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두고 봐, 분명히 나 말고도 익히는 사람이 나오게 만들 테니까.’
그러자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무엇보다 일단 백회를 여는 방법을 고심해야 했다.
‘그때 휘명, 그놈에게 그 방법을 들어둘 것을 그랬어.’
자신의 백회를 열어준 것이 석휘명이었었다.
그때의 방법이 뭔가 조화를 부려 지금의 상태가 되었을 수도 있기에 왕일은 그 방법을 자세히 들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분명히 통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왕일도 나름대로 알아봤지만, 약물을 이용한 방법이나 내공으로 억지로 뚫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석휘명처럼 약초를 태워 그 연기를 활용하는 것은 아예 없었다.
‘비룡장주란 놈은 알고 있겠지?’
만일 기회가 된다면 비룡장주인 허장천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러나 더 이상은 힘든 걸까?’
연속적인 상단전의 출현을 겪은 후에는 더 이상 상단전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하단전과 중단전, 상단전을 모두 채운 내기는 또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보통 내공심법을 운용하면 받아들인 기운은 내공으로 전환해 단전에 들어가고, 단전을 다 채운 후 나머지 내기들은 뿜어내는 숨결에 이끌려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니면 내기들을 혈도에 가둬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내기를 받아들여 그 힘을 이용해 단전을 넓히거나 막힌 혈도를 뚫었다.
그런데 왕일의 경우는 달랐다.
분명 단전을 다 채운 후에 내기를 더 받아들여도 오간데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설마 엉뚱한 곳에 또 다시 단전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라, 그만 고민하자. 그런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무공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일뿐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은 언제 또 다시 문제점이 수면위로 모습을 보일지 모른다는 말도 되었으니까.
‘쇄비와 무상이라?’
펼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한 번 펼치고 난 후에는 극심한 고통과 무기력함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도 동시에 두 가지를 펼칠 수도 없었다.
‘일종의 구명절초군.’
어려운 무리(武理)를 통한 깨달음으로 펼친 것이 아닌, 무지막지하게 내공을 쏟아 부어 펼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일이 끝나고 자신에게 여유가 주어진다면 무공을 완성시키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수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왕운이었다.
‘물론 그 전에 다른 놈들에게 실험을 해봐야겠지.’
아무리 완성을 시킨다고 해도 어떤 부작용이 있을 것인지 몰랐기에 왕운에게 가르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화영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쨌건 난 나쁜 놈이 맞나보네.’
자식의 안위를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려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왕일은 쓴 웃음을 지었다.
‘아니지? 내가 왜 나빠? 보통 다 그러잖아? 지 새끼를 위해서 못 할 일이 뭐가 있냐고?’
왕일은 자식인 왕운을 위한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의 만족을 위해 무공을 완성하려 했던 것을 잊었다.
‘절대 운아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거야.’
왕일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병약하고 가족의 짐이 된 모습이었다.
당당한 아버지로서 아들 앞에 서고 싶었다.
‘절대!’
뚝!
순간 손아귀를 너무 힘껏 움켜쥐었는지 젓가락이 부러지고 말았다.
“뭐 하나?”
“예?”
“무슨 생각을 하기에 밥도 먹지 않고 애꿎은 젓가락만 부러뜨리느냔 말일세. 맛이 없나? 난 맛만 좋구먼.”
지금은 모두 모여 밥을 먹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왕일이 생각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사비월이 조리를 했으니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했나?”
사마유운도 집요한 데가 있었다.
“엉뚱한 놈이 튀어나오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엉뚱한 놈이라니?”
“그… 왜 있잖습니까? 정파와 사파가 붙으면 정파에서 뜬금없이 두각을 드러내는 놈 말입니다.”
시중에 흘러 다니는 이야깃거리에는 언제나 정파의 영웅이 튀어나와 사파의 마인들을 일패도지 시킨 후에 평화를 가져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사람 혼자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모용중걸이 있잖은가.”
“그놈은 이미 알려진 놈입니다. 정파에 과연 인물이 그 하나일까요? 각 파가 숨겨 놓은 비수가 없겠느냔 말입니다.”
“없긴 왜 없어? 그놈들이 밥 먹고 하는 짓이 그건데. ‘언제고 한 놈만 걸려라’면서 무지하게 돈과 영약을 들이 붇는 게 그놈을 일이야.”
사마유운이 말하는 그놈들이란 것이 정파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럼 가끔 튀어나오는 놈들이 그런 놈들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그놈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인데 맨날 돈 없다는 소리만 하겠는가? 삼 년 전 가뭄에도 정파놈들이 낸 돈은 얼마 되지 않았네. 모두 상가에서 나왔지. 그런데 그런 놈들이 문제가 많아.”
“문제라니요?”
“그런 놈들 치고 나중에 장문이 됐다거나 하는 소리 들어본 적 있나?”
왕일이 들은 풍월은 모두 사파를 절단 낸 시점까지였다.
“못 들어봤습니다.”
“그건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네. 준비가 되었으면 진즉에 튀어나왔지, 문파가 다 거덜 날 때 튀어나오겠나? 그런 놈들이니 남은 약과 대법으로 어떻게든 실력을 끌어올리는 거야.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인해서 싸움이 끝나면 폐인이 되는 거고. 그런 것을 은거네 뭐네 하면서 좋은 말로 포장하는 것이 정파놈들의 수작이네.”
“우린 모용중걸이 그들 중 하나라고 보고 있네.”
적후연이 사마유운의 말을 거들었다.
“모용세가에서 비밀리에 키우던 인물이었단 말입니까?”
“그래.”
일견 말이 되는 것 같고, 앞뒤가 들어맞는 것 같았다.
“사파는 왜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생각이 있는 것인가? 자파에서 그런 걸출한 인물이 나왔다고 생각해보게. 그럼 그놈이 가만히 있겠나? 대가리 되겠다고 날뛰겠지. 그러니 자신의 확실한 후계자를 미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밀어도 거의 실패 아니면 평균이라는 것이 문제라 할 수 있네.”
사파가 달리 사파가 아니었다.
“그럼 교는요? 교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그 빌어먹을 개새끼들이네!”
갑자기 사마유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예?”
“우리도 한 번 해보자고 달려든 것이 바로 구양신마와 구음신마란 놈들이란 말씀이시네.”
적후연이 부연설명을 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래! 그 개새끼들에게 쏟아 부은 돈이 얼마고 들어간 약재가 얼마인데, 그 염병할 놈들이 결국 한 짓이 그 짓이었다고!”
왕일은 주인과 수하의 관계가 돈독해 보이는 마교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다른 사파는 더 할 것이라 생각했다.
똑똑.
사마유운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는 와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비월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 온 사비월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놈들이 산 아래에 진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넓게?”
“예.”
대답을 들은 사마유운의 얼굴이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 둘 중 하나군. 우습게 보였거나, 놈들이 단체로 미쳤거나.”
한 군데 모여서 기다렸다면 일전을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마교를 우습게 생각해도 그렇지 넓게 포위한 상태로 이길 수 있다 생각했다면 완벽한 오판이었다.
“그게… 그런 것 같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두 군데를 제외하고 산을 포위한 것은 관부와 군부입니다.”
“뭐?”
이건 심각했다.
정파가 관과 군을 동원했다면 뭔가 노리는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명목은 광랑채 소탕이라고 합니다.”
광랑채에 있던 녹림은 모두 떠난 뒤였지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머리를 썼군.”
“그리고 한 곳은 모용중걸이, 다른 한 곳은 정도객 하만성이 무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대놓고 유혹하고 있었다.
어느 한 곳을 치자니 다른 곳에 있는 인물이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두 명 모두 버릴 수 없는 패였다.
“황만복은?”
“좌영호와 황만복은 하만성과 같이 있습니다.”
정파에서는 왕일을 모용중걸과 싸우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니 하만성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좌중의 시선이 왕일에게로 향했고 그 시선에는 사마유운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일의 뜻에 따라 방향을 결정하겠다는 소리였다.
“하만성에게는 저와 셋만 가겠습니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발언이었지만 사마유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사마유운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적후연과 악불군이었다.
그들은 모용중걸과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상태였다.
“남 장로님.”
왕일이 남찬우를 불렀다.
“꼭 데리고 올 필요는 없네. 자네가 마무리를 짓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네.”
왕일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남찬우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남찬우나 사마유운, 적후연과 악불군은 모두 왕일의 패배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왕일에게 조심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떠나갔다.
“자, 그럼 우리도 가볼까?”
왕일이 나서자 적우와 진승한, 막달평이 그 뒤를 따랐다.
***
“자네는 지금이라도 떠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협개 좌영호의 말에 독심 황만복이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를 살린 것이 나네. 지금의 그 아이가 있는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나?”
“그 아이가 아닐 수도 있네.”
정파도 허장천과 같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만나는 봐야 하지 않겠나? 만일 그 아이라면 그때 얻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서 잘못된 길을 걷는 것일 수도 있잖은가. 그때,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네.”
좌영호가 정사지간이라고 해도 그 마음은 본디 착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왕일이 마교에서 이름을 날리자 어쩐지 자신의 책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만일 그 아이가 맞는다면 나도 도울 수 있을 거네.”
마호성이 비록 불순한 마음으로 왕일의 곁에 머물렀지만, 그를 지키려 목숨을 던진 것만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이용해 왕일의 마음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만복이 순수한 마음에서 왕일을 만나고자 한다면, 좌영호는 왕일을 마교의 전력에서 제외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마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방주의 의도였고, 좌영호는 그것을 거부하지 못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이곳으로 오겠나?”
정파의 의도는 모용중걸과 왕일의 격돌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왕일이 모습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그 아이가 이곳으로 올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
황만복이 말을 하며 어두운 산중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드나? 난 솔직히 그 아이가 반대편으로 향하리라 보네. 어찌 되었든 마교 소속이니 교주의 명령을 들어야 하지 않겠나? 하 대협 보다는 모용 대협과 은원이 깊은 것이 사실이니 말일세.”
마교에서 따지자면 하만성은 별 가치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마교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있어서도 모용중걸에게 손색이 있었다.
정파의 기를 꺾고자 한다면 마교는 당연히 모용중걸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나저나 진짜 함정은 아닌 것인가?”
교주와 부교주를 비롯한 마교의 핵심인사들이 별다른 수행원들을 동반하지 않은 채 녹림도의 산채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수라대와 혈마교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그렇기에 백방으로 조사를 하고 혹시 몰라 관과 군의 힘까지 동원한 상태였다.
“뒤는 없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군과 관이 출동한 시점에서 기습을 하지는 못할 걸세.”
현재 혈마교나 마교는 정파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였고, 그곳에 대한 감시의 눈길은 옅어져 있었다.
그런 이유로 화영영이 혈마교에 들렸다 마교로 돌아간 것에 대해서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걸리는 것이라면 마교에서 갑자기 목재와 석재를 대량으로 구입했다는 것이지.”
사마유운이 왕일 부부의 부부싸움을 걱정해 내린 결정이 정파에 혼란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의 돌연한 외유와 마교의 대대적인 공사가 맞물려 의문을 자아내게 만든 것이다.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거든.”
말을 마친 좌영호가 모닥불에 나무를 집어던지려다 그대로 굳었고, 황만복도 벌떡 일어났다.
그들이 있는 곳과 반대편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가실 것 없습니다.”
막 몸을 날리려는 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왕일을 본 좌영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중심에서 떨어진 곳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겹겹이 둘러쳐진 경계가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일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왕일인가?”
좌영호에 비해 황만복은 무척이나 침착한 모습이었다.
비록 종이에 그려진 초상만을 봤을 뿐이지만, 붉은 눈동자와 좌중을 휘감는 위압감만으로도 왕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직 정정하시군요.”
왕일이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