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렇군. 그런 거였어.’
운공을 하며 왕일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다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사람의 몸은 내력을 붙잡기 위한 부조화의 존재이고 몸 전체가 그러한데, 하단전이란 것은 보다 쉽게 내력이 고일 수 있는 곳에 불과해.’
불사지존이 한 말이었는데, 그것과 단전을 같이 생각하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심법을 수련하면 하단전으로 기가 먼저 향했기에 거기에 담아 놓는 것뿐이지. 그것을 채우고 늘이며 내력을 키워가는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 일거야.’
그렇게 따지면 중단전은 하단전 다음으로 내력이 고이기 쉬운 곳이고, 상단전은 세 번째로 몸에서 내력이 고이기 쉬운 곳일 뿐이었다.
‘몸 전체가 단전이 될 수도 있단 말이지.’
이론일 뿐이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단전과 함께 중단전, 상단전을 뚫은 이는 아직까지 없었다.
하단전이 망가져야 중단전을 이용했고, 상단전은 머리에 자리하고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시도하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있어도 미치거나 주화입마에 걸려 일찍 요절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에라,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나저나 이놈은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중단전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은 내력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 때문일까?’
백회를 통해 받아들이는 기운이 혈도를 돌면서도 줄어들지 않았고, 그 크기 그대로 내력으로 변해 하단전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제대로 된 무인이라 할 수 있겠구나.’
지금까지는 반쪽짜리 무인도 되지 못한 왕일이었다. 그러나 달라지리라.
[뭘 할 거지?]
갑자기 머릿속을 파고드는 물음에 왕일은 순간 운공중이란 것도 잊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구지? 누가 내게 묻고 있는 거지?’
서둘러 운공을 멈춘 왕일이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여전히 석실에 있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적우인가?’
잠영일호라면 자신을 부르러 왔을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하지만 그 질문은…….’
너무도 시기적절한 질문이었다.
제대로 된 무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마치 그것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물어왔으니까.
[힘을 가졌잖아. 이제 뭘 할 거지?]
다시 던져진 질문에 왕일은 그것이 적우나 여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진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전 음기가 가득 몰려왔을 때 자신을 위로해주던 목소리가 또 다시 찾아온 것이다.
‘심마일까?’
마음속의 소리는 자신을 달래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꼭 옳은 방향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무시당한 걸 갚아줘야 하지 않을까?]
‘무시당했다고? 내가?’
물론 그랬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뿐이었고, 그 뒤로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사마유운과 적우, 그리고 화영영까지.
심지어는 악불군도 자신을 함부로 대한다기보다는 친근하게 대한다고 느끼지 않았던가.
[누굴 생각하는 거야? 설마 휘명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순간 왕일은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휘명? 내가 휘명일 그렇게 생각했었나?’
마음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심마가 아니었다.
자신의 내부 깊숙이 숨어들어 있던, 아니 일부러 숨겨 두었던 내면의 소리였다.
[그놈은 널 이용했어. 너도 알고 있잖아.]
내면의 소리는 운공을 하는 내내 계속 되었고, 왕일은 그것에 부정하고 긍정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조금씩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미 알고 있던 것과 알면서도 외면하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넌 착한 놈이 아니야. 그리고 이기적인 놈이지. 지금까지 넌 너를 위해서만 살아왔어. 무공을 익히는 목적? 진짜 그 할망구 때문이라고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이제 그만 위선의 탈을 벗어버려. 착한 척 연기하는 것도 그만 두고.]
눈을 뜬 왕일은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뭘 어쩌란 거지?’
답을 구했지만,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죽지 않고 살아있었네?”
화영영의 말에 왕일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아들인 왕운을 바라보았다.
“많이 컸네요?”
“잘 크지? 너 없이도 잘 자란다. 걱정하지 마.”
조금은 차가운 화영영의 말이었지만, 왕일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봐도 되요?”
왕일의 시선은 왕운에게서 떨어져 화영영의 배로 향해 있었다.
“왜?”
“그냥요. 안 돼요?”
새삼 안 될 것도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은 부부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봐.”
왕운을 내려놓은 화영영이 앞섬을 풀어헤쳤다.
“다시 시작되었네요?”
왕운을 출산할 당시 왕일의 내공을 받아들인 화영영은 마치 완전히 치유된 것 같은 모습을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때보다도 더욱 심하게 갈라지고 부서진 상태였다.
“아프지 않아요?”
“고통도 익숙해지면 괜찮아. 그리고 운아는 내 기분에 민감하거든.”
미소를 지으며 왕운의 볼을 간질이는 화영영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머니의 그것이었다.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말 해봐.”
“전 화 장로님을 사랑하거나 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다만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무공의 단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었지요.”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라도 사랑하려고 해요. 아껴주고 싶어요. 운아의 엄마라서가 아니라 화 장로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왜?”
화영영의 말에 왕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예뻐서요.”
아주 간단한 대답이었는데, 그것이 화영영에게는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진짜?”
“예.”
“나도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알지?”
“예.”
“그렇지만 나도 이제부터 널 좋아하려 노력할게.”
“감사합니다.”
“자, 이제 불러봐.”
“흠흠. 크흠, 흠. 화, 화매.”
“잘했어.”
왕일의 볼이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저… 이제 그때 제 뺨을 때린 이유를 말해 줘?”
처음이 어려웠지 일단 화매라 부르고 나니 말을 놓기가 편해졌다.
“아직 정답을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기회를 주지.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맞춰봐.”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하던 왕일이 뭔가 알아차렸는지 얼굴을 들었다.
“화매를 신부로 맞고 싶어.”
“이제 알았어?”
“응. 그런데 내가 말을 놔도 괜찮아?”
“비슷하다면 서로 존대하는 것도 괜찮겠지.”
나이를 말함이리라.
화영영의 나이가 왕일의 세 배는 되니, 왕일이 존대를 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난 상관없는데… 뭐 그건 그렇고, 돈이 없으니까 보석 같은 것은 줄 수 없고, 대신 다른 것을 줄게.”
말을 하며 왕일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짐승.”
화영영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 * * *
가부좌를 틀고 있는 화영영은 침상에서 약 한 자 가량 떠있었다.
‘비록 내력을 다 쓰긴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어.’
홀딱 벗고 가부좌를 튼 여인이 공중에 떠있는 모습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보기 힘든 광경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신기한 모습을 구경했으니 내력을 소모한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내력이야 또 모으면 될 일이니.
‘진짜 선녀가 되었네.’
화영영의 변화는 놀라웠다.
뽀얀 살결과 붉은 머리카락이 어울리며 신비감을 조성했는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가슴을 지나 배를 살포시 덮으며 묘한 색기를 연출했다.
‘할망구라고는 절대 못 부르겠군.’
이십대의 청초함과 삼십대의 농염함을 갖춘 화영영의 모습은 월궁의 항아가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교주가 가만히 있을까?’
머리가 깨인 것인지 아니면 이전에도 알고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현재 왕일은 교주가 몸소 혈마교까지 온 것이 화영영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상태였다.
[네 아이일까?]
왕운을 바라보는 왕일의 뇌리에 다시금 소리가 들렸다.
‘모르지.’
[사마유운이 정말 저년을 가만뒀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해도 저년 얼굴과 몸매를 봐라. 널 만나기 이전에도 분명히 괜찮았었어. 뭐 물론 조금 흠집이 있긴 했지만.]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왕일은 계속해서 자극하는 목소리에 짜증이 났지만, 그 목소리에 변화하는 자신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마유운과 화영영의 관계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됐다. 어차피 네가 할 말은 뻔하니까.’
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왕일이 화영영이 벗어놓은 옷으로 왕운을 감싸 안아들고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계십니까?”
왕일이 전각을 나서서 허공에 소리를 지르자 역시 적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죽기 싫은 분들은 어서 자리를 피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리고 이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마시고요.”
“무슨 말이야?”
“글쎄요, 무슨 말일까요. 아무튼 전 경고 했습니다.”
말을 마친 왕일이 멀리 떨어진 곳의 지붕을 보며 외쳤다.
“부교주님! 전 분명히 경고 했습니다! 아셨죠? 몰래 엿보다가 화 장로님하고 생사결을 벌여도 전 책임이 없습니다!”
왕일의 말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지붕에서 뭔가가 쑤욱 하고 올라오더니 후다닥 도망을 쳤다.
“교주님은 괜찮겠죠?”
말이 끝나자마자 그 옆에 있는 전각에서 검은 그림자가 야천을 갈랐다.
“어이구, 다들 뭐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궁금하니까 그러지. 지금 기운들이 심상치 않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걸어가는 왕일의 옆으로 적우가 다가오며 물었다.
“아마도 화 장로님의 고질병이 완치될 것 같습니다.”
“정말이냐?”
어느새 다가왔는지 사마유운이 옆에 바짝 붙어 물었고, 그 뒤로는 악불군과 잠영대주와 남찬우가 서있었는데, 그들로서도 놀라운 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예.”
“오, 잘 되었구나.”
“축하드립니다, 교주님.”
남찬우의 말에 왕일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화매가 완치되면 교에도 좋은 일이니 그런 것이겠지.’
좋게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마음속의 소리는 그런 왕일을 자극했다.
[과연 그럴까?]
짤막한 말이었지만, 왕일의 마음속에 분노를 불러오기에는 충분했다.
“너도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 말해줄 수 있느냐?”
“운이 좋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장하구나. 혹시 화 장로의 상태가 변한 것도 그것과 관계가 있느냐?”
“예.”
어느새 연무장까지 나온 왕일이 자리에 멈추자 사마유운이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째서 먼저 찾아오지 않았느냐?”
사마유운의 말은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왕일이 화영영의 부작용을 치료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도 그러한 말이 사마유운에게 전달되지 않았으니, 이는 필시 왕일이 화영영을 치료하면서 아무런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묻는 것이었다.
“따로 화 장로에게만 바라는 것이라도 있었느냐?”
“아닙니다. 내 여자를 고치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왕일을 바라보았다.
“왜들 그렇게 보시는지?”
“아, 아니다. 그런데…….”
쾅!
사마유운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화영영이 있는 방향에서 폭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