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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94화 (94/138)

94화

“화매보다 교주님이 세다고?”

“당연하지! 물론 앞으로는 내가 더 세질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교주님이 더 강해.”

그 어리버리한 사마유운이 괴물딱지인 화영영보다 강하다는 말을 왕일은 믿을 수 없었다.

“괴물왕이구나.”

“뭐?”

“괴물딱지보다 강하니 괴물와… 악!”

뒤통수를 후려친 화영영이 째려보는 가운데 왕일은 머리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 * * *

“많이 좋아졌네?”

의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석휘명은 살이 올라 흉터들만 아니라면 멀쩡하게 보일 정도였다.

“왔냐?”

왕일을 본 석휘명이 붕대를 감은 손을 들며 반겼다.

“이제 그만 우리가 허장천을 쳐야 하는 이유를 말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아니면 이 생활이 끝날 수도 있으니까.”

쨍그랑.

가까이 다가간 왕일이 탁자 위의 술병을 슬쩍 밀었고, 바닥에 부딪치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깨져버렸다.

“네가 좋아하는 이 술도, 푹신한 침상도, 부드러운 옷도 없단 애기지. 남는 것은 전처럼 그 의자 하나뿐일 거야.”

왕일이 말을 마칠 때까지 석휘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묘한 눈으로 왕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진심이구나.”

“알면 어서 말해.”

“걱정은 되지 않는 거냐?”

석휘명은 계속해서 딴 소리만 하고 있었다.

“대체 그 목소리하고 얼마나 많이 대화를 하는 거야?”

“운기를 할 때는 항상 하지. 내가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진기가 알아서 길을 찾거든.”

“운기를 한다고?”

“그래. 무인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

“네 무공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빨리 부작용이 드러날 수도 있는데?”

솔직히 석휘명은 자신의 말을 들은 이후에 왕일이 운공을 중단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잖아?”

“뭐, 그건 그렇지.”

지금 왕일의 모습은 꾸며낸다거나 하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였고, 석휘명은 그것이 놀라웠다.

‘마교놈들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그게 아니란 말이지?’

왕일의 모습에 석휘명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대체 그 목소리하고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것저것.”

“그게 뭐냐고.”

“내가 살아온 인생이나 그 과정에서 내렸던 수많은 결정, 그리고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까지.”

“그 결과가 지금의 너냐?”

“그래.”

“그래서 성격과 가치관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소중한 것은 달라지지 않았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왕일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모든 것을 밝힌 후에 너나 마교가 나 없이 불사심공을 고칠 수 있다는 오판을 내려 날 죽일 수 있기에 다짐을 받아두려는 거다.”

“널 살려주겠다는?”

“아니, 날 이곳에서 내보내주고 허장천이 가지고 있던 문서를 입수하면 나에게도 필사본을 보여 줄 것.”

“네 말을 들은 후에?”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전서를 보내겠다.”

어이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걸 받아들일 것 같아?”

“덤으로 구절심과 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내 행세를 하면 충분히 그놈을 엮을 수 있을 거다. 잘하면 그놈이 한철진을 선물로 보내줄지도 모르잖아? 솔직히 네 입장에서는 나 같은 놈을 잡는 것보다는 그놈을 얻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마교에서도 그놈을 통해 구양, 구음신마를 끌어낼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지 않겠냐?”

좋은 조건이기는 했다.

마교나 왕일에게 있어서 석휘명은 쓸모없는 존재였으니까.

“네가 보내올 전서의 내용을 구절심이란 놈도 알고 있냐?”

“물론.”

“왜 가르쳐줬어?”

“천선부가 사라지고 나면 허가 놈에게 원수를 갚기가 요원해지거든.”

“천선부가 진다고? 비룡장 하나에?”

“아니. 허장천 그놈에게.”

비룡장이 허장천의 것이니 같은 말일 진데, 석휘명은 허장천 개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차피 마교에도 말을 하려고 했었으니, 내가 거짓말을 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천선부든 마교든 둘 중의 하나만 무너져도 허장천의 무림정복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너무 허황되다고 생각하지 않냐?”

“나중에 내가 보낸 전서를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걸? 자, 그만 밖에서 엿듣고 있는 분들과 상의를 해봐라. 그때 석실 밖에서도 엿듣고 있었지?”

석휘명은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사마유운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봐라. 누가 있다고 그러냐?”

벌컥 열려진 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너에 대한 결정은 오로지 나에게 맡긴다고 했으니까, 나만 설득하면 돼.”

슬쩍 밖을 내다 본 석휘명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못 받아들이겠냐?”

“불사심공의 문제점을 알게 되면 네가 나에게 가르쳐준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렇다고 날 죽이면 네게 무슨 이득이 있는데?”

맞는 말이었다.

“좋아. 그럼 너도 내 조건을 받아들여.”

“어떤?”

“석조운이 남긴 것들을 나에게도 가르쳐 줘.”

“당연하지. 내가 설마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겠냐? 그리고 내가 말로 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그것들을 숨겨둔 곳을 가르쳐 줄 테니 직접 찾아라.”

“그럼 그건 됐네. 그건 그렇고 아까 무슨 다짐을 받으려고 했어?”

“네 가족을 걸고 맹세라고 할 참이었다.”

“맹세? 그따위 것이 중요해?”

사실 말로 하는 것은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약속이었다.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변하지 않았다면 나에겐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지.”

“내가 뭘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네 동생, 왕운.”

순간 왕일의 얼굴이 굳었다.

“혹시나 노파심에서 하는 거니 네 동생을 걸… 큭!”

어느새 다가온 왕일이 석휘명의 멱살을 부여잡고 있었다.

“함부로 운이의 이름을 내뱉지 마. 너 하나 살려주는데 운이의 이름까지 거론할 필요 없으니까.”

“미, 미안하다.”

석휘명이 사과를 하자 왕일이 거칠게 잡았던 손을 놓았다.

“장소나 말하고 꺼져.”

차갑게 말하는 왕일을 보며 석휘명은 겉으로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급격한 감정의 변화와 사소한 것에도 흥분하는 성격. 좋지 않아. 이놈도 그저 그런 실패작이란 말인가?’

허장천이 일부 문서를 가져갔다고 했지만, 그것은 석휘명의 부친이 필사를 한 연후에 일부러 넘겨준 것이었다.

불사심공을 익히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석휘명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그런 석휘명이 볼 때, 왕일의 상태는 석조운이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했다고 알려진 모습과 흡사했다.

“난 얻는 것이 없는데? 네가 도를 얻은 과정과 불사심공을 익힐 수 있었던 배경을 들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상대로 도망쳐봤자 얼마나 가겠냐? 일단 산공독을 해독하고 내공을 찾은 연후에 몸을 회복해야 도망치든 말든 할 것 아니겠냐?”

“도는 시전에서 은자 닷 냥을 주고 산 것이 전부다. 어떤 내력이 있는지는 나도 몰라. 그리고 불사심공을 왜 나만 익히게 되었는지는 나도 알고 싶은 사실이다. 내가 본 책자가 특별하다고 말하는데, 교에서 구해준 시중에 떠돌던 책자와 비교했을 때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새 안정을 찾은 왕일을 보며 석휘명의 우려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래도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적어주면 고맙겠다. 그 시간에 나도 몸을 회복할 테니까.”

“좋아.”

***

“고루문?”

사마유운 등이 모인 가운데, 드디어 석휘명에게서 도착한 전서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전서에 적힌 ‘고루문’이란 단어가 사람들의 고개를 모로 꼬게 만들었다.

“고루문이라면 혈천강시를 제작했던 곳이지 않는가? 허장천이 그곳의 후손이라고?”

“오룡회란 조직이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 고루문과 철심문의 후손이 있었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이군요.”

화영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문제는 이놈이 지적한대로 사비룡이란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고루문의 후계자가 한 행동이니 분명 이유가 있겠지?”

“아마도 혈천강시와 관련된 것이겠죠.”

사마유운의 말에 악불군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왕일에게로 돌렸는데, 왕일을 살아있는 혈천강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그였기 때문이었다.

“부교주.”

“예.”

“만일 지금 혈천강시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사마유운이 악불군에게 묻는 것은 그가 이런 쪽으로 관심이 있어서 많은 서적들을 탐독하고 자료를 조사해서였다.

“혈천강시는 살아있는 사람을 강시로 만든다는 점 때문에 무림공적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 파괴력으로 인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한 구의 혈천강시가 중원을 좌지우지할 상황이었으니, 네 구나 되는 혈천강시가 모습을 보인다면 아마도 중원은 풍비박산이 날 겁니다.”

악불군의 설명을 들은 사마유운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난 자꾸만 그놈이 했던 말이 걸리는군. 그놈은 분명 허장천만을 언급했거든? 물론 그것이 혈천강시를 거느린 허장천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마유운의 말에 왕일이 동조했다.

“왕 대주도 그렇게 느꼈나?”

“예.”

“흠… 그것은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잠영대주, 놈의 행방은?”

“사천에 있습니다.”

마교는 석휘명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따라붙고 있는 중이었고, 그 일에 잠영대가 모두 투입된 상황이었다.

아무리 날고기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잠영대 전부를 따돌리고 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다시 잡아올까요?”

“아니, 아직은 아니야. 그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봐야겠어. 그리고 어떤 놈들을 만나는지도. 일단 철저하게 감시하되 접촉은 하지 말라 일러둬.”

“알겠습니다.”“그럼 그것은 됐고, 문제는 이 허장천이란 놈이군.”

“제가 다녀올까요?”

화영영이 말하자 사마유운이 고개를 저었다.

“손님인척 가서 죽일 생각이겠지?”

일 대 일로 독대를 할 수만 있다면 죽일 수도 있었다.

“첫째, 만나는 놈이 허장천인지 어떻게 확신하겠나? 놈의 분신이라면 오히려 일을 악화시킬 수 있네. 둘째, 석휘명이란 놈의 말을 빌면 그놈의 무공이 만만치 않다고 했네. 거기다 혈천강시까지 거론 되었으니 자네를 혼자 보낼 수는 없네. 셋째, 일단 운아의 기저귀부터 갈게나.”

얌전히 자고 있던 왕운이었는데 그에게서 묘한 냄새가 풍겼고, 이미 좌중의 사람들은 화영영만 빼고 모두들 손으로 코를 막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는 물론 왕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얘가 언제 쌌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말을 한 화영영이 품에서 기저귀를 꺼내더니 왕운을 탁자에 뉘였다.

“화 장로, 설마?”

악불군이 기겁을 하는 사이 이미 화영영의 손길은 거침없이 왕운의 기저귀를 까 내리고 있었다.

“에이, 정말 왜 그래? 다른데 가서 해도 되겠구먼.”

“일부러 그러는 거지?”

그러거나 말거나 화영영은 왕운의 변을 자세히 보고 있었다.

“어머, 똥이 황금색이네. 아유~ 이쁜 것.”

“우욱!”

결국 참다 못 한 이들이 방을 나섰지만, 왕일은 ‘아버지’란 이름을 달고 있었기에 그들을 따라나설 수 없었다.

“손 치워.”

화영영의 말에 왕일이 코를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자, 이번엔 서방이 해봐.”

똥 범벅이 된 왕운을 내미는 화영영을 보며 왕일은 새삼 어머니가 그리워졌다.

***

“실패했습니다.”

잠영대주의 말에 사마유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겠지.”

혹시나 해서 소림에 이번에 알게 된 일들을 정리해 알렸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자신들의 발길을 멈추고 정파의 내분을 일으키려는 마교의 얄팍한 속셈으로 본 것이었다.

“정말 한 번 붙겠다는 것인 모양이군.”

이미 마교의 거의 모든 전력이 혈마교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치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소림 등이 진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교주님, 패진무관에 제가 다녀올까요?”

비룡장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나선 것도 화영영이었다.

혈천강시라면 몰라도 구양, 구음신마나 그의 제자는 화영영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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