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화매, 시원해?”
“아주 좋아. 그런데 말이야.”
“뭐?”
꼼꼼하게 화영영의 어깨를 주무르며 왕일이 물었다.
“왜 이렇게 변한 거야?”
화영영도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었다.
그것이 자신과 운아에게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러나 석휘명까지 쉽게 버릴 것 같기에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깨달은 거지. 내게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화매와 운아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교에 남아야 한다는 것을.”
“그것뿐이야?”
“아니. 솔직히 정파에 몸을 의탁하는 것도 생각해 보긴 했어. 화매를 설득해 같이 갔을 때를 상상해봤지. 전혀 답이 나오지 않더라고. 잘 해야 숨어사는 거고, 못하면 칼받이나 암살당하는 거겠지.”
“생각 많이 했네?”
화영영이 기특하다는 듯이 왕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무슨 성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착한 놈도 아닌데,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가족보다 소중할 수는 없잖아. 그런 놈 같았으면 장우석을 죽이지 않았겠지. 그리고 이제 와서 그들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장우석만이 아니라 비급을 빼앗기 위해 죽인 많은 이들의 죽음을 무시하는 위선자겠지.”
“석휘명은?”
“당경이었다면 조금은 망설였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석휘명이지.”
“달라?”
“응. 둘은 다른 사람이야. 내게 있어 친구는 당경이지 석휘명이 아니야.”
“낭군.”
“응?”
“고마워.”
“그럼 화매가…….”
“내가 고맙다고 한 것은 미리 인사한 거야. 어서 가.”
“응.”
바로 일어난 왕일이 울고 있는 왕운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우는 거야?”
“난 먼저 잘게.”
“그래. 난 운이 재우고 잘 테니까.”
왕운을 안고 침실을 나선 왕일이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왕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할망구, 괴물딱지, 할망구, 괴물딱지…….”
“서방!”
화영영의 외침에 왕일이 계획한 작은 복수는 시작과 동시에 끝나고 말았다.
‘네가 한 모든 말들이 들어맞고 있어.’
연무실에서 왕일은 운공을 하며 자신의 내면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너야. 네가 믿고 싶지 않아서 애써 부정하는 것이나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뿐이지.]
‘그렇겠지.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스스로에게 대답하며 왕일은 내면의 소리가 했던 화영영에 대한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확실한 것이 아니야. 운이는 분명 내 아들이고. 그러니 그것은 잘못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아.’
[그럼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사마유운이 화영영에게 그렇게 많은 특혜를 베풀고 보살펴 준 것일까?]
물음이었다. 그리고 왕일은 그것에 대답하지 못했다.
‘누가 뭐래도 운이는 내 아들이야. 일단은 그것만 생각하자.’
내면의 소리와 대화를 나누며 왕일의 성격이 많이 변했고 사고방식도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왕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부분을 붙들고 늘어지는 상태였다.
그것마저 사라질 경우를 두려워하듯이.
* * * *
“오랜만이다.”
의자에 알몸으로 꽁꽁 묶인 석휘명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지만 목소리는 담담했다.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졌으며 손톱과 발톱도 모조리 빠진 상태였다.
그리고 몸 곳곳에는 불로지진 흔적과 아문 상처가 있었는데, 아마도 예리한 단검으로 살 거죽을 도려낸 자리일 것이었다.
“그래, 오랜만이네.”
“그건 선물이냐?”
왕일의 손에는 술병이 하나 들려있었고, 마개가 열려있었기에 달콤한 주향이 석실을 가득 채웠다.
“마시고 싶을 것 같아서.”
“고맙다.”
줄을 풀어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쳐든 석휘명의 입에 술을 조금 따라주었을 뿐이었다.
“크으~ 좋구나.”
“날 봐야 한다고 했다면서?”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술이 너무 고팠거든.”
“좋아.”
결국 술 한 병을 모두 마신 석휘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얘기 해봐.”
“많이 변했네?”
사무적인 말투의 왕일을 바라보며 석휘명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나 철부지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가?”
석휘명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는 얼굴과 건조하게까지 느껴지는 말투에서 자신의 계획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기댈 것은 그것뿐이구나.’
자신의 곁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왕일은 복수에 미친 복수귀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동안 많이 변했다고 해서 복수를 완전히 포기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린 친구 아니었냐?”
“친구? 물론 친구였지. 하지만 지금의 넌 아니야.”
“난 나잖아.”
“아니, 넌 석휘명이지. 내 친구는 당경이야.”
“뭐, 그렇게 생각한다니 아쉽군. 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왕일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할 말이 있긴 한 거야?”
“정말 변했구나.”
“설마 내가 연기라도 하는 줄 알았어?”
“아니. 그렇게 기대했지.”
“기대를 망쳐서 미안하지만, 난 예전의 내가 아니야. 할 말 없으면 간다.”
왕일이 몸을 돌리자 석휘명이 소리를 질렀다.
“복수도 포기했냐!”
“뭐?”
왕일이 몸을 돌리며 석휘명의 눈을 바라보았다.
“편한 생활에 젖어서 가정을 꾸리고 애도 낳으니 복수심도 사라진 거냐?”
석휘명의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면서 왕일은 그것을 파버리고 싶다고 느꼈다.
‘내가 왜 이러지?’
그래도 한때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목숨을 구해주었던 이의 양자였으며,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도와준 이였다.
그럼에도 왕일은 너무도 낯선,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석휘명을 대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거기다 이제는 적의까지 드러내는 중이었다.
[또 다시 멍청한 놈이 되려고? 저놈이 널 이용하게 두려고? 다시 운명에 휘둘리고 싶은 거냐? 운명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왕일의 머릿속으로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강하게 부정한 왕일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석휘명의 턱을 손으로 잡았다.
“내가 복수를 포기할 것 같아?”
붉은 왕일의 눈이 지저세계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어 석휘명의 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왕일은 석휘명이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겉으로는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누군지는 알고?”
석휘명의 물음에 왕일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장수련의 원수가 한철진이란 것은 왕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새삼 꺼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야?”
“네 부모님과 동생들을 죽인 놈들이 누군지 알고 있느냐는 말이다.”
말을 하면서 석휘명은 자신의 턱을 잡고 있는 왕일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그걸 알고 있다고?”
“그래.”
퍽!
“윽!”
석휘명의 대답이 들리자마자 왕일이 그의 턱을 후려쳤다.
“알고 있으면서 말을 안 했단 말이야!”
지금 이 순간 왕일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지독한 배신감이었다.
“퉷! 그러는 넌 내게 모든 것을 말 했어?”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석휘명이 왕일을 째려보았다.
“뭐?”
“넌 불사심공을 익혔어. 분명히 시중에 나도는 것들과는 다른 책을 얻은 거야. 그래서 그것을 익힐 수 있었겠지.”
석휘명의 말을 들으며 왕일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석휘명이 말을 하려고 할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적우가 그의 목에 단검을 겨눴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미숙하시군요.”
왕일을 바라보는 적우의 눈에는 책망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이놈은 그저 떠본 것뿐입니다. 대주님이 뭘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놈이다 보니 지금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을 테고, 그러다 보니 남은 것이 불사심공이란 말이지요. 외부에는 뇌정지기를 익혔다고 소문이 난 상태지만, 이놈은 대주님께서 뇌정지기를 수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부모님의 원수는?”
“그것도 거짓말일 것이 분명합니다. 대주님이 모르는 상황에서 이놈이 말을 한다고 해도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석휘명은 잔인하며 교활한 놈이었기에 왕일은 충분히 그가 자신을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
멍청하게 속은 것에 대한 분노와 가족들을 이용해 자신을 이용하려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겹쳐 왕일의 손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이대로 떨어진다면 석휘명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 분명했다.
“비룡장이다! 네 가족을 죽인 것은 비룡장이란 말이다! 비룡장의 사비룡이 바로 네놈의 가족을 죽인 장본인들이다!”
말을 하느라 적우가 겨누고 있는 검에 목이 닿아 피가 흘러내렸지만 석휘명은 개의치 않았다.
이성을 잃은 왕일이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하려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고문을 해도 죽이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달랐다.
“비룡장?”
왕일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올라갔던 팔이 천천히 내려왔다.
“그래! 비룡장이다!”
적우가 단검을 치워서 이번엔 상처를 입지 않았다.
“네가 비룡장에 대해서 조사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너와 뭔가 원한이 있는 모양인데, 대주님의 과거를 이용해 그것을 풀려는 생각이냐?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말하고 나면 너를 살려둘 이유가 없는데도 사실을 말했다고 우리가 받아들일 것이라 보았느냐?”
가만히 석휘명을 바라보는 왕일을 대신해서 적우가 물었다.
사실 지금 왕일은 그런 것들을 생각할 정도로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비룡장과 원한이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허장천 그놈에게 이용당한 것도 모자라 배신까지 당했고, 아버지까지 그놈에게 목숨을 잃었으니까.”
한 번 입을 연 석휘명은 모든 비밀을 털어놓기라도 하려는 듯이 자신이 일 호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것이며, 왜 당경으로 살아야 했던 것인지 모두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기억을 찾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 후에, 난 복수할 방법을 찾았는데, 비룡장이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을 확실히 몰살시킬 수 있는 곳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 교 말인가?”
“그래. 어차피 비룡장은 정파의 탈을 쓰고 있으니 마교가 적격이었지. 그런데 내가 기회를 노리는 동안, 놈들은 소림을 등에 업고 더 높은 곳으로 가버렸다. 이제는 비룡장을 치자면 소림을 위시한 정파놈들과도 싸울 각오를 해야 했기에 그놈을 죽이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지.”
“너는? 너 혼자 그놈을 암살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은데?”
“내가 암살을 한다고?”
석휘명이 당치도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희들이 허장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너보다는 강하다. 네가 아무리 적가장의 후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 마치 철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에워싸고 있기에 암살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래. 그놈은 위험을 감지하면 어둠속으로 숨어들 종자니까. 어차피 지금 있는 허장천이란 신분도 허상에 불과할진데 무엇이 아깝겠느냐?”
할 말을 다 했는지 석휘명이 왕일을 바라보았고, 적우도 고개를 돌려 왕일에게 시선을 맞췄다.
“사비룡이란 놈들이 어느 순간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다.”
드디어 왕일이 입을 열었고, 그것은 석휘명의 말을 어느 정도는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표현이었다.
“아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겠지. 제 제자들은 끔찍이 아꼈으니까. 그놈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제 부모도 버릴 수 있는 놈이다. 그런 놈이 우리보다 훨씬 약한 놈들을 제자랍시고 키웠던 것에는 분명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넌 알고 있겠지?”
“…….”
석휘명이 입을 다물자 왕일이 적우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