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대, 대인… 저, 전 납치를 당한 뒤 녹림도들의 노리개가 되어 지냈던 여인입니다. 부, 부디 불쌍히 여기시어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품으로 파고들려는 아이를 뒤로 밀치고는 어떻게든 왕일의 눈에서 띄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운, 운아… 어, 어머니…….”
여인이 아이를 숨기려는 모습이 더 자극이 되었는지, 왕일이 걸음이 더 빨라졌고 여인은 필사적으로 아이를 뒤로 물리며 뒷걸음질 쳤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우는 여인과 아이를 향해가던 왕일이 걸음을 멈췄는데, 그것은 자신의 손을 보고 난 뒤였다.
“내, 내가?”
붉게 아지랑이가 그의 눈에는 피로 보였으며, 손에 든 도와 겁먹은 여인,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로 인해 마을에 참화가 벌어진 순간을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왕일 자신은 그때 마을을 습격했던 흉수의 역할이었다.
땅!
왕일의 손에서 떨어진 도가 땅에 박아 놓은 돌과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으… 으아아아악!”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왕일이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는데, 붉은 아지랑이가 천천히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 * *
광랑채는 이미 마교가 접수한 상태였다.
남아있던 이들은 모조리 내보낸 상태였다.
만일 먼저 떠난 이들이 없었다면 왕일의 행적을 숨기기 위해 죽였을 것이나 이미 많은 이들이 빠져나갔기에 산채에 있던 재물을 들고 떠나보냈다.
“죽어도 살인귀는 되지 않겠구나. 색마도 물론이고. 그러니 이놈은 진정한 사파인이 될 게다.”
사마유운은 살인귀와 색마를 제외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투의 말이었는데, 사실이 그러했다.
사기꾼이나 강도, 살인마, 난봉꾼, 도둑 등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있는 일종의 직업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화영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일어나 봐야 알겠지.”
현재 왕일은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는데, 밧줄로 마치 누에고치처럼 불룩하게 감겨있었고 물론 혈도도 꼼꼼하게 찍혀있었다.
그 꼴을 본 화영영은 혹시나 이 상태가 지소되면 왕일의 몸에 무리가 되지 않나 하는 것을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사마유운은 아무래도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억지로라도 깨워볼까요? 혈도도 그렇고 피도 제대로 안 통할 것 같은데요.”
“아, 그 얘기였나?”
사마유운이 이제야 눈치를 챘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라면 걱정 하지 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썼으니, 만약 정신을 차린다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바로 일어날 테니까.”
“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아무리 내공이 높아졌다고 해도 바로 쇄비와 무상을 시전 하다니요.”
“바로라니, 그런 말을 하면 섭하지. 내 그동안 왕 대주에게 가져다 준 무공비급이 얼마인가? 이미 준비는 갖춰져 있었다고 봐야지. 그리고 그 속에는 내 것도 살짝 끼워져 있었네.”
“교주님, 그럼 저도 섭하지요. 제 것도 있지 않았습니까?”
악불군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말을 했다.
“어허, 악 부교주. 내가 어련히 알아서 말을 할 것인데, 굳이 그리 나서야겠나?”
“예.”
악불군의 대답에 사마유운의 눈썹이 꿈틀했다.
“화 장로. 내가 평소에 왕 대주를 끔찍이 아낀 거 알고 있지? 착 달라붙어서 개인지도를 하기도 했지 않나. 아마 내 노력이 있기에 지금의 왕 대주가 있는 것이라 생각하네.”
“수련은 무슨… 내가 보기엔 화풀이던데.”
사마유운이 딴지를 걸었다.
“제가 언제 화풀이를 했다고 그러십니까! 세심하고도 정성스런 지도였지요! 달평이를 가르칠 때보다도 더 열심히 가르쳤단 말입니다!”
“어디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인가? 잘하면 치겠네 그려?”
“못 칠 것도 없지요.”
악불군이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아무리 작다고 해도 바로 지척이었기에 사마유운은 당연히 그 말을 들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나?”
“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방금 자네 주둥아리에서 뱉어진 말 말이네.”
“지금 주둥아리라고 했습니까?”
“내가 언제 그랬나?”
“방금 그러셨지 않습니까!”
교주와 부교주가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다만 한심하다는 눈빛은 보내고 있었다.
“적 대주, 적 대주도 들었지? 분명히 교주님이 주둥아리라고 하는 거 들었지?”
갑자기 자신을 끌어들이는 악불군의 말에도 적후연은 침착했다.
“못 들었습니다.”
그 말에 사마유운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남 장로, 남 장로는 분명히 들었지?”
“못 들었습니다.”
고림무원이었다.
“왜들 저러시는지 모르겠네?”
적후연을 끌어들이는 모습에 막달평과 적우, 진승한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말한 적우나 물어보는 막달평이나 모를 리가 없었다.
“너희들은 좋겠다.”
진승한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야, 걱정하지 마. 대주님이 정말 널 싫어하실 리가 없잖아.”
적우가 진승한을 위로했다.
“근데 말이다. 대주님이 깨어나신 후에도 그 같은 경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다시 그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을까?”
진승한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적우나 막달평이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실상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그러한 기술을 구사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가끔 주화입마를 당해서 그 영향으로 평소보다 훨씬 높은 경지의 무공을 펼치곤 하는데, 혈도와 몸에 무리가 가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만의 하나 제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역시 평생을 자리보전하면서 끙끙 앓다가 사람들 속만 태우다가 죽었다.
몸은 몸대로 상하고, 어떻게 그런 절기를 펼쳤는지 기억을 하지 못했기에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하던 사람들을 농락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일단 몸은 별 탈 없으시다니 정신만 차린다면 가능하지 않겠냐? 주화입마를 겪으신 것도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그게 쉽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교주님께서 하시는 행동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잖아?”
“뭐가?”
“대주님께서 전인미답의 경지를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은 것 같아서.”
사마유운의 행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단지 한 사람의 고수, 물론 그 고수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고수라고 해도 사마유운은 마교의 교주라는 자각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너무 왕일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뭐 아는 거 있냐?”
막달평이 적우를 보며 물었다.
“부교주님의 제자가 모르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
“제자는 무슨… 아까 봤잖아. 나 버림받았다.”
“농담은 그만하고, 아마 내 생각엔 교주님이 답답하신 모양이다.”
남찬우의 말에 두 사람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답답하시다니?”
“교주님의 별호가 뭐냐?”
무혈검이었다.
교주의 위에 오르기까지 피가 마를 날이 없다 해서 붙여진 별호였고, 그만큼 사마유운은 격정적인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적우나 막달평이 모를 리 없었기에 남찬우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런 분이 지금까지 얼마나 답답하게 사셨냐? 아마 검을 든 시간보다 붓을 든 시간이 더 많을 걸? 사실 부교주님을 내보내 혈마교를 세운 이면에는 이참에 한 번 죽이 되던, 밥이 되든 붙어볼 생각이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대주님이 나타났잖아. 거기다 언제나 그분의 마음속에 커다란 바윗덩어리로 존재했던 화 장로님의 상세까지 치유 되셨으니 아무런 걸림돌이 없게 되신 거지.”
“그럼 네 말은 서둘러 대주님께 교주의 위를 넘길 수도 있다는 말이냐?”
사마유운이 작심을 하고 악불군이 묵인하며 남찬우와 적후연이 거들면 당연히 가능했다.
일반 교도들이야 교주인 사마유운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魔)를 신봉하며 마교에 충성하는 것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래. 그리고 알게 되겠지. 어째서 교주님의 별호가 무혈검인지를…….”
지금 중원은 사마유운의 존재에 대해서 거의 잊고 지내는 형편이었다.
공식적으로 모습을 보인 것이 얼마 전 백독문과의 싸움에서가 전부였고, 그것도 아는 사람이 극히 적어 나왔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대주님 때문에 교의 모든 계획이 변하는구나. 행보 하나하나에 교주님 이하 모든 교도들이 휩쓸려가는 것 같아.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태풍이랄까?”
“그런 분이니 뭔가 그럴듯한 별호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 나중에 무림에 출도해서 정파 떨거지들이 짓기 전에 말이다. 교주님도 교에서 지어준 별호잖아.”
막달평과 진승한의 말을 듣던 적우는 그때의 왕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핏빛 비가 내린 대지에 서있는 야차와 같았지.’
“혈우마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적우를 막달평과 진승한 두 사람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혈우마제? 좋은데? 뭔가 있어 보이고, 마제라고 했으니 마를 숭상하는 우리 교와 사파들의 우두머리 같고 말이다. 어때?”
막달평이 진승한을 보며 물었다.
“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지금 시류를 보면 한바탕 큰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 아주 어울리는 별호야. 대주님이 멀쩡하게 일어나시면 교도들을 시켜 중원에 소문을 퍼뜨려야겠어.”
***
“죽이지 못했다고?”
허장천의 질문에 허진영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예.”
“그놈이 그토록 무공이 뛰어났던가? 비록 자질이 떨어져 그 효능을 제대로 이끌어 낼 수 없고 유지시간이 짧다고는 하지만, 광마단을 복용한 놈들 여덟이서 그놈 하나를 죽이지 못했단 말이냐?”
“그 주위에서 마교의 교주와 부교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들이 어떤 수작을 부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하냐?”
되묻고 있었지만, 이미 허장천이 그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허진영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인데…….’
자신이 중간에 왕일을 생포하라고 명을 바꾼 것이 탄로 나지는 않았는지가 걱정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계획이 실패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조사한 바로는 그들은 싸움이 끝나고 도착을 했다고 한다.”
‘칫! 역시 알고 있었어.’
허진영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왕일을 상대한 이들의 부적절한 대응도 알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죽이는 것과 생포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고, 그들은 백회를 연 것과 광마단에 의한 부작용으로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 융통성이 떨어졌다.
개중 그나마 나은 놈을 대장으로 만들었지만, 거기서 거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일은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럼 그놈이 어떤 조화를 부린 모양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불가능하다는 것들을 몸에 지닌 놈이니까요.”
“하긴, 그놈이 요상한 재주는 많이 가지고 있지. 뇌기라던가 불사심공이라던가 말이다. 어쨌거나 그놈 주위에 마교의 교주와 다른 떨거지들이 같이 붙어 다닌다는 것을 확인 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구나.”
그게 왜 목적이 될 수 있는지를 허진영은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그가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허장천은 그를 빨리 내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놈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쩌면 사마유운의 숨겨둔 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일에 대해서는 그 출생부터 철저하게 파악을 끝낸 상태였다.
“물론 그놈의 어린시절을 우리가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 수는 없지 않느냐? 그놈들이 잠적한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변해서 나왔지. 어떻게 보느냐?”
가능성이 있었다.
왕일과 석휘명은 일정기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왕일의 경우에는 패진무관에 있을 때와 다시 모습을 보였을 때, 너무도 많은 육체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를 노리고 바꿔치기를 했다면 석휘명 그놈이 마교에 들어간 것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던 석휘명이 마교에 들어간 것이나, 왕일과 석휘명이 쳐들어간 문파에 남찬우가 있었던 것이며 그들을 살려둔 것도 모든 것들이 맞아떨어졌다.
“그럼 그 당시부터 석휘명이 마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면, 왕일에 대한 소문이 모두 날조되었다는 것입니까?”
허진영은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왕일이란 놈의 소문을 모두 종합해 보거라. 너무도 허황되지 않느냐? 불사심공에 뇌기?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냔 말이다. 차라리 뇌기만 익혔다고 했을 때는 믿어줄 수 있었지만, 불사심공까지 언급을 하니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구나.”
이는 정파의 대부분에서 가지는 의심이자 태도였는데, 마교가 되지도 않을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뇌기까지는 이미 강시를 통해 나타난 결과가 있으니 어찌어찌 믿어줬었지만, 불사심공이란 말이 나오니 뇌기까지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에 어떤 수작질을 부려서 왕일이 뇌기를 익힌 것이라 믿게 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왕일이란 놈의 뒤를 더욱 철저하게 캐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찾기 전에는 이곳에 오지 말도록 해라.”
“예.”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허진영의 뒤통수를 허장천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놈! 분명 네가 무슨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제 이, 제 삼의 감시를 붙여 놓고 관찰을 한 허장천이었다.
비록 마지막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광마단을 복용한 이들이 치명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싸움을 감시하던 이가 그런 내용의 전서를 보내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뒤늦게 합류한 사마유운 때문인지, 아니면 허진영이 수작을 부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분수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허씨 집안의 대를 이은 시점에서 허진영과 허혜령의 역할은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허진영을 살려둔 것은 허혜령이 허진영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이유뿐이었다.
그래도 자식인지라 차마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장주님, 비일호입니다.
은밀한 전음이 허장천의 귀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