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혈우마제라? 빠르게 퍼지고 있다고? 그렇다면 마교에서 수작을 부린 것이로군. 그놈들이 지어서 퍼뜨리는 거야. 그럼 그 이유가 뭘까?’
나름대로의 상상을 하면서 허장천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개미가 발버둥 쳐도 그것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가소로울 뿐이지.’
현재 중원을 감싸고 있는 기류를 사람들은 걱정스런 마음으로 바라보았지만, 허장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네놈들에게 나 허장천이 무림과 천하의 주인임을 확실하게 가르쳐주마.’
몸을 일으킨 허장천이 향한 것은 자신의 방에 연결된 비밀통로였다.
그리고 그곳은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그긍.
허장천의 손짓에 문이 열리고 드러난 것은 검은 두 개의 관이었다.
‘따르는 자는 살 것이고,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다!’
마찰음을 내면서 닫히는 철문이 허장천을 어둠속에 묻어버렸다.
***
“거기까지!”
사마유운의 말에 왕일이 내뻗던 주먹을 멈췄는데, 그 기세에 악불군의 머리카락이 폭풍에 흩날리는 버드나무가지처럼 낭창거렸다.
“허…….”
말을 잇지 못하는 악불군이 자신의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아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 손은 비어있었다. 오랜 세월 그의 벗이었던 도가 손을 벗어나 땅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내가 도를 꺼내든다면, 죽기 전에는 놓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네.”
처연한 목소리였다.
“네게 부끄러운 꼴을 보였구나.”
도를 주워들고는 쓰다듬는 악불군을 보며 사마유운이 혀를 찼다.
“그 무슨 청승인가? 그리고 도를 팽개친 일이라면 얼마 전에도 있었던 일로 기억하네만?”
“그건 정신을 잃은 것이지 않습니까!”
악불군이 강하게 반박했다.
“아니지. 내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네. 화 장로의 발이 턱을 후려갈겼을 때 도를 놓쳤었네. 그리고 화 장로의 공격이 이어졌으며, 화 장로의 주먹이 배에 틀어박혔던 당시 자네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네. 침을 질질 흘리며 살짝 화 장로를 바라보던 그 눈길을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염장을 지르고 있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좀 더 멀리 갈 수도 있고.”
말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웃는 사마유운이었는데, 젊은 시절 자신과 악불군이 했던 비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일부러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런 썅! 너 죽었어!]
사마유운의 주먹에 코피가 터지자 도를 던져버리고는, 스스로 사마유운의 검에 몸을 던지며 악착같이 사마유운의 코를 노렸던 악불군이었다.
결국 그날의 비무는 서로의 코가 뭉개지고 쌍코피가 터진 뒤에 끝이 났었다.
“어쨌거나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청승인가 말이네. 더군다나 이렇게 기쁜 날에.”
악불군의 체면이야 땅에 떨어졌겠지만, 마교 전체로 보자면 더 없는 경사였다.
“아, 자네는 이만 가보게. 나랑 교주님이랑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악불군의 말에 왕일이 사마유운을 바라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리를 숙이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런 왕일의 뒷모습을 보던 악불군이 사마유운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교주님은 아직 우리 마교에 어떤 위험이 닥쳤는지 모르고 계시는군요.”
느닷없는 악불군의 말에 사마유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공처가가 왜 공처가고, 애처가가 왜 애처간지 아십니까? 바로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청승을 떨다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하는 악불군을 바라보던 사마유운이 조심스럽게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자네, 혹시 백회라도 열었는가?”
악불군이라면 능히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한 평생 무에 미친 악불군은 온갖 무서들을 섭렵했는데, 왕일이 본 무서들 대부분이 그가 준 것들이었으니 그의 무에 대한 탐구심은 가히 끝이 없었다.
그런 악불군이 지금까지 백회를 열지 않은 것은, 불사지존을 제외한 누구도 성공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었다.
그런데 이제 왕일이라는 결과물이 눈앞에 보였으니 좀이 쑤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제가 미친놈처럼 보입니까?”
“그러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교주님이 더 걱정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고 묻지 않는가, 이 사람아!”
슬슬 짜증이 밀려오는지 사마유운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구본웅과 천정미.”
악불군의 짧은 말에 사마유운은 뭔가를 알아차린 듯 입을 딱 벌렸고, 왕일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나?”
“그때하고 지금하고 다른 게 있습니까?”
사실 거의 비슷했다.
구본웅과 천정미는 부부였는데, 부인인 천정미의 계급과 무공이 더 높았고 구본웅은 그녀의 부하였다.
금슬 좋은 부부라서 옆에서 보는 이들도 절로 웃음을 짓던 관계인 두 사람이 틀어진 것은 구본웅이 한 순간 깨달음을 얻으면서부터였다.
그동안의 관계는 모두 거짓인양 구본웅은 부부관계의 주도권을 쥐고자 천정미를 쥐 잡듯 잡았으며, 결국 견디다 못한 천정미의 울화가 폭발했다.
그 날, 마교의 한 귀퉁이가 완전히 초토화되었음은 물론이고 애꿎은 희생자까지 발생했는데, 그 사건을 종식시킨 것이 바로 사마유운의 사부였던 십절마군이었다.
두 사람의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마교에 새로운 기류가 생겼는데, 되도록 비슷한 경지의 무인들끼리는 혼인을 하지 말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시들해졌고, 감정이란 것이 누가 막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지금에 와서는 사마유운조차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만일 그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누가 막을 겁니까?”
마교가 그날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거나 아예 무너질 위험도 있었다.
지금 왕일과 화영영은 사마유운이 나선다고 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괜히 부부싸움 말리려다 개죽음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네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두고 보십시오. 왕 대주가 반기를 드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까요. 지금까지야 솔직히 화 장로의 무위에 눌려서 지낸 것뿐일 겁니다. 그러니 이제 자신의 자리를 찾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겠지요. 아니면 왜 저에게 일부러 찾아와 비무를 청했겠습니까? 지금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절차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악불군의 말대로 비무는 왕일이 청한 것이었다.
“화나지 않는가? 고작 부부싸움을 위한 실력 검증인의 노릇을 한 것이 말이네.”
어찌 보면 무시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왕 대주가 보통사람입니까?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해야지요. 다만 아까 청승을 떤 것은 어서 자리를 내주라 재촉하기에 이제 정말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맺고 끝는 것이 확실한 악불군이었고,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 찬사를 보낼망정 시기 따위는 하지 않는 대인배였다.
“그러니 이제 그만 손은 치우시지요?”
“아, 알았네.”
물론 악불군이 대인배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공의 높은 경지를 위해서는 위험도 마다않는 성격이기에 사마유운은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여차하면 진짜로 휘두를 마음도 먹고 있었다.
“안 떼실 겁니까?”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신경을 쓰…….”
콰콰쾅!
들려온 폭음에 말을 하던 사마유운의 고개가 빠른 속도로 돌려졌고, 악불군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
“아, 글쎄 말 좀 들어보라니까!”
왕일의 말에 돌아온 것은 새하얗게 빛나는 화영영의 손이었다.
“그래, 잘나신 쇄비와 무상을 했다 이거지? 그래서 그렇게 건방지게 나오는 거야? 너도 구본웅이 되어 보겠다고?”
왕일은 화영영이 말하는 구본웅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그게 누군데?”
이번엔 발이 날아왔다.
“알 것 없어! 그냥 그놈처럼 죽어주면 돼!”
화영영의 공격을 팔뚝으로 막은 왕일은 여유롭게 뒤로 날아가더니 다른 전각의 지붕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몇 번을 말해야 돼! 당신은 익힐 수 없다고!”
“왜! 왜 난 안 되는데! 넌 익혔잖아! 그까짓 불사심공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리 감추냔 말이야!”
문제는 악불군이 아니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거 어쩔 거야!”
갑자기 화영영이 앞섬을 활짝 열었는데, 그 방향이 교묘해서 왕일의 눈에만 보였지만 사방에서 당혹해 하는 음성이 들렸다.
“뭐 하는 짓이야!”
“봐! 보란 말이야! 이건 어쩔 거냐고!”
왕일의 공격에 입은 부상이었고, 가슴과 배를 길게 자르고 지나간 상처들은 흉터가 깊게 남을 것 같았다.
“어서 가리지 못해!”
후다닥 달려온 왕일이 화영영의 앞섬을 여미었다.
“왜? 부끄러운 것은 아나보지?”
‘넌 부끄러운 것도 모르냐!’
오히려 왕일이 묻고 싶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은 이상 이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유가 뭐야?’
처음엔 괜찮았었다.
다친 그녀의 상처를 닦아주고 감싸준 것도 왕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사심공을 배우겠다고 난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이걸 앙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왕일도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이게 귀여운 앙탈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심각했다.
한 번 휘두름에 집 채 만 한 바위도 으스러뜨릴 공격을 그리 여긴다면 앞으로의 결혼 생활이 험난할 것 같았다.
“나도 다시 한 번 환골탈태를 해서 이 흉터를 없애고 싶단 말이야! 흉하다고 바람피우면 어떻게 해!”
화영영의 이 말은 주위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었으며, 광랑채를 난장판으로 만든 부부싸움의 직접적인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결국 그거였군.’
가벼운 앙탈이자 자신에게 관심을 더 가져달라는 애교였다.
그것이 무척이나 살벌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알았어. 알았으니까 들어가자.”
화영영의 어깨를 감산 왕일이 멀쩡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부부싸움 거하게 하더구만.”
사마유운의 말에 화영영이 배시시 웃었다.
“싸움이라니요. 그저 제가 투정을 부린 것뿐이에요.”
“투정이라…….”
사마유운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투정이 그 정도였으니 진짜 마음먹고 싸우기라도 하면 악불군의 예상대로 마교 전체가 이사를 가야할 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운아에게 돌아가면 이런 일도 없을 테니까요.”
화영영은 장담을 하고 있었지만, 부부관계라는 게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알기에 사마유운은 마냥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그것을 내색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가? 그런데 진짜 불사심공을 배울 생각이었나?”
“제가 미쳤어요? 그런 걸 익히게? 부교주님도 익히길 거부하는 무공을요. 불사심공을 익히려면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요.”
별 이상한 말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화영영이 사마유운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게 단지 투정을 부리기 위한 말이었단 말인가?”
“예.”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화영영을 보면서 사마유운은 기가 찼다.
“교에 돌아가서 하기도 그렇고, 운이 있는데서 하기도 그렇잖아요. 마침 걸리는 게 없어서 한 번 해봤죠.”
“그렇다면 되었네. 그나저나 왕 대주의 마음은 다 풀어진 것인가?”
비록 무의식중에 말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다면 앞으로 왕일에게나 마교에 있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네. 하지만 꽁한 구석이 있으니 분명 마음속 어딘가에 앙금이 남아있겠죠. 그리고 그것을 풀어가야 하는 것은 제 몫이고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여염집 아낙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서방이 말한 것처럼 교에 틀어박혀 있을 생각이에요.”
“왕 대주가 그리 말하던가?”
“아니요. 정확히는 운이 옆에 있으란 말이었죠.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하다면서요.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만 기회다 싶어서 무공 좀 높아졌다고 날 무시하냔 말로 싸움을 걸었고요.”
“나도 화 장로가 교에 남아준다면 안심이 될 것 같네. 아무래도 비워놓는 것은 걱정이 되었거든.”
“정말 하실 생각이신가요?”
“해묵은 원한들이 좀 있지 않은가. 남 장로나 적 대주, 그리고 악 부교주도 말이네. 물론 나도 포함해서.”
정파와 은원을 가진 이들이 단지 그들 네 사람만은 아니었다.
마교 전체에 걸쳐 칠 할은 정파와 풀어야 할 숙제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하는 사마유운이나 듣는 화영영이나 이번 싸움으로 은원이 해결되기 보다는 더 많은 은원을 낳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교에는 언제 돌아갈 것인가?”
“서방이 하도 성화를 해대니 내일이라도 돌아가려고요. 그리고 운아와 함께 교로 향할 생각이에요.”
“알았네. 그럼 이만 가보겠네.”
말을 마치고 일어서려던 사마유운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싸움을 건 것인가?”
“흉터를 보면서 죄책감이라도 갖으라는 거였죠. 제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일단 나이가 있으니까 서방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도 있잖아요?”
“그게 전부인가?”
“예.”
태연하게 대답하는 화영영의 말에, 사마유운은 자신이 교주의 위에 있을 때 교주의 숙소를 교에서 좀 떨어진 외딴 곳으로 옮기리라 다짐했다.
물론 집무실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