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무리 내조가 중요하긴 해도 너무 나서는 거 아닌가?”
사마유운의 말에 화영영이 옆에 있는 왕일의 팔짱을 꼈다.
“부부는 일심동체. 서방의 원한은 곧 제 원한이죠. 한철진이란 놈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데, 그냥 두긴 그렇잖아요?”
“상대가 왕 대주의 첫사랑인데도?”
“에이, 첫사랑의 추억은 소중한 거죠. 교주님도 예전에…….”
화영영의 말을 들으며 왕일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게 정말 마교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작전회의인가?’
며칠 전만 해도 왕운의 똥으로 인해 회의가 끝나지 않았던가.
‘고성이 오가고 살기가 춤을 추진 않더라도 최소한 긴장감은 있어야지. 아니면 교주의 위엄으로 인해 모두가 숨죽인 분위기라도 만들던가.’
지금 사마유운은 화영영의 말 때문에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는데, 화가 나서 그렇다기보다는 부끄러움에 그런 것이었다.
“서방 무슨 생각해?”
“응? 아, 그냥 회의가 개판…….”
갑작스런 화영영의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던 것을 내뱉던 왕일이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허… 왕 대주에겐 회의가 지루했던 모양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모처럼 침상을 벗어난 악불군이 왕일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 번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좋겠군. 왕 대주는 어째서 우리를 개라 생각했는지 한 번 말을 해보게나.”
사마유운의 노골적인 질문에 왕일은 난처했다.
‘그렇다고 개라 표현할 필요는 없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교주씩이나 돼서 저렇게 행동하니까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거잖아.’
어쨌거나 마교의 중심인물들을 모두 개로 만든 책임은 져야 했다.
“너무 의외의 모습이라 헛말이 나왔습니다. 몇 번 참가하지 않았지만, 회의하시는 모습을 보면 도무지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마치 한담이라도 즐기는 것 같았거든요. 정파의 위협이 목전에 닥쳤는데 말입니다.”
“위협이라고?”
지금껏 얌전히 있던 남찬우가 왕일의 말을 받았다.
“예. 그들의 힘을 생각할 때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쯧쯧. 자네는 아직 우리 교의 힘을 모르는 것 같구먼.”
제대로 알 길도 없었다.
전투라고는 광서에서 귀주로 오면서 했던 것과 백독문과 싸운 것이 전부인데, 그것에서 왕일이 본 것은 마교의 힘이 아니라 마교에서 버려진 이들의 살고자 하는 몸부림뿐이었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위기라 받아들이지 않는다네.”
“소림입니다. 거기에 정파의 힘과 백독문의 힘까지. 비록 당문과 제갈세가가 없다고는 하지만 무림맹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위기가 아닐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말도 많이 순화하고, 하고 싶은 말을 빼서 이 정도였다.
‘당신 같은 얼빠진 교주와 머릿속에 싸움밖에 없는 부교주가 있는 마교가 아직까지 멀쩡히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인데, 소림 등이 쳐들어오는 것이 위기가 아니란 말이냐?’
속으로 생각한 이것이 왕일이 입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순화한 말만으로도 어찌 보면 마교를 무시하는 것이었기에 사마유운 등의 기분을 거스르지는 않을까 걱정한 왕일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왕 대주가 무림 경험이 적지?”
“예. 그때 드린 자료를 보셨지 않습니까? 아마 제대로 된 무림이란 것을 보기나 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요, 교주님. 서방이 무림에 대해 무식한 것은 본인 잘못이 아니라 경험이 적어서 그런 거예요.”
“왕 대주가 무림이라 여기는 것은 아마도 뒷골목에서 싸우는 껄렁한 놈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맞는 말이오. 아마도 사파란 것의 개념도 그와 비슷하겠지. 그저 사람이나 죽이고, 마음에 드는 여자는 납치해서 제 욕심이나 채우고, 돈이 없으면 뺏는 그런 놈들이 사파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오.”
“어? 부교주님, 돈이 없으면 뺏는 것은 맞는 말 아닌가요? 제가 아는 것만으로도 부교주님이 무림을 종횡할 당시에 턴 집만 수십 곳이고, 두들겨 패고 뺏은 돈만도 상당한 액수라고 알고 있는데요.”
과묵하던 잠영대주까지 악불군의 말을 농으로 받을 정도로 사람들은 왕일을 씹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오냐, 그래. 제자리에만 갖다 놔라.’
졸지에 무식하고 무림 초출이 되어 버린 왕일은 아까와 다를 바 없는 회의 분위기에 얌전한 방관자가 되어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았다.
“그럼 이번엔 악 부교주가 수고를 해주어야겠어. 제대로 된 사파가 어떤 건지 가르쳐주라고.”
“알겠습니다.”
흔쾌히 대답한 악불군이 왕일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딴엔 웃는다고 한 행동 같은데, 왕일이 보기엔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 거리는 한 마리 호랑이를 보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솔직히 왕일이 제일 꺼리는 인물이 바로 악불군이었다.
교주인 사마유운보다 더 같이 하기 싫은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악불군이 왕일의 동행자로 낙점이 되었으니 어찌 기분이 더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왕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보다 더 기분 나빠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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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부교주님이 같이 가신단 말입니까?”
잠영대주의 아들이자 제자인 적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사부님이 왜 가신답니까? 늘그막에 노망이 난 것도 아니고, 뭘 그리 빨빨거리며 돌아다니시려고 그러신데요?”
악불군의 제자인 막달평이 대놓고 악불군의 동행을 꺼린다는 듯 말했다.
“젠장!”
남찬우의 제자인 진승한은 짧게 자신의 불만을 표출했다.
“왜들 그래?”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수하가 있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제자인 막달평까지 이렇게 싫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왕일은 궁금했다.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합니까? 지내보시면 압니다.”
“왕 대주.”
“왜 불러요!”
혈마교를 떠난 지 사흘 만에 왕일의 참을성은 한계에 다다랐다.
“거, 사람 까칠하기는. 왜 불렀겠나? 산세도 좋으니 잠시 쉬었다 가자는 게지.”
또 쉬자는 악불군의 말에 왕일을 비롯한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는데, 쉰다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 쉬면서 하는 행동이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여기 있습니다.”
악불군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막달평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통을 건넸다.
“술은 없냐?”
악불군의 눈길을 받은 진승한이 품을 뒤지다 낭패한 표정을 짓더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적 부대주, 이리 와서 잠깐 앉아 봐.”
악불군이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들기며 적우를 불렀다.
“예.”
“그 무형시라는 거 말이야. 나도 연습을 해봤는데, 도무지 되지가 않더라고. 어떻게 소 힘줄에 불과한 활시위가 강기를 버텨내느냐 이 말이지.”
“궁금하시면 사부님께 여쭤보십시오.”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이었다.
“쏘지 않아도 되니까 한 번만 보여줘.”
초롱초롱한 악불군의 눈길을 받은 적우가 한숨을 내쉬더니 궁에 무형시를 걸었다.
“이왕 건 김에 쏘지 그러나?”
쾅!
벌써 일곱 번째 듣는 폭음이었기에 주위에서는 그러려니 했다.
그때 어디서 가져왔는지 진승한이 술병을 내밀었다.
“안주는?”
“여기 있습니다.”
“이건 오리구이 아니냐? 이 술에는 소채를 곁들여야 제격인데.”
그 짧은 시간에 이 산중 어디서 오리구이를, 그것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상태에서 구해왔는지 모를 진승한의 노력은 간단한 말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진승한은 두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소채를 구해오지 않는다면 남은 한쪽 눈마저 시퍼렇게 멍이 들 테니까.
“평아.”
“예.”
“어깨 좀 주물러봐라.”
“예.”
악불군의 어깨를 주무르는 막달평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고, 손길은 세심했다.
“왕 대주.”
“왜요?”
“어떤가?”
“뭐가요?”
“지금까지 내가 한 행동들이 어떤가 말이네.”
“막무가내에 몰염치하고 고마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후안무치한 행동들이었죠.”
왕일의 눈탱이는 이미 양쪽 모두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런가? 난 이게 자연스러운데? 보게 저들도 아무런 불평이 없지 않은가.”
“전 불만이 많습니다.”
“알고 있네. 여러 번 말했으니까. 그런데 혹시 그거 아나?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내게 힘이 있어서이고, 자네가 불만을 표출할 수 있었던 것도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 말이네.”
“물론입니다.”
“그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사파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렇게 행동하기에 사파라 불리는 거란 말이네. 자네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데, 사파라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했기에 사파라 불리는 거네. 이러이러한 행동은 사파라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했기에 사파라 불리는 것이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이 미묘하게 달랐다.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뭔지 잘 모르겠네요.”
“예를 들어 내가 누굴 죽이고 싶어. 그래서 죽였어. 과연 나는 사파일까? 아니면 사파라서 그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어차피 같은 거 아닌가요? 죽이고 싶어 죽였다면 사파라 불려도 할 말이 없고, 사파인이라면 충분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쯧쯧, 그건 아니지. 사파인이라고 꼭 그런 행동을 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한 놈은 분명 사파인이라 불릴 거야. 그렇지?”
“그건 그러네요.”
“이제 알겠나? 정파에서 말하는 사파인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놈들까지 뭉뚱그려 부르는 것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사파인이란 그런 행동을 한 놈들뿐이네.”
“대체 하고 싶은 말씀이 뭔데요!”
답답한 왕일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거, 귀청 떨어지겠구먼. 어쨌든 답답하지? 이해도 안 되고.”
“예!”
“그게 바로 정파놈들이 우리를 대할 때 하는 짓이라네. 도통 뭔 소린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니까. 나도 내가 지껄이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였으니 자네가 알기에는 힘들었겠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을 줄인 악불군이 갑자기 손을 자신의 앞쪽 땅을 향해 힘차게 찔러 넣었다.
퍽!
“컥!”
악불군의 손에 끌려나온 것은 흙을 뒤집어 쓴 복면인이었다.
“정파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 놈도 사파인이라 불려야 한다는 거지.”
그새 혈도를 찍혔는지 복면인은 축 늘어진 상태로 꼼짝을 하지 못했고, 그 순간 곳곳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
“정리되었습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악불군의 손에 복면인이 잡히고 불과 숨 몇 번 들이쉬고 내쉴 동안에 벌어진 일인 것이다.
“어디 놈들 같으냐?”
악불군의 물음에 독고평이 고개를 저었다.
“가지고 있는 물품이 없었습니다.”
“그럼 이놈에게 알아봐야 하는 건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복면인을 왕일에게 던진 악불군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 대주, 이놈을 통해 어디 놈들이고 무엇을 노리고 왔는지 확실하게 알아내도록. 이는 이놈들이 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무능과 그것으로 인해 교에 손실을 끼친 죄를 묻는 일이니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것이다.”
‘과연 칠면염라인가?’
악불군의 별호인 칠면염라는 그의 변화무쌍한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농담을 하며 웃던 그였지만, 한순간에 사람이 바뀌어 사무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그러다가도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실제로 악불군이 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대답은?”
“알겠습니다.”
축 늘어진 복면인을 끌고 숲으로 들어갈 때, 적우를 비롯한 세 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사비월은 소마대를 정비하느라 바빴기에 따라갈 수 없었는데, 방금 습격에서 희생당한 이들이 모두 소마대의 일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어?”
“예?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적우가 황당한 듯 물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왕일이 사람을 찾아내는 능력은 천부적이기 때문이었다.
“전 아시고 장단을 맞춰주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럼 모두 알고 있었단 얘기군?”
“제가 사부님을 주무른 이유는 항상 가까이 다가오는 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술심부름을 한 것은 그것을 구하러 다니며 놈들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무형시를 날린 것은 놈들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각기 이유가 있는 행동들이었다.
“그럼 쉴 때마다 나를 들볶은 이유는 뭔데?”
보이는 것은 양쪽 눈의 시퍼런 멍뿐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멍은 더 많았다.
“그거야 단순한 화풀이겠지요. 화 장로님께 좀 당했습니까?”
막달평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왕 대주, 불렀나?”
왕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서 악불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요! 이놈한테 한 말입니다!”
복면속의 얼굴은 수염이 허연 늙은이의 얼굴이었다.
“누군지 아는 사람?”
왕일이 모두에게 묻고 있었지만, 눈은 적우에게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