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크으…….”
술 한 병을 단숨에 마신 구절심이 생각에 잠겼다.
‘어디가 좋을까?’
가장 좋은 곳은 소림이었지만, 일단 자신이 구양신마와 구음신마의 제자라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그렇다고 마교에 손을 뻗칠 수도 없고.’
지금 중원을 지배하는 세 개의 세력 가운데, 두 곳이 모두 기피대상이었다.
‘그래도 내 살길은 마련을 해야 하는데…….’
최악의 경우 사부들에게 죽임을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한철진을 죽이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인 것 같구나. 아직 그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 같고.’
한철진을 빼돌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미리 준비한 훼손된 시체와 바꿔치기 하면 되었으니까.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구양신마와 구음신마가 한철진을 계속 살려둔 이유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응?’
술이 가득 들어 있는 술병을 잡아가던 구절심의 눈에 전서 하나가 들어왔다.
‘비룡장!’
소림과 협력관계이면서 묘하게 신흥사패에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비룡장이었다.
같은 안휘에 있으면서도 남궁세가의 손을 들어주기 보다는 소림을 지지하는 곳.
‘그러고 보니 저곳이 있었구나.’
신흥사패가 천선부로 바뀐 이상 패진무관도 비룡장과는 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룡장과 패진무관이라?’
소림 등 주류를 이룬 정파에 붙어 있는 비룡장과 신흥사패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천선부에 곁다리처럼 끼어 있는 패진무관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놈들도 뭔가 노리는 것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서로의 뜻이 맞을 수도 있었다.
‘한 번 연락을 해봐야겠구나.’
슬쩍 찔러보고 반응이 있으면 연수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
“빌어먹을!”
세상에 심법은 많았다.
마교에서 보유하고 있는 수준 높은 내공심법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그 많은 심법들 중에서 왕일에게 맞는 심법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실험동물도 아니고…….”
현재 혈마교는 차라리 마교라 불러야 할 정도였는데, 교주인 사마유운을 비롯해 부교주인 악불군과 남찬우, 잠영대주, 화영영 등등 마교의 유력인사는 모두 혈마교에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모이게 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왕일에게 단전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이제 진짜 남은 것은 하나뿐인가?”
왕일의 몸에는 얕은 상처들이 가득했는데, 단전이 생기면서 치유력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지금 그의 몸에는 내력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똑똑.
“들어오세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사마유운과 화영영을 비롯해 악불군과 남찬우, 잠영대주가 모습을 보였다.
“실패했느냐?”
“예.”
“음… 어쩔 수 없구나.”
사마유운의 말에 중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것은 불사지존의 심법뿐인가?”
현재 왕일은 자신이 배운 모든 것들과 백회를 열게 된 경위를 모두 밝힌 상태였다.
비밀은 없었다.
살아온 모든 날들을 기억나는 것에 한해선 전부 까발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죽었다 살아난 부분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도 기억이 없었기에 번개를 맞은 것과 공격을 당해 멎었던 심장이 다시 뛰게 된 것은 말하지 못했다.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독심 황만복이 치료를 해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왕일도 불사지존의 심법을 익히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뤄왔던 것인데, 이제는 정말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자.”
이틀 전에 사마유운이 전해준 것은 바로 자신의 심법이었다.
화영영 등이 호법을 서는 가운데 사마유운이 왕일의 등에 손을 대고는 내공을 흘려 넣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쯤 사마유운이 긴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기사로구나.”
집어넣은 내공을 이용해 혈도를 파악한 것은 이전에도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 작업 자체가 힘이 들었으니 이는 혈도를 돌던 내공은 점차 그 부피가 줄어들었고, 그만큼 더욱 큰 힘을 쏟아 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던 사마유운이었기에 이번엔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자신의 심법에 맞춰 혈도를 돌린 내공을 억지로 왕일의 단전에 밀어 넣으려 했던 것이다.
이는 자칫 왕일의 내공과 충돌이라도 일어나면 주화입마가 아니라 육체 자체가 터져버릴 위험이 있는 행동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중원에서 수위를 달리는 사마유운이 땀을 흘릴 정도로 막대한 내공을 쏟아 부었음에도 왕일의 단전에 도착한 내공은 그 양이 미미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단전에 도착한 내공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아귀와 같구나.’
왕일의 몸은 내공을 먹어치우는 굶주린 아귀였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못하는 아귀처럼 왕일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내공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거늘, 그것을 알 수 없구나.’
생각을 마친 사마유운이 입을 열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게나.”
그의 말에 화영영 등이 방을 나섰다.
“진정한 네 속내를 듣고 싶구나.”
불사지존의 심법은 그 폐해가 드러난 무공이었다.
아무리 왕일의 조건이 불사지존과 비슷하다고 해도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네가 포기하면 된다. 지금까지는 네가 무공을 익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해왔기에 그러한 것이다. 뇌기를 찾는 것과는 다르지.”
사마유운의 말에 왕일의 머릿속으로 번개를 맞는 장면이 떠올랐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왕일은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한 것들과 앞으로의 방법이 뭐가 다르지? 내 무공의 중심은 뇌기였어. 현재는 그것이 사라진 상태고. 그걸 포기한다는 것은 나에게 죽으라는 것과 같아.’
왕일도 조금은 사마유운과 화영영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차린 상황이었다.
항시 화영영의 곁에는 사마유운이 있었으며, 그가 화영영을 바라보는 눈길에 깃든 감정을 느꼈다.
‘쓸모가 다한 나를 살려둘까?’
미련이 있어 살려두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곱게 모셔 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분명 온갖 실험을 하겠지. 내 무공을 찾기보다는 뇌기를 되돌리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여태 내게 베푼 친절은 모두 화영영을 위한 것들이야.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그것 말고도 쓸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잊힌 사람이 될 것이었다.
‘그럴 순 없어.’
아무리 퇴색되었다고 해도 복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마유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철진은 패진무관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것 같더구나.”
“예?”
마치 왕일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은 말이었다.
“모든 권한을 구절심이란 총관에게 넘겼는데, 그가 패진무관의 관주로 등극했다. 한철진은 무공수련에만 열중을 한다며 폐관에 들었다고 하였다만, 우리는 그가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판단하고 있다.”
“그럴 리 없습니다!”
한철진은 왕일에게 있어서 복수의 큰 축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선 안 될 인물인 것이다.
“네게 한철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지만, 현재로선 죽었다고 보는 게 옳다.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한철진에 대해 알아보려했음에도 전혀 그의 존재를 증명할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보려다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또한 네 마을에서 학살을 저지른 이들에 대해 조사를 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복수도 좋지만 조급함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무공을 쓸 상대도 없지 않느냐?”
사마유운은 은연중에 왕일로 하여금 무공을 포기하라 권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실험해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지. 그것은 도저히 익혀서는 안 되는 무공이란 것을 말이다. 불사심공? 필사심공이라 불러야 옳은 무공이다!”
사마유운이 답답한지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제가 아니었죠.”
왕일은 자신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 같다고 여겼다.
‘왜?’
좀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다른 방도를 강구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당장 불사심공을 익히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발인가?’
사마유운의 말투가 그것을 부채질한 것 같았다.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일까?’
처음부터 불사심공을 익히지 말라고 했다면 조금 더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말을 돌려가면서 은연중 표현을 하자 왕일이 그것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순간 왕일의 머리에 화영영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질투?’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질투한다고? 그런 할망구를?’
비록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긴 했지만, 한 번도 자신의 여인이라 여긴 적은 없는 왕일이었다.
‘어차피 결과는 같았을 거야. 깊게 생각하지 말자.’
생각을 정리한 왕일이 사마유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불사심공을 익히겠습니다.”
그런 왕일을 사마유운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왜 안 되는 거지?’
왕일은 불사심공을 운공하기만 하면 단번에 효과를 보고 절세고수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백회를 통해 들어온 기를 역천이라고까지 불릴 기이한 방법으로 운공을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단전으로 들어가는 기의 양은 적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답답한 마음에 왕일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타 심공과 비교했을 때, 받아들이는 양의 크기에 대해서는 늘었지만 혈도를 돌리다보면 그것이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엔 단전에 도달하는 양의 크기도 줄어들었다.
물론 다른 심법들과 비교했을 때 양이 많긴 했지만,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다.
“미치겠네.”
불사심공이 모든 문제의 답이 될 것이라 믿었는데, 그 믿음이 짓밟힌 상황이었다.
“이 따위 걸 그리 고민했단 말이야?”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들이 아까웠다.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단전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내공들로 생각을 돌렸다.
“분명히 외부로 배출되는 것은 아니야.”
그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운공을 하는 동안에는 외부의 기에 민감해지는데, 들어오는 것은 있어도 나가는 것은 없었던 것이다.
“술! 술을 더 가지고 와라!”
쨍그랑.
비틀거리는 왕일의 손에 맞은 빈 술병이 탁자에서 굴러 떨어져 깨졌다.
“이게 누구야? 끅! 잘 나신 화영영 장로님이잖아? 어쩐 일로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나?”
왕일의 앞에는 화영영이 차가운 얼굴로 서있었다.
“내가 좌절하는 모습을 즐기러… 컥!”
콰직!
화영영의 발에 배를 맞은 왕일이 창문을 부수며 날아갔는데, 그런 왕일의 뒤를 화영영이 우아하게 날아오르며 따랐다.
“이년……!”
왕일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화영영의 발과 주먹이 여름날 쏟아지는 장맛비와도 같이 왕일을 향해 날아갔다.
왼쪽을 때린 것 같은데, 어느새 오른쪽을 후려쳤기에 중심의 축이 어긋나지 않아 왕일은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네놈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오늘은 그걸 확실하게 가르쳐 주마.”
공격이 멈추자 왕일의 신형이 무너지듯 쓰러졌지만, 화영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일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그의 머리카락을 틀어쥐고는 질질 끌었던 것이다.
“윽! 이, 이거 놔… 컥!”
머리카락을 붙잡아 왕일을 눈높이로 들어 올린 화영영이 목을 틀어쥐었다.
“맹세하는데, 앞으로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죽여주겠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또박또박 내뱉어지는 화영영의 말 속엔 스산한 살기가 스며있었고, 왕일의 취기를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죽는다!’
왕일의 붉은 눈이 위협감을 주는 눈이라면, 화영영의 차가운 눈은 상대에게 조각조각 부서지는 공포를 주는 눈이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왕일을 본 화영영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좋아.”
말을 마친 화영영이 여전히 머리카락을 잡은 채로 질질 끌었지만, 왕일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저기 저들이 보이냐?”
화영영이 왕일을 끌고 간 곳은 어린 소년소녀들과 젊은이들이 모여 무공을 익히고 있는 곳이었다.
난데없는 화영영과 왕일의 출현에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 그것은 곧 사라지고 무공을 익히는 것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