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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109화 (109/138)

109화

“잘 자랐네 그려.”

황만복이 말을 하는 동안에 주위를 둘러싸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왕일은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솔직히 어지간한 고수들은 모두 모용중걸이 있는 곳에 모여 있었기에 이곳에는 하만성과 황만복, 좌영호만이 고수라 내세울 수 있는 전부였다.

“어르신 덕분입니다.”

왕일의 눈이 좌영호에게로 돌려졌다.

“마 어르신의 희생에 대한 감사를 이제야 할 수 있겠군요.”

“언제고 찾아오면 될 일이었네.”

좌영호는 조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사과하는 것에서 그쳤을 뿐이었다.

“우리의 목을 취하러 왔나?”

“아닙니다. 그때의 은혜를 갚고자 왔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인가?”

“오늘 두 분의 목숨을 살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지금 저곳엔 개방도들도 있네.”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미 화광이 충천하고 있었다.

“저에겐 적일뿐입니다.”

조금은 차가운 왕일의 음성이었다.

“자신 있는가?”

좌영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없었다면 오지도 않았겠지요.”

말을 마친 왕일은 더 이상 좌영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황만복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르신. 어르신이 그때 그러셨지요?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은 많은 이들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가 결정해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따르면 왕일이 지금 하는 행동에 그릇됨은 없었다.

“그것이 자네 길인가?”

“예.”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누군가의 강요도 아니었고, 사리분별을 못하고 그저 휩쓸려 사는 인생이 아닌 자신의 길을 발견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럼 그 길을 가게나. 그리고 그 길에 우리가 걸림돌이 되면 치워버리게. 물론 난 이제 마주칠 일이 없을 걸세.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제자와 시골에 틀어박힐 생각이니까. 하지만…….”

황만복이 좌영호를 바라보았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알았네.”

두 사람의 말을 듣는 좌영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았건만, 이미 좌영호의 목은 왕일의 두툼한 손에 꽉 잡혀 있었다.

“되도록이면 어르신과 만나지 않으려 하겠지만, 일부러 피하지도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손이 아니라 제 도가 어르신을 맞을 것입니다.”

“…….”

좌영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갈 것인가?”

“아닙니다.”

만일 왕일이 황만복이나 좌영호만 만나려는 목적이었다면 이쯤에서 사라지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잠깐만 기다리게. 내 제자 놈 좀 불러오겠네.”

황만복이 자리를 뜰 때까지도 왕일은 좌영호의 목을 잡고 있었는데, 이는 주위에서 지금의 대화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마교에 들어간 것인가?”

“선택하진 않았지만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좌영호의 질문에 대답하는 왕일의 표정은 차가웠다.

“날 찾아올 수도 있었네.”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만일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전 마교에 몸을 의탁했을 것입니다.”

“왜?”

-비룡장이 제 원수이니까요.

왕일의 전음에 좌영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시 패진무관에 저를 죽이러 왔던 복면인들을 기억하십니까?”

왕일을 따라 움직였던 이들이 있었고, 그 동향을 보면 분명 왕일이 목표였다.

“그들이 바로 그의 수하들이었습니다.”

좌영호는 부정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만하려는 술책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조사를 해보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지금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네 명의 제자들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 허장천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요.

“그럼 왜 복수를 하지 않나?”

지금의 왕일이라면 혼자 찾아가도 복수는 여반장일 것이었다.

“할 것입니다.”

확실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대놓고 떠드는 것은 좌영호로 하여금 허장천을 감시하게 할 목적이었다.

마교에서 감시를 하는 것보다는 같은 편인 개방에서 그를 주시하는 것이 나았고, 그가 잠적하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나로 하여금 그놈을 조사하고 감시하게 만들려는 것이겠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 황만복이 중년인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놈이 내 제자라네.”

혁련종은 사람 좋게 생긴 인상을 가진 중년인으로,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인물이었다.

“왕일입니다.”

“혁련종일세.”“얼굴을 봤으니 혹시라도 나중에 보게 되거든 다리몽둥이나 부러뜨리게나. 이놈이 정신을 못 차리고 명예를 탐하거든.”

그 말은 혁련종이 다시 전장에 뛰어들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 살려달라는 의미였다.

“나, 나도 한 명만 부르겠네.”

좌영호가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목숨을 구걸한다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수치라고 할 수 있었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 살아남을 이들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왕일이 손을 풀자 좌영호의 발이 땅에 닿았고, 내공이 다시 원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좌영호가 한 일은 내공을 잔뜩 불어넣어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일이었다.

“모두 후퇴한다! 아니, 도망쳐라! 모두 도망쳐! 남아있는 놈들은 내가 손수 목을 쳐버리겠다! 어서 꺼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좌영호가 힐끔 왕일을 바라보았다.

“어르신답네요.”

황당한 좌영호의 행동이었지만, 왕일은 그저 피식 웃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한 명은 떠나지 못할 겁니다.”

좌영호의 고함으로 인해 비명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하 대협 말인가?”

“예. 제가 저지른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다른 은원은 은원이니까요.”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수치를 안겨주지는 말게나.”

“알겠습니다.”

돌아서는 왕일을 보며 좌영호는 어떻게든 숨어서 왕일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왕일의 실력을 제대로 알기 위해 수치를 주지 말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

“네놈들이 그러고도 무인이란 말이냐!”

하만성의 고함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을 갈랐는데, 그가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는 습격자들의 비겁한 행동 때문이었다.

어둠속에서 화살을 날리고, 자신보다 무위가 떨어지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죽였다.

그들을 막으려 하면 화살이 날아와 진로를 방해했고, 화살을 쏜 놈을 잡으러 가면 어느새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잡으려 해도 쉽지가 않았다.

“이익!”

챙!

하만성의 외침에 돌아온 것은 화살 한 대였다.

“먼저 놈을 잡도록 하세나!”

하만성과 같이 움직이던 이십여 명의 고수들이 그의 말에 어둠속을 노려보았다.

사십여 명이던 고수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반으로 줄었으니, 그들로서는 속이 뒤집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형제나 친인들이었다.

그렇기에 살기가 끓어올랐다.

하만성이 앞장을 서자 그 뒤로 사람들이 쐐기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혹시나 있을 화살 공격을 방비하자는 것인데, 그런 그들의 귀에 갑자기 좌영호의 외침이 들렸다.

(모두 후퇴한다! 아니, 도망쳐라! 모두 도망쳐! 남아있는 놈들은 내가 손수 목을 쳐버리겠다! 어서 꺼져!)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내공의 힘을 빌려 주위에 넓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개방의 인물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으며, 어물쩍거리던 이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하만성 등을 일별한 뒤에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갑자기 화살이 무더기로 날아왔는데, 아마도 하만성이 떠나는 것을 저어하는 것 같았다.

채채채채채챙!

“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쳐낸 하만성이 숲속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외침에 대한 대답은 뒤에서 들렸는데, 어느새 왕일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때를 같이 해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사방에서 그들을 포위하는 형태를 띠었다.

“네놈이 왕일이란 놈이구나!”

하만성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왕일의 용모파기야 이미 정파에 널리 퍼진 상태였고, 시뻘건 눈이 존재를 과시했기에 하만성이 알아보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말하라! 네놈이 정녕 우석이를 죽였단 말이냐!”

왕일이 불사심공을 익혔다는 소문처럼, 왕일에 대해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들이 여기저기에서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죽였다.”

이전의 왕일이었다면 그 말을 하는 자체로도 상당한 죄스러움을 느꼈을 것이지만, 지금의 왕일은 달랐다.

분명 자신이 잘못한 것임에도 마치 당당한 일을 한 것 같은 말투였으며 행동이었다.

“이놈!”

그런 왕일의 태도가 하만성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는지 그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와 옆에 서있던 이들이 한 걸음씩 물러설 정도였다.

“참고 있었군?”

하만성의 기세를 느낀 왕일이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물었다.

“네놈이 오기를 기다린 것뿐이다!”

적우의 무형시나 막달평, 진승한이 왕일과 같이 다닌다는 것은 이미 정파에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모습을 본 하만성이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는 왕일을 기다린 것이다.

“날 끌어내기 위해 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단 소리군?”

왕일이 턱짓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가리켰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

하만성이 제 실력을 드러내었다면, 이렇듯 단시간에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화살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가 작심을 하고 적우를 쫓았다면, 아까 좌영호의 외침에 도망간 인원은 거의 배에 달했을 터였다.

“그런 놈이 무슨 정파요, 정의군자란 말이냐?”

“닥쳐라!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일 뿐이다!”

하만성은 혹시나 왕일이 나오지 않을 것을 저어해 실력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스스로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분노에 노기가 겹쳐졌다.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덤벼.”

왕일이 도를 손에 쥐며 비어있는 손을 까딱거렸다.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하만성이 도를 거칠게 휘두르자 그것을 따라 땅바닥의 먼지가 함께 솟아오르더니 도와 함께 휘둘리기 시작했는데, 사막의 용권풍이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청하도법은 안정된 마음으로 펼치면 잔잔한 호수의 수면이었지만, 지금과 같이 격정적인 심정으로 무공을 펼치면 성난 파도가 되어 적을 집어 삼켰다.

‘부족하지 않다!’

한 번 휘두름에 주도권을 잡은 하만성의 도를 맞으며, 왕일은 상대로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화영영이나 악불군이 무식하게 공격하기는 했지만, 꼭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했었다.

그러니 자연 공격이 무뎠고 진실 된 자신의 실력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만성의 도에는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제자를 죽인 놈이니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뻔뻔스럽게 인정하며 오히려 도발을 하고 있었으니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를 기만한 것인지 확인해 본다!’

사마유운이나 악불군은 왕일을 두고 자신들보다 고수라 평가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만성은 왕일의 적수가 되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웅~

왕일의 도에서 힘찬 울음이 터져 나왔다.

떨림도 없었건만 도에서 발출된 기가 공기와 부딪치며 만들어 낸 소리였다.

그리고 첫 충돌이 일어났다.

쾅!

성난 파도와 커다란 바위가 만나 굉음을 만들어 내었는데, 바위의 단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파도가 잘게 부서졌다.

“컥!”

하만성의 입에서 신음과 함께 핏방울이 뿜어졌다.

“와아!”

분명히 하만성의 비세이건만 남아있던 그의 동료들이 모두 함성을 질렀다.

왕일의 몸을 가로지르는 핏자국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왼쪽 어깨에서 시작된 핏자국은 길게 이어지며 오른쪽 허리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옷도 잘려져 나풀거리고 있었다.

갈비뼈가 잘리지 않았다고 해도 하만성의 도에 머물고 있던 도기로 인해 내장이 진탕되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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