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골치 아프겠군.’
[남은 아파 죽겠는데, 밖에서 빨리 안 낳는다고 재촉한 게 누군데!]
왕일을 낳을 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었는데, 동생이 태어나고도 훨씬 뒤까지 왕일의 엄마가 했던 말이었고, 부부싸움을 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기도 했다.
“저기… 한 번 안아 봐도 될까요?”
화제를 돌리려는 왕일의 말에 화영영이 못이기는 척 아기를 왕일에게 건넸다.
‘이렇게 작았나?’
한손으로도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아기는 배불리 먹었는지, 아니면 세상에 모습을 보이느라 힘들었는지 그새 잠이 들었다.
그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던 왕일이 갑자기 흠칫하며 아기를 떨어뜨릴 뻔 했다.
[형아 놀아줘.]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동생 왕운의 얼굴이 아기의 얼굴과 겹치며 그를 불렀던 것이다.
아기라면 막내였던 왕혜수가 떠올라야 함에도 왕운의 마지막이 너무도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있었기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왜 그래?”
파랗게 질린 왕일에게서 아기를 빼앗듯 안아든 화영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아마도 아직 아기가 다 마르지 않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종종 있는 일이지요. 남정네들이란 하나같이 싸지르는 것만 좋아하지,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니까요. 아, 말이 샜네요. 걱정 마십시오. 며칠 지나면 쭈글쭈글한 것이 사라질 테니, 그때쯤이면 예뻐 죽는다고 난리를 칠 것입니다.”
아무래도 노파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이름은 정했습니까?”
상황이 불리할 때는 화제를 돌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 왕일이 물었다.
“너는?”
“당연히 있지요.”
태연하게 말하는 왕일을 향해 화영영이 비웃음을 흘렸다.
“퍽이나 그랬겠다. 좋아, 일단 들어나 보자.”
“운(雲), 어떻습니까?”
“그건 네 동생 이름이잖아.”
화영영의 말에 왕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싫으신가요?”
긁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몇 가닥씩 떨어져 내렸다.
“아니, 싫진 않아. 그냥 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기특해서.”
사실 방금 생각난 것이었다.
***
“귀엽네요.”
노파의 말처럼 쭈글쭈글함이 사라진 아기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에 반해 왕일의 외모는 강시들과 싸운 후 얻은 화상으로 인해 조금은 흉측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네 자식이라고 그 몰골을 보고도 울지 않는 거 보면 신통하지 않냐?”
화영영의 말에 왕일이 피식 웃었다.
“그러네요.”
솔직히 뭘 알고 웃고 울겠는가마는 화영영의 말에 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똑같아?”
“예.”
화영영의 몸은 왕일의 내공을 꾸준히 받아들인 덕분인지 어느새 정상을 되찾고 있었는데, 부서지고 갈라진 살은 흉터만 남았을 뿐, 모두 아물었다.
하지만 왕일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분명히 단전 말고도 내력이 있는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화영영을 치료하면서 알게 된 뇌기의 존재였고, 몸 전체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처럼 그 힘을 쓸 수는 없었다.
“단전이 생겼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는 모양이네.”
“예.”
왕일의 몸에 숨어있는 그 힘은 엄청났다.
지금까지 운공을 하지 않았음에도 화영영에게 계속 내력을 전해줄 수 있을 정도로.
그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만 있다면 천하제일을 논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제 그만 가서 네 할 일을 해.”
이제는 화영영도 안정이 되었으니 다시 운공을 해서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 했다.
“요새 분주하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혈마교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파에서 뭔가 일을 벌이려는 것 같아. 아무래도 백독문과 관계가 된 모양인데, 그렇다면 소림 쪽이라고 봐야지. 그들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아서 그래.”
“아, 그렇군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왕일의 시선은 여전히 아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기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은 왕일이 몸을 돌렸다.
“야.”
“예?”
“머리카락 뽑아서 미안하다. 솔직히 그때는 정말 힘이 없었거든. 그런데 네 머리카락을 본 순간 그것만 잡을 수 있으면 힘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어. 예전에는 아기 날 때 애 엄마들이 신랑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 순간에 이해가 되더라. 그 심정을 알겠더라고.”
노리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제가 눈을 떴을 때, 노려본 것이 제 머리카락이었습니까?”
“응.”
왕일은 헛웃음이 나왔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머리카락이야 어차피 다시 자랄 테니까요.”
“좋아. 그런 의미에서 날 할망구라고 부른 거 용서해 줄게.”
“예?”
왕일은 화영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녀의 손이 목침을 잡아가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감사합니다. 저도 말을 해놓고 후회를 했었거든요.”
“그랬어?”
“예. 미친놈한테 미쳤다고 하면 그 미친…….”
쾅!
화영영이 던진 목침이 문을 부쉈는데, 그 자리엔 이미 왕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개새……."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참는 화영영의 품에는 왕운이 방글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격하고는.”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가는 왕일은 웃고 있었다.
“좋구나.”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집착을 버리니 마음이 평온하다는 것을 깨달은 왕일이었다.
“나를 위해서, 내 욕심을 위해서 무공을 익힐 때는 그것이 전부인 것 같았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 익히려고 하니 마음이 가볍습니다.”
왕일의 말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렸다.
“더 부담이 되지는 않느냐?”
적우였다.
“할망구에게는 효과가 있지 않습니까? 더 이상 높이 올라가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걸? 너 그러다 죽는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그 설마란 놈에게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잡아먹혔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지붕에서 뛰어내린 적우가 왕일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바쁘시다더니.”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말씀 하십시오.”
“앉아라.”
적우가 털썩 자리에 앉으며 옆을 두들겼다.
“소림과 문제가 있단 얘기는 들었지?”
“예.”
“넌 그게 어떤 것인지 아냐?”
“소림과 싸울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아느냐고.”
계속된 적우의 물음에 왕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뜻이 있습니까?”
“있지. 너에게는 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협개 좌영호, 독심 황만복, 그리고 황만복의 제자 천의 혁련종.”
적우의 말을 들은 왕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 알겠냐? 단순히 소림과 싸우는 것이 아니야. 그들 중에는 내가 말한 이들이 속해 있거든.”
무림의 은(恩)과 원(怨)은 마치 그물과 같아 어디서 마주칠지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설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거냐?”
“예.”
솔직하게 말해서 그들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교주님께서는 그들이 있는 곳에 널 보내려 하실 것이다.”
사마유운도 왕일의 과거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인데, 그러한 결정은 너무한 처사라고 할 수 있었다.
“무정하다 하겠지만, 네가 확실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여줘야 하지.”
“제가 아니라고 해도…….”
“물론 죽을 거다. 우리가 하는 일에 많이 방해가 되는 인물들이거든.”
“가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마교와 혈마교의 모든 일에 나설 수 없게 될 것이었고, 무공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나중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왕일도 알고 있었다.
“선택해라. 그들인지 교인지. 아니, 그들인지 화 장로님과 네 아들인지.”
잔인한 선택을 제시한 적우가 몸을 일으켜 떠나갔지만, 왕일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 * *
연무실에 앉아있는 왕일은 운공을 하고 있음에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분들을 죽일 수 있을까?’
목숨을 구해준 은인들이었고, 거기다 개방은 두 번씩이나 자신을 살려준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죽이지 못한다면 마교를 떠나 정파에 적을 두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그렇게 할까?’
특별히 마교에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왕일이었기에 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화영영과 아들 왕운이 마음에 걸렸고, 비단 그들만이 아니었다.
사마유운과 적우도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모르겠구나.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내가 운공을 계속하고 있는 한 일부러 깨우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 왕일은 마교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요한 듯 중요하지 않고, 쓸모없는 것처럼 보여도 절대 버릴 수는 없는 패였다.
화영영의 상세만 놓고 보더라도 왕일을 내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왕일도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굶어죽기 전에는 운공을 마쳐야만 했다.
아무리 내력으로 인해 보통사람과는 다른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먹지 않는다면 결국 죽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운공을 마쳤을 때, 빠르게 벽곡단과 물을 마시고 배설을 마친 후 누가 끼어들 여지도 주지 않고 다시 운공을 시작했는데, 그러길 벌써 세 번째였다.
‘이제 단전도 다 찬 것 같… 응?’
노력이 가상했는지 조금씩 빈 공간을 채워가던 단전이 드디어 꽉꽉 들어차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어졌을 때, 갑자기 일이 벌어졌다.
들어갈 곳이 없으면 넣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럴 때는 운공을 통해 기를 더 모아 단전의 크기를 늘리거나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숨과 함께 기운을 외부로 발출시키면 끝인 것이다.
그런데 단전이 꽉 차자마자 내공이 단전을 벗어나더니 혈도를 따라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백회로부터 기운을 흡수에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크윽!’
혈도는 무한정 늘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내력이 혈도에 들어서면 자칫 찢어질 우려가 있었고, 그렇게 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었다.
‘머, 멈춰! 멈추란 말이다!’
지금 왕일의 혈도는 포화상태였다.
내력이 길게 늘어진 상태라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어느 한 부분에서 막히거나 조금이라도 뭉치게 된다면 혈도를 갈가리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흡수되는 내력보다도 많은 내력이 모이고 있었다.
“컥!”
왕일의 입술을 비집고 피가 흘러내렸다.
‘위험해! 죽는다!’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위기에 처한 그때, 생각지도 못한 구원자가 등장했다.
그를 몇 번이나 구원해줬던 놀라운 자체치유력이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어째서?’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력이 무리하게 지나가며 상처를 낸 혈도를 치유력이 파고들며 곧 정상으로 만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한 길만 안다는 듯이 줄곧 내달리던 내력이 갑자기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기에 왕일은 내심 긴장했지만, 돌아온 치유력으로 인해 위기의식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쾅!
단전이 만들어 질 때 느꼈던 폭발의 기운이 다시 한 번 왕일의 정신을 강타했다.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심장 바로 옆, 몸의 중심인 명치에 자리한 중단전으로 내력이 파고들었고 이내 크기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여, 여긴 중단전인가?’
단전이 있다는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았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왕일로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운공을 계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