을 주고 사갔던 것이다.

“나는, 아니 우리는 가축이 아니다!”

가축이 아니라 짐승처럼 살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던져버려야 했다.

그리고 살아남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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