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상들의 무림 생존기-96화 (96/138)

96화

“처음 보는 인물입니다.”

적우가 모른다면 나머지 두 사람도 모른다고 봐야했다.

“말을 할까?”

고문을 한다고 해서 쉽게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표식도 없이 오로지 단검 하나씩만 들고 온 놈들입니다.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아혈을 푸는 순간 혀를 깨물 것이고, 약간의 내력이라도 쓸 수 있다면 스스로 혈맥을 끊을 것입니다.”

막달평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영감탱이의 의도가 뭘까?”

“왕 대주, 불렀어?”

말이 끝나자마자 악불군의 말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니라니까요!”

버럭 소리를 지른 왕일이 적우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길만으로도 적우는 왕일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대주님이 고문을 하는데 있어 망설임 따위는 없을 것이란 것은 부교주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거기다 우리가 따라오는 것을 말리지 않은 것은 고문이 목적이 아니라고 보여 집니다.

-그럼 대체 무슨 말이야?

왕일의 전음을 받은 적우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왕일이 전음을 쓴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전음을 할 줄 아셨군요?

-단전에다 내력까지 높아졌는데, 못 할 까봐?

-그런데 어찌 지금까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까?

-굳이 말 할 필요 없잖아? 그보다 다른 목적이라는 것이 뭔지나 말 해봐.

-대주님의 안일한 태도를 우리로 하여금 지적하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적우의 말에 왕일은 방심한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까탈하게 나온 악불군의 탓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온통 신경이 집중되어 다른 곳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이다.

‘응?’

가만히 생각하다 왕일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나올 때부터 그랬지?’

혈마교를 나선 순간부터 악불군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아랫것들은 바쁘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네 사람을 괴롭혔었다.

‘그럼 그때부터 이미 적의 존재를 알았단 말인가?’

위협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지낸 자신이 어이없었다.

-부교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두 지시를 내렸었습니다. 아마도 대주님께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은 사람을 부리는 위치에 있어서일 것입니다. 부교주님께서는 그런 분이시거든요. 명령을 내리는 이는 그만큼 책임이 있고, 자신이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입니다.

‘내가 알아서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랐던 것인가?’

생각해보면 너무도 태만했었다.

주위를 경계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혈마교를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었기에 설마하니 적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좋아, 그럼 이 영감탱이… 부교주님께 하는 말 아닙니다!”

“누가 뭐랬나?”

미리 고해바쳤는데, 바로 대답이 나온 것을 보면 악불군이 이곳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염병할 영감탱이.’

속으로 한 번 씹어 준 후에 다시 쓰러진 노인을 바라보았다.

“다른 것은 필요 없고, 난 네놈이 어디서 왔는지 만 알면 돼. 어차피 우리랑 붙을 거니까 말할 수 있겠지?”

노인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방법은?”

“일단 발가락부터 자르죠.”

적우의 대답이었다.

“아닙니다. 손톱, 발톱에 대꼬챙이를 쑤셔 넣고 불로 지진 후에, 그래도 말을 하지 않으면 소금에 절이고, 뽑은 후에 마지막에 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막달평의 제안이었다.

“다량의 미약을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끝으로 진승한이 답했다.

‘이놈들의 성격이 나오는 군.’

제일 독한 놈은 누가 뭐래도 막달평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살짝 덜한 것이 적우였고, 진승한은 사파인으로 불리기보다는 무인으로 불러야 될 정도였다.

‘이런 놈도 있는데, 왜 나에게는 그리 독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일까?’

진승한의 마교에서의 위치도 그리 낮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에 잠긴 왕일에게 적우가 물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려면 혈도를 찢어버리는 것이 낫겠지. 거기다 내 내공은 그런 것에 딱 들어맞거든. 그러니 그것부터 하자.”

왕일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한 마디를 떠올렸다.

[독한 놈.]

오죽하면 쓰러져있던 노인마저도 몸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그만큼 혈도를 파괴한다는 것은 무인의 길을 완전히 끝내버린다는 것이며, 삶의 희망을 짓밟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고통은 막달평이 말한 것들을 행하는 것보다도 크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고통을 참지 못 해 죽는 이도 있다고 했으니까.

“왜?”

“자칫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죽일 놈이잖아?”

“하지만…….”

“정신력이 강한 놈이라며? 그럼 죽지 않겠지. 그리고 석휘명과는 달리 이놈에게 반드시 들어야 할 정보도 없으니 들으면 좋고, 못 들으면 마는 거지.”

말을 마친 왕일이 노인의 왼손을 잡고는 자신의 내력을 조금씩 흘려 넣기 시작했다.

“으음…….”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는 노인의 입을 뚫고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게 바로 뇌기라는 거다. 짜릿하지? 고통을 멈추고 싶으면 눈을 떠. 그럼 편히 죽게 해주마.”

***

적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형적인 악당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교주님이나 부교주님은 대주님의 성향에 우려를 하시는 것일까?’

노인을 고문하는 왕일의 모습은 누가 봐도 훌륭한 악당이었고, 그것도 어설픈 악당이 아닌 잔인하고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기 딱 좋은 그런 악당이었다.

“말을 하고 싶어도 이빨이 있으면 쉽게 하지 못하겠지?”

노인의 입에 손을 넣은 왕일이 생으로 이빨들을 모조리 뽑아버렸다.

‘저게 보통 사람이 할 행동은 아닌데…….’

보통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을 죽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고문은 천지차이였다.

돼지고기, 소고기, 개고기, 닭고기를 먹을 수는 있어도 그것들을 제 손으로 죽이기는 쉽지 않은 것처럼.

“왼쪽 팔 다음엔 오른쪽 발이야. 그래도 혹시나 살아남을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목발은 짚을 수 있어야 할 테니까. 어때? 너그럽지?”

“대주님, 그럼 이놈 왼쪽 팔을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적우는 눈을 빛내며 달려는 막달평이나 왕일이나 똑 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것은 어지간한 독심이 아니고서는 힘들다. 아니면 막가 저놈처럼 이상한 쪽으로 감정의 하나가 무너진 놈이 아닌 다음에야 할 수 없는 행동이지. 그렇기에 고문을 하는 이를 따로 두지 않던가.’

마교에서도 고문을 할 수 있는 이들을 뽑자면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오백여 명 정도? 물론 정파의 여느 문파에 비해서 많은 것이지만, 원체 많은 인원수를 자랑하는 마교이기에 비율로 따지자면 그렇게 많다고 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담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지독한 놈이구나. 정녕 말을 하지 않겠다면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푸들푸들 떠는 노인을 향해 일갈한 왕일이 노인의 왼 발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마침 잘 되었네요.”

너덜너덜한 왼팔을 팽개치고 멀쩡한 오른팔로 이동하는 막달평이 내뱉은 말이었다.

‘아주 잘 만났군.’

적우도 고문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어차피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이상, 하나라도 더 정보를 얻으면 유리했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희희낙락하며 즐기는 막달평을 보자니 약간 심기가 불편하긴 했다.

“사, 살려…….”

그때 드디어 노인이 고문에 굴복했는지 입을 열었다.

“고통을 멈추고 싶으면 어디서 왔는지 말을 해!”

차가운 왕일의 말에 노인이 몸을 부르르 떨다 미약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 모용세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우가 막달평을 밀치고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모용세가에서 나왔단 말이냐! 누가 보냈느냐? 모용중걸이 보냈느냐?”

“그, 그렇…….”

“그놈은 어디 있느냐!”

노인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적우의 팔을 왕일이 붙들었다.

“그러다 죽는다.”

그런 왕일을 바라보는 적우의 눈에는 핏발이 서고 살기가 어려 있었는데, 잘하면 한 대 칠 것도 같았다.

“진조장, 치료해. 아무래도 아는 게 많은 놈 같으니까.”

“예.”

진승한이 노인을 넘겨받을 때, 왕일은 억지로 적우를 끌고 그곳을 벗어났다.

“왜 그래?”

적우가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왕일은 적우의 상태에 대해서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 걱정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적우는 빠르게 안정을 찾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모용중걸이란 이름에 그만 잠시 이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놈이 누군데?”

“우리 가문을 몰살시킨 놈입니다.”

모용세가가 나섰다지만 그 중에서도 주도한 놈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모용중걸인 모양이었다.

‘이번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겠어.’

왕일 자신만 해도 독심 황만복과 그의 제자인 천의 혁련종, 협개 좌영호가 이어져 있었고, 정도객 하만성과 모용중걸은 정한검 남찬우와 잠영대주와 은원이 있었다.

하나둘 튀어나오는 은원으로 이 싸움은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

“이거 일이 커졌구먼.”

모용세가란 말이 튀어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영대주가 달려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이 향하는 방향에 정도객 하만성이 있다는 정보에 정한검 남찬우까지 달려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제는 우리가 주력이지 않은가?”

악불군의 말마따나 지금 일행의 덩치는 확실히 커진 상태였고, 누가 봐도 마교가 주력을 이끌고 싸움에 나선 형태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왕일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말인가?”

악불군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되물었다.

‘혈마교에 남은 이들을 얘기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저런데?’

“교주님 말입니다.”

“응? 아, 자네 아들 말인가?”

왕일은 사마유운을 말했지만, 악불군은 왕운을 걸고 넘어졌다.

“그것이 아니라…….”

“솔직히 교주님이 무슨 걱정인가? 여차하면 튀면 그만인데. 그리고 화 장로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문제는 이제 막 기기 시작한 자네 아들놈뿐인데, 안 그런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악불군이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네가 한심해서 하는 말이네. 정작 걱정을 하려면 우리를 해야 옳은데 어찌 그곳에 남아있는 이들을 걱정하는 겐가?”

악불군은 사마유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를 걱정하다니요?”

“아직 말 안했냐?”

악불군의 고개가 막달평에게로 향했다.

“사부님께서 비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지금까지 얌전하게 악불군의 심부름을 하던 막달평이 아니었다.

“어? 반항 하냐?”

“그럼 어때요? 이제 다시 뵐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왕일은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한가?”

“예.”

“그게 바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네. 다른 말로 힘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

여전히 왕일은 악불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사파네. 오로지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거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여인들을 겁탈한다고 해서 사파가 아니란 말이네. 오로지 힘의 유무에 따라 상대와 자신의 처지가 결정되는 것이지. 자네가 독심 황만복을 만났을 때, 그놈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죽는다면 아무리 주위에서 손가락질을 하는 악당이어도 결코 사파인은 아니라는 말이네. 알겠는가?”

이제 좀 알아들을 것 같았다.

“악당은 많아도 사파인은 찾기 힘들지. 악당이 되기 싫거든 진정한 사파인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떤가?”

권모술수를 쓰거나 중상모략을 일삼으면 아무리 악명이 높아도 악인일 뿐이지 사파인은 아니라는 악불군의 말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분위기가 수상했다.

“왜 갑자기 이러십니까?”

“아무래도 같이 행동하지 못할 것 같네. 놈들이 수를 쓰기 시작했거든.”

“수라니요?”

“길을 돌려 우리를 목표로 달려오기 시작했다는 말이네.”

말을 하며 남찬우를 바라보는 것이, 그가 온 목적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던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