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이런 어설픈 놈들을 보내는 곳이 어딜까?’
현재 마교에 대항할 세력들 중에서 사파가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들은 모두 정파소속이라고 봐야 할 텐데, 마치 살수처럼 암습을 통한 공격을 하고 있었다.
“추풍낙엽 진승한의 검은 역시 무섭구나!”
갑자기 들린 소리에 진승한의 고개가 돌아갔는데, 그의 눈에 눈을 찡긋하는 왕일의 모습이 보였다.
“그게 뭡니까?”
진승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천궁수라는 거창한 별호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별호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추풍낙엽이라니?
왕일이 소리를 질렀으니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 말을 윗선에 보고할 것이고, 그것이 퍼진다면 별호로 굳어질 가능성이 컸다.
“정한검 남찬우 장로님의 애제자답게 추풍낙엽 진승한의 검은 날카롭구나!”
이번 외침은 곰 같은 덩치를 가진 막달평의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진승한의 별호를 추풍낙엽으로 고정시키는 것에 한 몫 할 것이었다.
“빌어먹을!”
자신의 별호를 크게 외친 막달평을 노려보는 진승한은, 어째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소리가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나만 당할 것 같으냐?’
진승한의 외모는 약간 가냘프게 보일 정도로 마른 몸집이었다.
거기에 갸름한 얼굴선을 가지고 있어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와 어울려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긴 했다.
그러나 진승한은 그런 외모가 싫었기에 더욱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었고, 사람들을 대할 때도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였는데,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그러니 거기에 일조를 한 막달평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만돈(慢豚) 막달평이 별호처럼 게으른 돼지가 아니라는 것을 오늘 확실히 보여주는 구나!”
막 적의 몸을 양분하던 막달평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우리 중 누구보다 많은 적을 물리쳤으니, 만돈이 아니라 재빠른 돼지라는 민돈(敏豚)이라 불려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옛것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으니 민만돈이라 부르면 되겠다!”
막달평이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왕일의 추임새가 바로 이어졌다.
“민만돈 막달평의 도는 태산을 가르는구나!”
사부인 악불군에게 배웠기에 막달평의 도 또한 중도였다.
무겁게 상대를 압박하고, 마지막에도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중도는 악불군보다 막달평에게 더 잘 어울렸고, 그것은 사부인 악불군도 인정하는 바였다.
“두고 보자!”
막달평은 시누이처럼 끼어든 왕일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의 출발점인 진승한에게 이를 갈았다.
‘어떤 내력을 가진 칼일까?’
적의 목을 자른 후 왕일은 자신의 손에 들린 칼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의문을 느꼈다.
처음엔 밧줄도 자르지 못할 정도로 뭉툭한 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사람의 살과 뼈를 매끈하게 잘라버릴 만큼 예리하게 변해있었다.
“뭐하십니까?”
적우가 검에 묻은 피를 털며 다가왔다.
“이놈이 어떤 놈인지 궁금해서.”
“그건 교에서도 못…….”
무심코 대답하던 적우가 입을 다물었다.
“뭐?”
처음 듣는 얘기였다. 마교에서 도를 빌려달란 적도 없었고, 그것을 연구했단 말도 없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적우가 막달평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교주님께서 그 도에 흥미를 느끼셨거든요. 그래서 몰래 가져다 연구를 했었지요.”
악불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나한테 말을 해도 줬을 텐데, 왜 몰래 가져가셨지?”
“막 조장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막 조장의 분석에 의하면 대주님의 성격으로 볼 때, 도에 흥미를 보이면 빼앗길 것이란 생각에 일부러 버릴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호오~ 그래? 날 도대체 어떻게 봤기에 그런 결론을 내렸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도대체 대주님을 어떻게 봤기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군요.”
진승한이 은근슬쩍 왕일의 옆으로 오며 말을 건넸고 적우와 왕일, 심지어는 막달평까지도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시선이 몰리자 진승한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물었다.
“진 조장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영 안 됐구먼.”
왕일이 말을 하며 한 걸음 내딛자 어느새 그는 막달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저도 진 조장을 평소 의리가 있고 듬직하다 생각했는데, 이리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적우가 왕일의 옆에 서며 말했다.
이리되니 진승한의 꼴만 우습게 되어 버렸다.
창피한 것을 무릅쓰고 옳다구나 하면서 막달평을 성토하는 척 하며 왕일과 적우의 틈에 끼‘진짜 꽁한 놈일세.’
왕일을 한 번 씹은 진승한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거기다 저것들은 왜 저 지랄들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막달평과 적우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고 지낸 세월만 따져도 왕일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가끔 술도 먹는 사이였었다.
그런데 이건 완전히 원수 대하듯 하고 있는 것이다
“적 부교주, 막 조장. 한 가지만 물어보자. 대체 왜 그래?”
“뭘?”
“나한테 왜 그러냐고.”
하도 답답해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너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우린 그저 대주님께 줄을 댄 것뿐이지.”
“그래도 너무 하잖아.”
“뭐가 너무해? 차기 교주님께 이 정도면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적우의 말에 진승한은 충격을 받았다.
‘차기 교주라고?’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막달평을 볼 때, 그도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문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왕일이었다.
“어? 대주님, 모르셨어요?”
막달평의 물음에 왕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화 장로님께서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왕일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주위에서 벌어진 일에 황당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것이 좋은 일이었기에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마교의 교주라는 것은 단순히 좋아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주님, 그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놈들이 이번엔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으니까요.”
적우의 말에 앞을 바라보니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우리를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죽으라고 보낸 것 같은데요?”
막달평의 말마따나 일행을 습격하는 이들의 실력을 따져보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 죽여주면 되잖아.”
왕일이 도를 들고는 땅을 박찼다.
“하긴, 그렇군.”
왕일의 말처럼 죽고 싶어 하는 것들은 죽여주면 그만이었다.
그 말을 들은 막달평은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생각이 많아졌는지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골방샌님 다됐군. 너나 나나 말이다. 목숨 걸고 싸워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잖냐?”
“갑자기 웬 친한 척?”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막달평에게 진승한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그만 노닥거려. 이만하면 됐잖아. 우리를 대주님과 같이 보낸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면 진짜 멍청한 거니, 멍청한 놈 되기 싫으면 여기에서 끝내.”
적우가 무형시를 날리며 핀잔을 줬다.
같은 마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데면데면 했던 세 사람이었는데, 단 며칠 사이에 많이 친밀해진 상황이었다.
“지금과 같은 가식이 아닌, 생과 사를 오가면서 우리만의 유대감을 쌓으라는 어르신들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여정이라면 결코 만만치 않을 테니까.”
“가식?”
되묻는 진승한의 얼굴에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몰랐던 거야?”
이미 왕일은 적을 맞아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막달평이 그런 왕일을 타고 넘으며 도기를 휘날리는 중이었다.
그러니 지금 한가하게 말을 나눌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진승한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 친분을 쌓는데 나를 이용했단 말이야?”
그동안 자신을 따돌리고 두 사람이 작당을 한 이유가 분위기를 띄우고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말에 진승한은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하긴 어떤 이유에서라도 이용당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알고 장단 맞춰주는 줄 알았는데.”
피잉!
적우의 시위가 기분 좋은 울음을 토했고, 순간 왕일의 뒤로 접근하려던 적의 머리가 터졌다.
“난 몰랐어!”
진승한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래?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
“당연한 거 아니냐? 너 같으면 기분 좋겠냐고!”
진승한이 계속 언성을 높이자 적우의 얼굴에 짜증이 깃들었다.
“속이지 말아야 했다?”
말을 마친 적우가 활을 내리더니 진승한의 얼굴을 직시했다.
“좋아. 잘 들어. 이제부터 너와 난 사무적인 관계다. 그러니 앞으로는 부대주에 맞는 예의를 갖추기 바란다. 그리고 또한 나이로도 내가 위니까 혹시라도 친해질 기회가 있다면 형님이라고 불러라. 반말 따위를 지껄이면 하극상으로 다스릴 테니까. 알아들었냐?”
왕일이 가장 어렸지만 일단은 상관이었으니 예외로 한다면 막달평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 진승한이 막내였다.
“내 연기 어땠어?”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기나 해!”
어둠을 벗 삼아 달려오는 적들의 수가 백여 명은 되어 보였다.
아무리 실력에 차이가 있더라도 눈먼 검에 맞을 수 있으니 싸움을 빨리 끝내는 것이 좋았다.
‘결국 오지 않을 셈인가?’
무형시를 시위에 걸며 적우가 흘깃 삼십여 장 쯤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움직임이 있었는데…….’
한두 명의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너무도 은밀해 운이 좋아 발견한 것뿐이지 자칫 모를 뻔 했었다.
‘이놈들 대가리가 분명해.’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놈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막달평과 웃기지도 않은 연극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왕일이 차기 교주라는 말도 그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전음이 아닌 육성으로 말을 한 것이었고.
‘어떻게 나오려나?’
적우는 적들이 왕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궁금했다.
‘그나저나 사람이 너무 달라지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풀어진 얼굴이었던 왕일은 어느새 야차가 되어 적들을 휩쓸고 있었다.
***
[죽여!]
십여 명의 적을 죽였을 때, 왕일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강한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왜? 어째서 지금?’
운공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나오지 않던 목소리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목소리가 갑자기 존재를 드러내더니 적을 죽이라 종용하고 있었다.
‘네가 재촉하지 않아도 어차피 죽일 거다.’
왕일도 적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죽여!]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대답을 하는 대신에 강한 외침을 발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겨있는 살기가 어찌나 진한지 순간 왕일의 손에 힘이 들어가 살짝 찌르고 물러나려던 계획이 틀어지며 적의 심장에 손이 닿을 정도로 깊숙이 찔러 넣고 말았다.
‘뭐야?’
이건 낭비였다. 힘의 강약과 속도를 조절하여 효율적으로 적들을 제압해야 다음에 있을 싸움을 대비할 수 있었다.
[죽여!]
세 번째 음성이 들려왔을 때, 왕일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모든 공격에 가득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단지 음성 때문에 이런 일이?’
의아해 할 시간도 없었다.
상대를 완전히 반으로 갈라버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힘이 강해 도가 땅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노리고 우측에서 적의 검이 관자놀이를 향해 쏘아졌다.
“대주님!”
막달평의 목소리가 들릴 때는 이미 검을 찌르던 적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진 후였다.
적우가 무형시를 날려 적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왕일이 위기는 아니었다.
땅에 박혔던 도를 그대로 들어 올려 뭉툭한 칼등으로 상대의 사타구니부터 목까지 정확하게 반으로 잘라버렸다.
“괜찮으…….”
말을 하던 막달평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는데, 왕일의 두 눈이 횃불처럼 타오르며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어서였다.
상대의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살기를 흘리는 왕일의 모습은 진정 지옥에서 뛰쳐나온 야차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죽여!]
몇 번째인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왕일의 머릿속에서는 그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딱히 대상도 없었다.
단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죽이라 말하고 있었고, 왕일은 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조금씩 가슴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왕일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쾅!
머릿속에서 천둥이 쳤다.
단전이 열릴 때와 중단전이 생길 때와 같은 충격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상단전이?’
그런 물음이 들었으나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단 충격의 강도도 다른 때보다 약했고, 단전이라고 보기에는 머릿속에 자리한 ‘그것’의 크기도 작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왕일이 그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한 것은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이 주된 원인이었다.
‘안 돼!’
휭!
손에 들린 도가 횡으로 그어지며 그 자리에 있던 적을 잘라버렸다.
아니, 터뜨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