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칼에 담긴 경력이 상대에 닿자마자 옷이 부서지고, 살이 터지고, 뼈가 잘게 조각났다.
칼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신체의 일부분이 사라진 시신과 허공에 흩날리는 붉은 운무뿐이었다.
적을 죽인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적을 죽인 후에도 여전히 휘둘러지는 도였는데, 그곳에 진승한이 등을 보인 상태로 적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쾅!
도에 무형시가 맞은 것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진승한이 적을 죽이기 위해 땅을 박찬 것이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폭음과 함께 왕일의 도는 그 진행을 멈췄고, 진승한을 죽일 뻔한 사건은 그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왜? 왜? 왜!’
육체는 왕일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솟아 오른 살기는 자신의 도를 막은 적우를 향해 그 방향을 선회하고 있었다.
펑!
“아악!”
평범한 찌르기였다.
자신의 배후에서 검을 내리찍어 오던 상대의 복부를 도로 찌른 것뿐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가슴과 허리만 남았을 뿐, 복부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왕일의 도에 맞은 순간 화려한 폭발과 함께 뒤쪽으로 붉은 비를 뿌리며 흩어졌던 것이다.
잔인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보며 왕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적우에게 향했던 살기가 다시 적들에게로 돌려졌기 때문이었다.
“달평! 승한! 뒤로 물러나라! 대주님과 떨어져!”
멀리서 지켜보던 적우가 소리쳤다.
아무래도 전장에서 떨어져 관찰하는 입장이었기에 왕일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잘했다.’
막달평과 진승한이 땅을 박차고 사라진 자리엔 적들뿐이었고, 그들이 손에 무기를 앞세우고 왕일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왕일은 현재 육체에 대한 통제권을 완벽히 빼앗긴 상태에서 오로지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힘은 넘치지만,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
부상을 입지 않아도 될 공격에 부상을 당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부상이 빠르게 치유가 되고 있기에 피를 많이 흘린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찌르고, 베고, 차고, 막고, 부딪치는군.’
철저한 기본기로 적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움직임이 짧고 간결하다는 것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만 하지만 적의 화려한 변초에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옷은 이미 누더기가 되었고 몸 또한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상단전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데?’
단전이라 생각될 정도의 크기를 가진 공간이 머리에 있긴 했다.
그러나 하단전, 중단전과 비교했을 때 그 크기가 너무도 작았다.
‘이게 상단전인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상단전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 있는 것이 거의 없으니, 작긴 해도 상단전이 맞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왜 이렇게 갑자기?’
줄곧 ‘왜?’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들어찼지만, 딱히 떠오르는 해답은 없었다.
‘석조운이란 놈도 이런 상태였을까?’
백회를 이용한 무공을 익힌 후에, 가솔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시체들의 산에서 심장을 씹어
먹었다는 석휘명의 조상인 석조운이, 만일 지금 왕일과 같은 상태였다면 그때 살아났다고 해도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슬슬 걱정이 되는 걸?’
백여 명에 달하던 적들은 어느새 이십여 명으로 줄어있었는데, 적이 줄어들어가는 것이 결코 반갑지 않은 왕일이었다.
육체의 통제권이 없는 상태였기에 적이 사라지면 동료를 공격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군.’
정신을 가득 채웠던 살기는 이미 갈무리가 된 상태였지만, 육체는 살기로 둘러싸여 그것만으로도 작은 곤충들은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볼까?’
처음 몇 번의 시도 후에 왕일은 육체의 주도권을 쥐려는 것을 포기하고 방관자가 되어 지금까지 지켜보기만 했었다.
엄밀히 따지면 살기로 둘러싸인 육체를 다시 찾는 것이 더 어려울 것 같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희망을 품기로 했다.
마치 목소리 자체가 육체로 스며들어 살기로 화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부에 있다면 몰라도 외부로 나갔다면 해볼 만 하지.’
순간 왕일의 신형이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위에서 찍어 오던 적을 향해 도를 내뻗었다.
펑!
마지막 적의 몸이 터졌을 때 왕일은 이제 어떻게든 싸움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육체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움직이려는 참이었다.
적도 없으니 살기가 누그러들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퍽!
“컥!”
옆구리에 강력한 타격이 가해졌다.
갈비뼈가 모두 으스러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고, 그 충격으로 몸이 완전히 옆으로 접혀질 정도였다.
빡!
순간 뒤통수를 때리는 뭔가가 있었는데, 아예 머리를 부술 작정을 하고 내리친 것 같았다.
그리고 뒤이어 오른 손목을 강타하는 충격으로 도를 놓치고 말았다.
“잘 했어! 이제 죽여!”
분명 적우의 목소리였다.
“진짜 죽여?”
진승한의 목소리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들뜬 것 같았다.
“미쳤냐? 죽일 각오로 패란 소리다!”
적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먹과 발이 날아왔는데, 충격이 가해지는 부위에 닿는 크기로 보아 막달평의 두툼한 손과 발이 분명했다.
“사정 봐주지 마! 대주님의 치유력이 발동했으니까 어지간해서는 안 죽어!”
진승한의 주먹은 그의 검법처럼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웠고 매서웠다.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에 반해 막달평은 하나하나가 묵직한 공격이었으며 한 대 맞을 때마다 왕일의 몸은 이리저리 뒤틀리고 꺾였다.
“자리 잡아!”
적우의 목소리가 들린 후 왕일의 정수리를 적우의 발이 찍어버렸고, 순간 왕일은 완벽한 적막에 휩싸였다.
누군가가 팔다리를 요상한 각도로 꺾으며 뭔가로 칭칭 동여매는 감각을 느끼는 왕일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화영영의 비웃음이었다.
[여길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긴 마교야. 중원 사파의 우두머리라고. 교주님만 해도 아직 나는 넘볼 수 없는 경지야. 솔직히 서방이 아무리 돈다고 해도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일걸? 철심문따위에서 일어난 일이 이곳에서 재현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그 말이 맞아.’
솔직히 중단전을 가진 왕일은 적우나 막달평, 진승한을 우습게 본 것이 사실이었다.
지위만 높은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도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몇 번의 싸움에서 드러난 그들의 실력을 바탕으로 평가한 것이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오판이 분명했다.
‘바보…….’
스스로를 자책하며 왕일은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
“야, 탄다. 빨리 좀 돌려.”
“내가 왜 계속 돌리는데? 이젠 네가 좀 돌려도 되잖아.”
“거, 어린놈이 말 많네. 형님이 시키면 고분고분 할 것이지.”
“나이 처먹은 게 벼슬이냐?”
“말 다 했냐?”
“다 못했다! 아까도 나보고 사냥하라고 해서 군말 없이 해왔더니 씻는 것도 시키고, 불 지피는 것도 시키고, 손질까지 시키더니 이제는 굽는 것까지 시켜? 그럴 거면 애초에 왜 편하게 지내자고 한 건데?”
“아무리 편하게 지내도 기본이라는 게 있잖아. 너랑 나랑 나이차이가 몇이냐?”
“그러니까 이럴 거면 왜…….”
“이제 그만들 하지, 막 조장, 진 조장.”
“너는 닥쳐!”
“너는 빠져!”
진승한과 막달평이 한 목소리로 적우를 몰아세웠는데, 이는 이유가 있었다.
적우가 부대주란 직위를 내세워 막달평에게 음식과 쉴 곳을 마련하라했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뭐?”
적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간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이는 그간 묵어있던 감정들이 드러난 탓이었다.
비슷한 연령에 비슷한 위치에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성장하던 세 사람이 왕일이라는 중심점으로 뭉치는 과정에서 나이와 무공, 직위가 곁들이며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억지로 조성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아래라 생각하며 우위에 서려하는 입장이었다.
“시, 시끄러.”
세 사람의 긴장된 분위기는 왕일의 작고 조용한 목소리에 끝이 났다.
“대주님, 괜찮으십니까?”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은 적우였다.
거리상 가까운 것도 이유가 있었지만, 진승한이나 막달평보다 경공이 뛰어난 덕분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대주님께서 정신을 잃고 폭주하는 것을 막 조장과 진 조장이 무식하게 두들겨 팼습니다. 그렇게 제압당한 대주님을 제가 묶어 놓은 것이지요.”
진승한과 막달평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어렸다.
“대체 어떻게 묶었기에 옴짝달싹 못하는 거야?”
현재 왕일은 둥그런 공과 같았다.
등에 바위를 대고 팔과 다리가 뒤로 꺾인 상태였으며, 주요 혈들은 밧줄을 매듭지어 막아 내공을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포박법입니다. 한 번 묶이면 절대 풀지 못하지요. 하지만 상대의 내력을 억지로 봉하지 않기에 몸에는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적우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사이에 막달평이 다가오더니 왕일을 묶고 있던 밧줄들을 끊어버렸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고마워, 막 조장.”
막달평의 어깨를 두들겨 준 왕일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이리저리 몸을 휘둘리며 뻐근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우두둑! 우두둑!
부러진 곳은 없는지 움직일 때 통증은 없었지만, 여간 굳어있는게 아니었다.
“대주님, 이걸로 갈아입으시지요.”
막달평이 옷을 내밀었는데, 아마도 자신의 옷 같았다.
왕일은 여분의 옷을 준비하지 않았었으니까.
“얼마나 지났어?”
“여섯 시진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이미 해가 모습을 드러낸 후였다.
어제 싸움이 미시 초에 시작이 되었으니 막달평의 말마따나 여섯 시진 정도가 지났을 것이었다.
“대주님, 시장하실 텐데 좀 드시죠. 제가 잡아서, 제가 씻고, 제가 손질한 다음에, 제가 타지 않게 구웠습니다.”
진승한이 멧돼지의 넓적다리를 뜯어와 왕일에게 건넸다.
“그보다 물 좀 먼저 먹고 싶은데.”
“그럴 줄 알고 여기 준비해 놨습니다. 이것도 제가 떠온 겁니다.”
진승한이 다른 쪽 손을 내밀었는데, 그곳에는 죽통이 하나 들려 있었다.
“후우~ 이제 살겠네.”
물을 마신 왕일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죽통을 다시 진승한에게 돌려줬다.
그리고는 멧돼지 고기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대주님,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불가에서 운기를 하시면 더 나으실 겁니다.”
적우가 불 옆의 땅을 고르며 왕일을 불렀다.
“알았어. 근데 적 부대주.”
“예.”
“죽이란 말은 좀 심했잖아?”
“알고 계셨습니까?”
“정신은 말짱했어. 다만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을 뿐이지.”
이 말을 들은 적우를 비롯한 이들의 눈이 반짝였는데, 왕일의 변화에 대한 정보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눈빛 좀 거둬.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일단 몸부터 추스를 테니까.”
“알겠습니다.”
왕일이 운기를 하는 사이, 세 사람은 서로가 방위를 점한 후 외부를 향해서 매서운 눈빛을 내뿜었다.
지금은 농담이나 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 왕일을 보호해야 할 때였고, 자신들의 책무를 망각할 정도로 세 사람은 어리석은 이들이 아니었다.
***
‘벌써?’
분명히 적우는 내력의 움직임을 봉쇄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뒷받침하듯 왕일은 깨어났을 때 내력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스스로 밧줄을 끊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왕일은 하단전을 비롯해 중단전과 상단전까지 모두 가득 들어차 있는 내력을 느낄 수 있었다.
따로 운공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일이야?’
너무도 급격한 변화에 왕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과 더불어 발작을 일으켰다 제정신을 찾은 이유도 알아야 했다.
‘응?’
운공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왕일은 운공을 끝내야 했는데, 외부에서 몰려오는 살기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쉬지도 못하게 하는군.”
왕일이 눈을 뜨자 그를 지키던 세 명이 한 일은 불에서 타고 있는 멧돼지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우적우적 씹어대며 뼈까지 먹어댈 것 같은 기세로 멧돼지구이를 습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