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정파라고 해서 모두 정의로운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며, 사파라고 해서 모두 흉신악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간에 이름을 날리고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들이 그런 인물들이었기에 정파와 사파가 나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사파도 매일 같이 사람들을 죽이거나 겁간을 하러 다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것들은 사파가 아니라 쓰레기였다.
‘정사지간이라?’
황만복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어르신은 그런 것들을 알고 있기에 어디에도 속하기 싫으셨던 건 아닐까?’
왕일도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이 명확한 그림이 되어 보여지고 있었다.
‘사람이란 어디에 서 있는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아. 햇빛을 받으면 어두운 면이 생기고, 그곳에 그림자가 만들어져. 그 그림자를 욕하는 것은 스스로를 욕하는 것이지.’
정파와 사파의 명확한 차이가 이해되었다.
‘밝고 어두울 뿐이지, 본질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모든 일을 힘과 연결시키던 왕일의 사고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힘이 아닌 사람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
“적 대주.”
“예.”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나도 없네.”
사마유운이 말을 하며 바라보는 곳에는 가만히 선 채로 붉은 아지랑이에 휩싸인 왕일이 있었다.
“혹시 멍청하면 깨달음을 빨리 얻는 것일까? 우린 너무 똑똑해서 그것이 더디고 말이야.”
그 질문엔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답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멍청하면 모르는 것이 더 많을 테니 모든 것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될 지도 모르지.”
사마유운이 스스로 묻고 답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군.”
왕일이 눈을 떴을 때, 제정신이라면 좋은 일이 분명할 터였다.
“왕 대주가 어디까지 성장하는 걸까? 이대로 불사지존이 올라섰던 경지까지 가는 걸까?”
“그리 된다면 무림일통도 걱정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만큼 부담감이 생길 것입니다.”
불사지존은 주위를 황폐화 시키는 것도 모자라 자신마저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람이었다.
“그럴 지도. 하지만 대체 얼마나 더 많은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도 궁금하긴 하구먼.”
보통 무인들은 평생을 수련해도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고작 두세 번이었다.
그런데 왕일은 몇 번의 깨달음과 각성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왕 대주의 깨달음은 그리 많은 발전을 가져다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같은 무인들이 한 번의 깨달음으로 열 발자국을 간다면 왕 대주는 한 걸음이나 걸으면 다행인 정도지요.”
맞는 말이었다.
“이번에도 같을까?”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보였던 변화와는 뭔가가 다른 것 같으니까요.”
붉은 아지랑이는 점점 그 색을 더해 핏물처럼 검붉게 변했으며, 왕일을 완전히 감싼 상태였다.
“제발 좀 이번엔 제대로 된 각성을 했으면 좋겠군.”
사마유운이 말을 마치고는 악불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절대 안 되네.”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왼손을 보게.”
사마유운의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악불군의 왼손으로 향했는데, 무슨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발발 떨리고 있었다.
“이, 이게 왜…….”
“몇 번 안 되지만, 자네가 진정으로 갈망하고 열망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떨리곤 했다네. 그러니 안 된다고 하는 것이네. 불사심공은 절대 인간이 익혀서는 안 되는 무공이라네.”
“왕 대주는요? 왕 대주는 무슨 짐승입니까?”
“짐승이라기 보다는 악… 피해!”
말을 하던 사마유운이 악불군을 와락 밀치고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쾅!
사마유운의 손에서 폭음이 터졌는데, 곧 그것과 같은 폭발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여졌다.
쾅! 쾅! 쾅! 쾅!
벽력탄이 연속으로 터지는 소리였지만, 그것으로 인한 비명소리는 없었다.
처음 사마유운이 그것을 맨손으로 받으며 입은 피해가 전부였다.
“괜찮으십니까?”
악불군이 서둘러 달려와 사마유운의 손을 바라보았다.
“따끔하군.”
말은 간단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창졸지간이라 완벽히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었기에, 사마유운의 손은 마치 뜨거운 솥뚜껑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일그러져 있었다.
이대로 낫는다고 해도 흉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공을 펼치는 데에 있어서도 제약을 받을 수 있었다.
“어디 놈들 같은가?”
“그건 모르겠지만,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어디서 공격을 했는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서 던진 것이었다.
그것이 곡선이 아닌 직선으로 날아왔으니 던진 상대가 얼마만한 내력을 이용했는지를 말해주었다.
“차갑더군.”
분명 벽력탄일 것이고, 벽련탄을 둘러싼 것이 철이니 차가운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사마유운이 이렇듯 말을 할 정도면 무언가 있다는 것이었다.
“구음신마 그놈일까요?”
“아마도.”
구양신마와 구음신마는 앉아서 기다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왕 대주를 노린 것 같았습니다. 각성 하는 것을 보고는 기회다 싶었겠지요.”
“겸사겸사겠지. 그나저나 비겁하고 치사한 것은 안 변했군.”
“그만큼 힘든 싸움이 되겠지요.”
그 순간 뒤쪽에서 갑자기 커다란 기운이 풍겨왔고, 사마유운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붉은 아지랑이가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는데, 마치 알이 깨지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싱거운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사마유운의 말이 끝날 때, 붉은 광채와 함께 왕일이 모습을 보였다.
***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눈을 뜬 왕일이 처음 한 것은 주위를 둘러보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제 알아볼 참이네. 피해는?”
궁금한 것이 많을 것임에도 사마유운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없습니다.”
처음 사마유운이 벽력탄을 막으며 주의를 줬을 때 적후연과 남찬우, 그리고 수라대의 대주인 독고평이 날아오는 벽력탄의 방향을 바꿔 쳐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는 패진무관의 동태를 보고하러 온 이가 막았는데, 그것으로 봤을 때 그의 무위도 상당한 것 같았다.
시건장치와 충격으로 터지는 두 가지 벽력탄의 종류 중 이번 벽력탄은 충격으로 터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벽력탄을 터뜨리지 않고 흘려 넘기며 방향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거 내가 부끄럽구만.”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말하는 사마유운이었지만,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벽력탄들은 실린 힘이 부족한 지 약간의 곡선을 그리며 날아왔고, 이미 사마유운이 경호성을 발했기에 간신히 쳐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리라.
“아, 왕 대주.”
“예.”
“혹시 구음신마하고 안면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당시 구음신마가 마호성을 향해 검을 날릴 때, 왕일은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저간의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석휘명에게 들은 정보로 구음신마가 마호성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갚아야 할 빚이 있기는 하지요.”
목숨 빚이었다.
황만복, 좌영호와 마찬가지로 마호성은 그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불어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졌다.
그런 마호성을 위해 왕일은 구음신마에게 그 대가를 치루게 할 생각이었다.
“아마도 그가 왔던 모양이네.”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벽력탄 다섯 개를 던지고 물러난 것이다.
“그럼 놈들이 도망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력을 살피러 왔다면 그것에 대한 대응이나 대비도 하겠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사마유운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다치신 겁니까?”
“그렇진 않네만, 역시 무공을 펼치는 것에 걸림돌이 되긴 하겠지.”
사마유운이 다친 것은 오른손이었다.
검을 쥐고 놀리는 손이 다쳤으니 그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놈들도 그리 생각할 터이고. 아니,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겠군.”
구양, 구음신마가 가장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사마유운이었다.
실제로 그들을 패퇴시킨 장본인이 그였으니까.
왕일이 아무리 불사심공에 뇌기까지 지녔다는 소문이 났다 하더라도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귀신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사마유운이라는 몽둥이가 더 무서운 것이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움직일까요?”
“죽자고 달려들겠지.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몰라도, 나선 것을 안 이상 도망칠 구멍이 없다는 것은 알 테니까.”
사마유운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고, 또한 집요했다.
“그럼 죽여주면 되겠군요.”
“좋은 명당자리나 찾아봐야지.”
패진무관을 바로 치는 것은 주변의 민가나 관의 시선으로 인해 부담스러웠는데, 알아서 기어 나와 준다니 마교로서는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어디가 좋겠습니까?”
물어보는 악불군의 시선은 사마유운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미량현 근처에 넓은 평야가 있다고 하던데 그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게 사실 문제였다.
차라리 숲에서 기다린다면 대소변을 처리하는데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평야라면 탁 트여 쉽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먹고 자는 것도 신경을 써야 했다.
“올 것이네. 그것도 빠른 시간 안에.”
“그래서 일부러 다치셨습니까?”
묻는 악불군의 음성이 곱지 않았다.
“어허, 이 사람. 누가 일부러 다쳤다는 것인가? 자네를 살리고, 왕 대주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친 것 아닌가?”
“예, 그러시겠죠.”
“못 믿는 것인가?”
“제 평생의 목표는 오로지 교주님이었습니다. 비록 왕 대주가 터무니없는 발전 속도와 경악할 정도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제 목표는 교주님입니다. 불사심공? 그걸 제가 왜 배우겠습니까? 목표가 왕 대주였다면 연구하기 위해서라도 배우려 시도했겠지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는 목소리에 분노까지 담겨 있었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뭔가?”
“이제는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빚을 졌으니 그것이 제 마음에 부담으로 작용할 테니까요.”
“마음대로 하다니?”
“교주님께서 교주위를 벗어나면 한 번 제대로 붙어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날처럼 말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부담가질 필요 없네. 그리고 당장이라도 말을 하면 상대해주겠네. 꼭 교주위에서 내려갈 때를 기다릴 필요 없다는 말이네.”
“하지만 어떻게…….”
“그만! 내가 약조를 하겠네. 되었나?”
“알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악불군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왕일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결국 싸우겠다는 말을 얻어내려 그렇게 연극을 한 것이군.’
왕일은 악불군이 전혀 미안해 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리고 왕 대주.”
“예.”
“뭔가 변한 것이라도 있나?”
“예?”
“방금 각성을 하지 않았나. 그래서 물어보는 걸세.”
어느새 악불군도 돌아서던 걸음을 멈추고 왕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자신은 느끼지 못했던 건가? 그럼 일단 운공이라도 해 보게나. 아마도 뭔가 변화가 있지 싶네만.”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왕일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는데, 지금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기 때문이었다.
“흐음…….”
약 일 각의 시간이 흐른 후, 왕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났다.
“어떤가?”
“그게… 상단전에 나뉘어 있던 단전들이 하나로 합일 되었습니다.”
사마유운을 비롯해 모든 이들의 눈에 황당함과 호기심이 같이 버무려져 있었다.
“단전들이 합일 되다니? 그게 가능한가?”
“전 되는데요?”
왕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겐 뜬 구름 같은 말이었다.
“알았네. 뭐,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또 다른 변화는 없나?”
“내력이 한층 증가했네요.”
“어느 정도로?”
사마유운의 물음에 왕일이 손을 들었는데, 그곳에서 뇌기가 춤을 추고 있었다.
뇌기를 끓어 올린 것이다.
쾅!
왕일이 뇌기가 춤추는 손을 휘두르자 십 장 밖에 있던 아름드리나무의 둥치가 그대로 폭발을 하더니 쓰러져버렸다.
“컥!”
그리고 하나의 인영이 나무 뒤에서 튕겨져 나가며 신음을 흘렸다.
“잡아라!”
우르르 몰려간 사람들의 손에 끌려온 것은 놀랍게도 좌영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