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각개격파를 노리는 모양일세. 아무래도 교주님이 계신 곳보다는 우리가 만만하겠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단 말입니까?”
“그러네.”
아무리 주력이네 어쩌네 했어도 지금 있는 인원으로 소림 등의 연합세력과 마주하기에는 무리였다.
“다시 혈마교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꼴사나운 짓은 하지 않을 거네.”
“하지만…….”
“그만! 이제부터 자네는 자네대로 움직이게. 싸움은 우리가 하지.”
“예?”
“아까도 말했지? 힘이 있으면 쓰는 것이 사파인이라고 말이네. 이제부터 그 힘을 어떻게 쓰는지, 사파인의 싸움이 무엇인지 자네는 알게 될 거네. 물론 자네도 그 중심에 서게 되겠지.”
“그러나…….”
“떠나게.”
어느새 준비를 마쳤는지 적우와 막달평, 진승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갔나?”
“갔습니다.”
악불군의 앞에는 남찬우와 잠영대주가 서있었다.
“어디로 갈 것 같은가?”
“비룡장이 아니겠습니까? 직접적인 원수이고 패진무관을 공격하면 천선부도 싸움에 끌어들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남찬우의 말에 악불군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아이들에게 일체 끼어들지 말라고 했으니, 왕 대주의 성격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라 봅니다.”
“멍청하진 않지만, 아직까지 너무 순진하지.”
“예. 모용세가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해서 그대로 믿어버리다니,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그래서 가장 사파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거 아닌가? 우리 같은 악당이 아니라 말일세.”
악불군이 호탕하게 웃으며 잠영대주를 바라보았다.
“어디 놈들이던가?”
“밝혀내진 못했지만, 모용세가쪽에서 출발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천선부에서 수작을 부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예.”
지독한 고문을 버틸 정도로 충심이 강한 놈이 곧이곧대로 자신의 소속을 밝힐 리 없단 생각에서 출발한 의심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상대가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멍청한 놈이나 하는 짓을 테니까.
“교주님께서는 뭐라 하시던가?”
“이번 기회에 소림 등을 침묵시키고 천선부와 우리의 맞대결로 상황을 몰기로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문제는 놈들이 싸움의 막바지에 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걸 막기 위해 왕 대주를 내보낸 것 아닌가?”
“맞습니다.”
왕일 한 명으로 천선부의 걸음을 늦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악불군이나 동의하는 잠영대주의 속내나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소림도 많이 약해졌어. 정면대결을 피하고 꼼수나 부리려고 하다니 말이야.”
“천선부에 밀리며 잃어버린 입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소기의 성과라도 거둬서 민심을 얻으려는 속셈이겠지요. 거기다 힘을 남겨 천선부도 상대해야 하니 말입니다. 여러모로 복잡할 것입니다.”
예전의 소림 같았으면 절대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혈마교로 향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피해는 있을 지라도 어쩌면 마교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도 있었고, 잘하면 사마유운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혈마교와 마교는 달랐으니까.
그러나 중간에 행보를 바꾸면서 그 기회는 사실상 없어졌다고 봐야했다.
“운아는?”
“이미 마교로 보내졌습니다.”
싸움을 앞두고 왕운을 그곳에 남겨둘 정도로 화영영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자신이 빠질 정도로 얍삽하지도 않았다.
“자, 그럼 우리도 출발하도록 하지.”
“뭘 배우게 될까요?”
악불군이 몸을 일으키자 남찬우가 왕일이 떠난 방향을 보며 물었다.
“배우긴 뭘 배우겠나?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긴 그렇군요.”
***
“뭐라고 말 좀 하지?”
왕일이 면전에 들이대고 말하자 진승한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아무 말도 안하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너는?”
왕일의 고개가 적우에게로 향했다.
“모용세가의 이름만 듣고도 발작을 일으키더니, 그냥 순순히 나를 따라와? 그래 놓고는 앞으로의 행보는 무조건 내 말에 따른다고?”
“예.”
왕일은 답답했다.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무작정 왕일이 발걸음을 옮기는 대로 쫓아다니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저에겐 왜 안 물어보시는데요?”
막달평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좋아. 어디로 가고 싶어?”
“그거야 대주님이 가고 싶은 곳이지요.”
혹시나 하고 물어본 왕일이 바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하고 싶은 일은?”
“저도 적 부대주처럼 멋들어진 별호 하나 갖고 싶습니다.”
적우는 제천궁수란 별호로 중원에 널리 퍼진 상황이었다.
“그것뿐이야?”
“뭐, 굳이 따지자면 한 가지 더 있지요.”
“뭔데?”
“살아서 돌아가는 것 말입니다.”
확실히 왕일을 비롯한 일행들은 좋은 먹잇감임이 분명했다.
악불군이 있는 곳에도 살수를 보낼 정도의 놈들이 이렇듯 따로 떨어진 이들을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것이니까.
“그거냐?”
“네?”
왕일의 물음에 적우가 무슨 뜻이냐는 듯 반문했다.
“죽으라고 보낸 거냐고.”
“그럼 우리들을 딸려 보냈겠습니까? 대주님 혼자 보내지요.”
적우의 말마따나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왕일을 제외하고 모두 마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제자들이었다.
왕일을 죽이기 위해 함께 보내기엔 무리가 있는 조합인 것이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좋아. 부교주님이 하신 말씀을 따르기로 하지.”
우두둑.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면서 왕일이 진승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왜, 왜 접니까?”
진승한이 뒷걸음질을 치면서 따졌다.
그리고 눈길로 적우와 막달평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두 사람은 그 눈길을 외면했다.
“잘 알면서 왜 물어. 적 부대주는 나랑 가장 친하고, 막 조장은 부교주님의 제자이니 나중에 후환이 두려워서 그러지.”
대놓고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진승한이 뒤로 뻗은 다리에 힘을 주면서 왕일을 노려보았다.
“어쭈? 항명이야? 반항이야? 지금 하극상을 하겠다는 거야? 적 부대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직위로 찍어 누르는 왕일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죽이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그렇단 말이지?”
왕일이 한 발, 한 발 진승한을 향해 다가갈 때, 옆에서는 막달평이 그런 왕일을 응원하고 있었다.
“이겨라! 이겨라!”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평화로운 한 때였고, 네 사람의 유대가 조금 더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 * * *
“부교주님께서는 대주님께 어떠한 조언도, 정보도 드리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왜?”
“대주님께서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이게 되면 적들도 그것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냥 제멋대로 행동하라고? 그러다 교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면 어떻게 하라고? 교의 계획이 나 때문에 틀어질 수도 있잖아.”
서로 공조하는 것이 지금과 같은 전시 상황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주님과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의 눈을 돌려놓는 역할 외에는 말입니다.”
“지금처럼?”
“예.”
현재 왕일 등은 작은 산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였다.
“그나저나 저것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왕일 등을 포위한 이들은 벌써 한나절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결코 십 장 이내로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를 따라다니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것을 파악하는 중이겠죠. 설마 지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끼리 돌아다니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테니까요.”
“적도 생각지 않는 미친 짓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다는 거야?”
“뭐, 말하자면 그렇지요.”
순간 왕일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한 사람의 목이 잡혀 있었다.
“이제 조금 우리 처지를 알게 된 모양인데?”
가장 가까이 접근한 자였다.
그리고 이만큼 왔다는 것은 공격이 머지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커, 컥…….”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적의 목을 부러뜨린 왕일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하는 영롱한 색채를 감상하고 있었다.
“단풍이 물든 것 같구나.”
“예?”
뜬금없는 왕일의 말에 적우가 무슨 뜻인지 몰라 물었다.
“그냥 그렇다고. 그런데 이놈들 아무리 봐도 모용세가에서 나온 놈들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아무래도 그놈이 마지막까지 날 기만했나봐.”
말을 마치고 세 사람을 바라보던 왕일의 눈이 진승한에게 고정되었다.
“왜? 왜 또 접니까?”
진승한은 이런 불공평한 처사에 다시금 항의하기로 했다.
비록 남아있는 다른 쪽 눈마저 시퍼렇게 멍이들 가능성이 있었지만, 죽어지낼 수는 없었다.
“너만 표정이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는 것은 모용세가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 말에 진승한이 다른 두 사람을 보자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 조장, 알고 있었어?”
“에이,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적우와 막달평이 진승한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는데, 이 모든 비극은 진승한의 연기력이 형편없다는 것과 눈치가 좀 모자라서 일어난 일이었다.
“제게 그 사실을 말해준 것이 적 부대주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막 조장도 같이 들었습니다.”
혼자 죽을 순 없다는 일념으로 두 사람을 끌어들였지만, 사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언제?”
“적 부대주가 그런 말을 했어? 나도 같이 들었다고? 그런데 왜 기억이 없지? 혹시 꿈이라도 꾼 거 아니야?”
“진 조장,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치사하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사내대장부지, 죄 없는 사람들까지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야겠어?”
철저하게 고립된 진승한이 택한 것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이었다.
“죽어!”
진승한의 검에서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뻗어 나와 전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왕일의 덩치에 전혀 꿀리지 않는 몸을 가진 막달평이 도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적에게 가장 먼저 당도한 것은 적우가 쏘아낸 화살이었다.
“컥!”
목에 화살을 꽂고 어둠속에서 모습을 보인 복면인이 비척거리다 쓰러질 때, 이미 또 다른 화살들이 주위를 파고들고 있었다.
“저기, 그리고 저기.”
왕일이 손짓하는 곳으로 적우는 정확하게 화살을 쏘아냈고, 어김없이 한 명의 복면인이 신음을 흘리며 목숨을 잃었다.
“진 조장, 좌측 삼 장! 막 조장, 우측 십 보!”
왕일이 마음먹고 신경을 쓰는 이상 은신은 무용지물이었다.
낌새나 냄새, 기척을 통해 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뿜는 기운을 통해 적의 위치를 확실하게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쾅!
진승한의 검이 후려친 곳에서 폭음이 터지며 십여 명의 인물들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공격을 피하기 위한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하앗!”
기합과 함께 진승한의 검이 날갯짓을 시작하자 하나였던 검신이 순식간에 수백 개로 불어났는데, 웅웅거리는 소리마저 있으니 마치 수백 마리의 벌이 한꺼번에 공격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여의환검!”
누군가가 외쳤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마음 먹은 대로 환상을 보여준다는 정한검 남찬우의 독문검법인 여의환검이 그 이름처럼 수백 마리의 벌과 같은 날카로움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더니, 공중에 떠있는 그들을 향해 위험한 독아를 드러냈다.
쉭!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이리저리 휘어지는 모습은 진승한의 검이 원래 연검이 아니었나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컥!”
디딜 땅이 없는 그들로서는 진승한의 검을 피할 수 없었다.
아니, 설사 땅을 딛고 서있었다고 해도 그들 중 한 명만 살아도 다행이었을 정도로 진승한의 검은 날카로웠다.
“흥!”
검을 한 번 휘둘러 검봉에 맺혀있던 한 방울의 피를 털어버린 진승한이 경멸에 찬 표정으로 시신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