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흥!”
입가의 피를 닦은 왕일이 자신을 노려보는 하만성을 향해 콧방귀를 뀌어주었다.
“그 득의만만한 미소는 뭐지?”
하만성은 자신의 공격이 적중했음을 깨달았고, 멀쩡한 것처럼 보여도 왕일의 내부가 엉망진창일 것이라 생각했다.
단순히 도기만으로 바위를 자르는 그의 무공이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용서를 빈다면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내상을 입은 하만성은 자신의 우위를 자신했다.
지금 왕일은 내외상을 함께 입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정말 왕일로서는 웃기는 말이었다.
“지랄하지 말고 덤비기나 해.”
말을 하면서 왕일이 옷을 벗었는데, 어느새 그의 상처에서 흐르던 피는 멎어있었다.
아니, 벌써 아물고 있었다.
그리고 하만성은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이해할 수도 있었다.
[왕일이란 시주가 불사심공을 익히고 있다고 소문이 났소이다. 뇌기와 더불어 불사심공을 익혔다면 쉽지 않을 것이외다.]
문든 자신을 보며 말하던 소림의 장로인 허현대사의 말이 떠올랐다.
불사심공을 익혔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맞아도 죽지 않고, 찔러도 죽지 않는다. 오늘 죽어도 내일 다시 살아난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죽음도 물러서고, 오로지 그의 손만이 죽음을 인도한다.]
인구에 회자되는 말이 하만성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아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무슨 사술을 부렸거나 약물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인 이상 찔리면 죽고, 맞아도 죽을 수 있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정체를 까발려주마!’
감히 자신을 상대로 수작을 부리는 왕일이 가소로웠다.
‘내공도 나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그것도 분명 무슨 수작을 부렸기 때문일 것이다.’
첫 부딪침에서 내상을 입은 것은, 공격이 성공한 후에 느껴진 반탄력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도에 힘이 빠졌고, 살가죽을 자르는 것에 그쳤다.
‘잘린 팔다리도 붙일 수 있는지 보겠다!’
왕일이 젊다는 생각에 내공으로 밀어붙이려던 생각을 버렸다.
물론 그런 공격을 한 이면에는 분노와 노기도 함께 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많이 줄어들은 상태였다.
한 바탕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초식은 어떨까?’
약물과 사술로 내력은 끌어올릴 수 있어도 초식의 활용과 변용에 있어서는 자신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청하도법은 물을 보며 만든 도법이었고, 물이란 어디에 담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변하는 것이었으니까.
‘네놈의 가면을 벗겨주겠다.’
숨을 들이마신 하만성이 도에 힘을 주었다.
휭~
가벼운 휘두름이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었다.
그것이 왕일의 주변을 빠르게 휘돌았다.
훙~
시냇물이 모여 강물이 되었다.
무거운 공기가 왕일을 압박하며 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
‘다시 내력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인가?’
왕일은 하만성이 빠른 공격으로 자신의 사방을 점하는 것을 보고 초식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순식간에 뒤바뀌더니 처음 공격처럼 무겁게 짓눌러왔다.
그렇기에 다시 내력으로 자신을 누르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웃!”
아니었다.
어느새 강물은 다시 지류에서 갈라져 작은 시냇물이 되어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유자재로 바꾼단 말인가?’
하다못해 주먹을 휘두를 때도 방향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법이었다.
그런데 몸속의 내공을 가벼움과 무거움을 넘나들며 그 성질을 바꾸고 있었다.
‘이것이 청하도법?’
자신이 배운 것이나 석휘명이 배웠던 것이나 모두 수박 겉핥기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패액!
하만성의 도가 수십 개로 갈라지더니 왕일의 몸 전체를 그 권역에 두었다.
그 서슬에 왕일의 머리카락과 옷이 잘게 잘려졌고, 몸은 삽시간에 피로 뒤덮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온다!’
주변을 봉쇄해 도망갈 길을 막은 도가 빠르게 겹쳐지며 거대한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발!’
도가 노리는 곳은 발이었다.
그것을 느낀 왕일이 도를 마주쳐갈 때, 어느새 하만성의 도는 바람처럼 꺼져버렸다.
아니, 얼음으로 만들어진 도가 순식간에 녹아 형체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팔이었어!’
수증기가 되어 사라진 도가 나타난 곳은 왕일의 왼팔이 있는 곳이었다.
쾅!
폭음과 함께 왕일이 피를 뿌리며 뒤로 날아갔다.
***
“대주님!”
진승한과 막달평이 왕일에게로 향하려는 것을 적우가 팔을 들어 가로막았다.
“왜……?”
“대주님이 누구에게 인정을 받았는지 잊었냐?”
적우의 말에 두 사람 모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일은 사마유운이 인정한 고수였고, 그런 그를 믿기에 이곳에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 이면에는 은거하다 갑자기 뛰쳐나온 모용중걸보다는, 실력이 명확히 드러난 하만성을 상대하게 하려는 배려도 있었다.
하만성의 무위에 대해서는 이미 파악이 끝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몰래 수련을 하여 누구도 몰래 더 높은 경지에 들어섰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염두에 두고 왕일과 저울질을 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튕겨나갔던 왕일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벌떡 일어났는데, 그의 왼팔은 피투성이기는 했지만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역시 그 영감탱이가 날 가지고 논 거였어!”
분노에 찬 외침이 향한 대상은 악불군과 사마유운이었다.
지금 하만성을 상대하면서 악불군과 비무 할 때 썼던 내력만큼만 사용한 왕일이었기에, 당시 칼을 놓치고 처량한 말을 지껄이던 악불군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너!”
왕일이 하만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악가 늙은이보다 세냐?”
싸우다말고 갑자기 혼잣말에 질문까지 하는 왕일을 보며 하만성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놈이 무슨 짓인가?’
“무슨 소리냐?”
“악불군 부교주보다 세냔 말이다!”
마교가 건제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고수의 숫자였으며, 그 무위가 일반적으로 정파에 존재하는 고수들보다 높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사마유운과 악불군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일인당 정파의 고수들이 최소 서너 명은 필요할 것이란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가?’
느닷없는 왕일의 질문에 하만성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정상은 아닐 수도 있겠지.’
정파에서도 나름대로 왕일에 대해 조사를 벌여 가족들의 죽음과 패진무관에서의 일 등등,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할 수는 없다!’
지금 하만성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는, 고통 없이 죽여주는 것뿐이었다.
“대답해라!”
왕일이 채근했지만, 하만성은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의 도가 허공을 부유했다.
휘이이잉~
잔잔한 미풍이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대하(大河)가 되었다.
“내가 우습냐? 대체 몇 번이나 같은 수로 날 농락하려는 거냐!”
왕일은 같은 수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하만성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 분노는 너무 이른 것이었다.
***
‘이건 뭐지?’
하만성의 도가 한 번 휘둘러지고, 왕일은 자신의 팔에 생겨난 작은 생채기를 보았다.
언제 공격을 당했는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지만, 또 그만큼 위력이 약해 개미가 물어뜯은 정도의 고통과 흔적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막기 어려웠는지도 몰랐다.
‘좀 다른데?’
하만성의 공격이 변화하고 있었다.
이전의 공격이 횡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 공격은 종이 주가 되었다.
옆에서 치고 오는 공격에 실린 힘이 더 강했지만,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가벼운 움직임의 도가 품고 있는 날카로운 기운을 왕일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옆은 견제야.’
자신을 묶어두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투두둑]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마치 소나기가 내리기 직전에 한두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풀이파리와 땅에 부딪쳐 만들어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빗소리? 비!’
순간 왕일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주위가 삽시간에 어두워지며 폭우가 쏟아졌다.
‘피할 수 없어!’
이미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이었다.
‘어떤 수를 써야 하지?’
왕일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무공들과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초식들이 뒤엉켜갔다.
하지만, 그것들 중에서 어떤 것도 지금 상요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배운 것은 많아도 깊이 있게 파고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왕일이 싸움을 한 방식은 찌르고 베는 것뿐이었다.
자신만의 것이라 내세울 수 있는 초식이 없이 내공의 힘과 속도로만 적을 상대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는 잘 견뎌왔었다.
‘아!’
순간 왕일은 또 다른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었다.
악불군이 화영영을 상대하거나 자신을 상대할 때 초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일단은 하만성의 공격을 막고 봐야했다.
‘좋아!’
왕일은 자신이 가진 장점을 살리기로 했다.
폭우가 쏟아지면 동반되는 것이 바로 뇌우였다.
하지만 이번 뇌우는 하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땅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하압!”
왕일이 도를 앞으로 쭉 뻗자 손에서 시작된 하얀 기류가 검은 검신을 타고 공중으로 쏘아지더니, 마치 만개하는 꽃처럼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춘절에 하늘을 수놓는 불꽃처럼 화려한 폭발이 왕일과 하만성의 중간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그 여파로 하만성은 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갈 수 없었다.
시야가 막히기도 했지만, 도를 타고 흘러들어온 뇌기가 손을 저릿하게 만들더니 이내 내력까지 진탕시켰기 때문이었다.
“제법 한 수가 있었구나.”
공중에서 신형을 틀어 왕일과 거리를 두고 선 하만성이 경탄을 담아 말했다.
몇 번의 공방에서 뇌기를 느끼기는 했지만, 너무 약해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었다.
그래서 아예 무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 방심을 노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왕일이 반격을 한 것이었다.
“내가 멍청한 놈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왕일은 이번에도 전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았으니 지금부터는 다를 거다.”
말을 마치자마자 도를 뒤로 한 왕일이 땅을 박찼다.
그런 그의 뒤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는데, 단 두 발자국 만에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패진무관의 절기인 승천보가 펼쳐진 것이다.
“웃!”
마치 이형환위라도 펼치는 것처럼 잔상이 사라지기도 전에 바로 코앞에 나타난 왕일을 보고 하만성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캉!
도와 도가 부딪치며 불꽃이 일어났지만, 그것으로 하만성의 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줄에 매달린 추처럼 왕일의 도가 부딪친 힘을 빌려 빙글 돌아 다시 하만성의 다리를 쓸어왔기 때문이었다.
챙! 챙! 챙! 챙! 챙!
정면으로 부딪치면 그 힘을 이용해 공격할 것을 저어해 하만성이 도를 빗겨 막았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왕일의 도는 어디로 튕겨내더라도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다시금 하만성의 몸을 공격했다.
“이놈!”
하만성의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왕일이 지금 펼치는 것이 바로 기본중의 기본이라는 팔방풍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그런 기본을 막는데 급급한 자신에게 향한 분노가 더 컸다.
“큽!”
하만성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갈수록 왕일의 도가 빨라지며 그 속에 뇌기가 섞이기 시작하자 내력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하려면 어떻게든 왕일을 떼어내고 숨을 골라야했지만, 왕일의 공격에 결코 멈춤이란 없었다.
‘철 사부님.’
하만성을 몰아붙이는 왕일의 뇌리에 철사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남들보다 월등한 성장을 이뤘다는 것에는 칭찬하고 싶지만, 요새 들어서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는 것 같아 하는 말이다. 너는 설마하니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