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고문으로 입을 열 수 있는 놈이 아닙니다. 미약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대주님을 뵙게 해달라고만 중얼거렸으니까요.”
특별한 훈련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뭘 원해?”
“일단은 너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
왕일이 눈짓을 하자 적우가 석실을 빠져나갔고, 두꺼운 석문이 천천히 세상과 두 사람을 분리시켰다.
“말 해봐.”
“네가 숨기고 있는 불사신공을 익힐 수 있는 방법과 도를 얻은 경로.”
“도?”
불사심공의 비밀이야 어차피 말해도 석휘명은 할 수 없었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비밀이란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도를 얻은 경로를 말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왕일로서 뜻밖이었다.
“그때 시전에서 구입한 것이 전부다.”
“그걸 믿으라고?”
믿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명검이나 명도에 속하지는 않겠지만, 피를 빨아들이고 그것으로 인해 날을 세우는 도는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다.”
“배후가 있지? 그렇지? 아니라면 네가 지금의 위치에 있을 수 없어. 남찬우냐? 그때 만났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고, 모두 계획된 것이었어?”
남찬우가 하찮은 사파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도 석휘명의 입장에서는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껄끄러웠고,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마교에서 꾸민 거지? 그렇지?”
왕일은 석휘명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
말하는 석휘명의 눈에는 광기마저 어려 있었다.
“할 말이 없는 거냐?”
왕일의 물음에 석휘명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탈이지. 장수련을 죽인 배후, 그리고 네 무공의 약점.”
“약점?”
불사심공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석휘명의 말에 왕일은 기가 찼다.
지금까지 누구도 익히지 못한 심법이었고, 익힌 자신도 모르는 것을 어찌 석휘명이 알고 있겠는가?
“너,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쾅!
커다란 바위가 머리를 때린 것 같은 충격에 왕일이 잠시 비틀거렸다.
* * * *
“무, 무슨 말이야?”
“네가 불사심공을 익혔다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지.”
확신에 찬 석휘명의 말에 왕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불사심공을 익혔다고 추측했다고 했지? 웃기지마. 난 알고 있었어. 그리고 불사심공의 문제점도 잘 알고 있다. 이게 날 살려둬야 하는 이유야.”
만일 그렇다면 왕일의 입장에서는 절대적으로 석휘명을 살려야 했다.
‘그 목소리가 문제점이라면, 단순히 떠드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왕일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는지 석휘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변한 것에 그 목소리가 많은 작용을 했을 거다.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했었는데, 이미 많은 대화를 나눈 모양이구나.”
대화를 나누기는 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유약한지를 깨달았고, 이미 사파인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파인으로 살 것을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게 나에게 문제가 될까?’
변한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었지만, 이전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좋은 쪽으로 변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난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고, 또한 그것에 만족한다. 목소리로 인해 변했다고 하지만 좋은 쪽이기에 감사하는 마음마저 갖고 있어.”
“킥!”
왕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휘명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그냥, 뭐랄까… 변하긴 했어도 너는 너랄까?”
“어떤 것이?”
“멍청한 것 말이다.”
석휘명은 왕일을 비웃는 것이 분명했다.
“변한 것에 감사해? 지금의 네가 마음에 든다고? 네가 좀 독해진 것은 맞지만, 내가 겨우 그런 일로 불사심공의 문제점이라고 말을 했을까봐?”
“그럼?”
“철심문.”
왕일도 석휘명이 말한 철심문을 알고 있었다.
문주가 미쳐 가족들과 식솔을 모조리 죽인 사건이 벌어졌던 문파였으니까.
발견될 당시에 사람들을 죽인 문주가 시체의 심장을 씹고 있었고, 문파를 뒤진 끝에 백회를 이용한 무공을 찾아냈었다.
“철심문?”
“그래. 철심문 문주의 이름이 뭐였는지 알아? 석조운이었다.”
“석조운?”
“그리고 내 이름은 석휘명이지.”
이제야 왕일은 자신의 문제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성격만 변하는 것으로 끝날 것 같아? 이대로 간다면 네가 화영영과 네 아들의 심장을 씹어 먹거나 그들의 손에 의해 죽게 될 거다. 물론 후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가만히 생각에 잠긴 왕일을 바라보며 석휘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 떠나면 될 것 같지? 그거 알아? 석조운도 자신이 변하는 것을 깨닫고는 문파를 떠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와 그 같은 일을 저지른 거지. 방법은 둘 중 하나야.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석조운의 전철을 밟거나.”
“석조운이 불사심공을 익혔었나?”
“정확히 말하자면 변형된 불사심공이었지. 백회를 여는 방법도 불완전했고, 그가 입수한 불사심공은 네가 가진 불사심공과는 달리 제대로 익힐 수 없는 것이었거든.”
말하는 석휘명의 눈에는 강한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도 왕일이 얻은 불사심공이 다른 것과는 다르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그것을 구해준 것이 마호성이었기에 세간에 떠돌던 것과는 다른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것 말고 할 말은 없냐?”
갑자기 왕일이 말을 돌렸다.
“있지. 장수련을 죽인 한철진 그놈이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놈을 잡고 있는 놈이 구양, 구음신마의 제자라는 것까지.”
한 번 입이 터진 석휘명은 마치 비밀이란 비밀은 모두 말해주고 죽겠다는 것처럼 떠벌렸다.
“그놈의 이름은?”
“구절심. 패진무관의 새로운 관주가 된 놈이다.”
석휘명은 쉽게 얘기했지만, 이것은 특급이라고 할 정도의 비밀이었다.
물론 이미 패진무관이 구양, 구음신마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마교에서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구절심이 그들의 제자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불사심공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는 있는 거냐?”
왕일의 물음에 석휘명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딴에는 머리를 쓴다고 이것저것 질문을 바꾸며 자신의 주의를 돌리려고 하는데, 석휘명의 입장에서는 가소로웠던 것이다.
‘넌 절대 나를 죽일 수 없어.’
많은 것을 밝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리고 왕일, 아니 마교가 비룡장을 치게끔 만들 계획은 이미 세워두었던 것이다.
“그 빌어먹을 선조인 석조운이 남긴 유지의 대부분은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 다만 그놈의 어린 시절부터의 기록은 허장천이 가지고 있는데, 아버님이 그것을 중요하다 생각지 않으시고 포기할 수 있게끔 미끼로 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었다.
왕일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허장천이 가지고 간 책자들이 필요한데, 지금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교에서 날 위해 비룡장을 칠 것 같아?”
왕일도 석휘명이 노리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노골적으로 말을 했으니까.
“넌 내가 거짓으로 널 농락하려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럴 것 같았으면 이렇게 말을 하지 도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내게도 필요한 것이고. 너와 그놈의 인생을 비교하면 어떻게 불사심공을 익혔는지에 대한 단서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석휘명은 불가사의한 왕일의 치유력이 생긴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그것을 알면 길이 보일 수도 있었고, 자신도 불사심공을 익힐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
하나로는 불가능했어도, 둘이 되면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절심과는 언제부터 내통을 했던 거지?”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이번에도 석휘명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오래되지 않았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고나 할까? 뭐, 필요에 의해서 이용하려고 머리를 굴렸던 사이지.”
“그놈에게 뭘 넘겨준 거야?”
“교에 해가 될 내용을 없었다. 대부분 이미 정파에 노출이 되었거나 폐기해야 할 정보들이었지. 사실 내가 정보조직을 운용하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 집중 되어 있었거든.”
“겨우 그런 것들로 그놈이 스스로 구양, 구음신마의 제자라는 것을 밝혔다고? 제 목줄을 틀어쥘 수도 있는 정보를?”
“과연 그럴까?”
“무슨 말이야?”
“내가 아무리 떠든다고 누가 믿어줄까? 설사 교주가 주장한다고 해도 정파를 분열시키는 음모라고 몰아세울 텐데? 천선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잊지 마.”
구양, 구음신마의 도움을 받은 신흥사패와 패진무관이 합쳐 만들어진 곳이 바로 천선부였다.
그런데 패진무관에 비록 마교에서 쫓겨난 인물들이라고는 해도 구음, 구양신마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천선부는 무림공적으로도 몰릴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들로서는 극구 부인해야 할 일이었다.
어차피 증거도 없었으니, 그러면 한바탕의 헛소동으로 끝나고 말테니까.
“구절심이 익힌 무공은 괜찮은 거냐?”
왕일의 말에 석휘명이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점이 구절심으로 하여금 밖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고, 사부들을 배신하게 만든 요인이지.”
“설마 자신들의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은 거냐?”
“그래. 어차피 정파의 얼굴로 써먹을 놈이었기에 제자라는 허울은 씌워줬지만, 무공은 전수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기에 구절심으로서는 자신의 자리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고. 공동제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긴 해도 배운 무공은 다른 놈의 것이었지.”
석휘명의 말을 들은 왕일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을 듣지 않았어. 너와 마교가 허장천을 칠 수밖에 없는 이유 말이다.”
지금까지 들은 말만 해도 마교에서는 삼 일 밤낮을 두고 회의를 해야 할 정도의 정보였다.
그럼에도 석휘명은 아직 중요한 말이 남아있다고 항변하고 있었다.
“일단 자리를 좀 옮겨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단전을 파괴하진 않았다고 해도 너무 오랫동안 내력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몸이 말이 아니거든.”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일단 물어보고 올게.”
“좋아. 그 정도야 기다려 줘야지.”
***
석실의 문을 열고 나온 왕일의 눈에 화영영과 사마유운을 비롯한 마교의 수뇌부가 보였다.
“들으셨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제라도 불사심공을 포기하면 될 일이지 않은가? 허장천 그놈과 구설짐, 한철진은 차차 해결하면 될 테고.”
사마유운의 말에 왕일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을 드리지 못한 것이 있는데, 운공을 하지 않더라도 백회를 통해 꾸준히 내력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전 그것을 마냥 좋아했는데, 이제 보니 멈출 수 없는 죽음의 수레바퀴에 올라탄 모양입니다.”
운공을 하지 않더라도 내력이 꾸준히 유입된다면, 언젠가는 파국이 닥쳐올 것이었다.
“단전을 파괴하는 것은 어떠한가?”
왕일은 자신의 상태를 모르기에 사마유운이 저렇게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제 단전은 하나가 아닙니다.”
“알고 있네. 중단전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손을 쓰면 될 것이네.”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사람의 몸은 전부 단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단전과 중단전이 가장 내력을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에 그곳이 단전이라 불리며 내력을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으로 머리에 위치한 상단전이 세 번째인데, 지금 단전들을 모두 파괴하면 흘러들어오는 내력 전부가 상단전으로 몰릴 것이니 오히려 위험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왕일의 말을 들은 이들이 모두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었다.
“흠, 흠.”
“응? 아, 이거 또 미안하게 되었구먼.”
사마유운은 벌써 두 번째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요는, 불사심공의 특성상 단전을 없애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말인가?”
“예.”
사마유운은 왕일의 설명을 오로지 불사심공에 한해서만 국한해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은 다른 이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이해를 못하니, 설명 해봤자 입만 아프지.’
왕일도 그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럼 일단 놈을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세나. 아직 지껄일 말이 더 남은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석휘명을 옮기는 것은 적우가 알아서 하기로 하고, 모두들 자신들의 처소로 향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왕일에게 화영영이 묘한 기대를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화매.”
“응.”
“운아와 함께 교를 떠나 있을 수 있어?”
“풋!”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화영영을 보며 왕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남이 모처럼 비장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저렇게 비웃다니.’
“서방.”
“응?”
“혹시 서방이 해까닥 돌아버리면 그 석휘명이란 놈의 말대로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그래?”
“…….”
“여길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긴 마교야. 중원 사파의 우두머리라고. 교주님만 해도 아직 나는 넘볼 수 없는 경지야. 솔직히 서방이 아무리 돈다고 해도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일걸? 철심문따위에서 일어난 일이 이곳에서 재현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자신을 철저히 무시하는 발언이었지만 왕일은 다른 것이 더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