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가실 시간입니다.”
한철진이 말없이 일어나 방을 나서자 구절심이 그의 뒤에서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구절심은 한철진의 뒤에 서 있었다.
한 번도 옆이나 앞에 위치한 적은 없었다.
그와 나란히 있는 순간은 지금처럼 스치듯 지나갈 때 뿐이었다.
방을 벗어나 걸어가는 동안 마주치는 인물은 없었으나, 한철진은 딱히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은 창살 없는 감옥, 고립된 섬, 그리고 한철진은 철저한 이방인이자 소외자였다.
어쩌다 마주치는 이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한철진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패진무관의 관주라는 허구의 인물에게 숙이는 것이었다.
거대한 관주전이라는 배는 망망대해에 떠있었고, 그곳의 선장인 한철진은 배의 주인일 뿐이었다.
키도, 노도, 닻도, 돛도 없는 그저 흐르는 물살에 휘말려 흘러가는 거대한 배의 주인.
그것을 움직이는 패진무관이라는 대해는 그에게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 한철진의 귀에 구절심의 목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깰 시간이다.”
나지막한 그 목소리에 한철진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뭐… 큭!”
뒷덜미에 느껴지는 충격에 정신을 잃으며 한철진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음침한 미소를 짓고 있는 구절심의 얼굴이었다.
***
“놈은 어떻게 했느냐?”
성황리에 천선부의 출범식을 마치고 실질적인 패진무관의 주인이 된 구절심을 향해 구양신마가 입을 열었다.
“지하석실에 가둬 두었습니다. 아마 지금쯤 눈을 떴을 것입니다.”
그런 그의 옆에는 한철진이 서있었지만, 왠지 분위기가 달랐다.
허무하고 퇴폐적인 느낌을 주던 그였는데, 지금의 한철진은 무척이나 밝고 당당하게 보였다.
다만 얼굴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가 병약하게 보이게 할 뿐이었다.
오늘 그가 한 일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구절심에게 양도한다는 말을 한 것 외에는 없었다.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네.”
대답을 하고 나가는 구절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양신마가 남아있는 한철진을 향해 고갯짓을 하자, 그가 깊숙이 읍을 하고 물러갔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아무리 부림을 당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입장이었지만, 한철진은 언제나 동반자의 관계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상대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그가 이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것이었다.
구양신마를 만나고 나온 구절심의 눈에 살며시 살기가 흘렀는데, 외부로 표출되지는 않았기에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눈치를 챈 것인가?’
언제부터인지 구양신마와 구음신마 두 사람이 함께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특히나 구절심과 만날 때면 더욱 그러했다.
‘아니야. 사부들이 눈치를 챘다면 나를 그냥 둘리가 없지. 그럼 무엇 때문일까? 의심인가? 혹시 증거를 찾기 위해 시간을 버는 것인가? 그렇지만, 사부들의 성격상 증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텐데?’
구절심은 괴물 같은 사부들이 죽기만을 기다릴 정도로 느긋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지금은 패진무관의 주인으로 사람들에게 나섰지만, 어찌 보면 한철진의 입장과 다른 것이 별로 없다고 여겼다.
늙은 두 사부의 명을 따르는 꼭두각시.
거기다 지금은 사부들을 따르던 철없던 꼬마도 아니었고, 혈기왕성한 청년도 아니었다. 이제는 그도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구절심은 이렇게 하릴없이 누군가의 입 역할을 하다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거기다 이제 이렇게 무대가 마련되었으니, 분명 마교와 결판을 내던가 아니면 정파와 드잡이질을 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정파와 붙는 것은 마교를 처리하고 난 후겠지만. 그것이 끝난 후에도 사부들이 살아있다면?’
물론 그 후에 영광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전쟁이 시작되고 난 후라면 너무 늦다. 그 전에 처리를 해야 해!’
물론 다른 동맹관계에게는 비밀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이 구양신마와 구음신마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의 동맹관계가 깨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최악의 경우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놈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는 그 나름의 생각이 있지만…….’
다름 아닌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 한다는 명분이었다.
구양신마와 구음신마는 한때 마교에 몸을 담았던 이들이었기에,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것이 없었다.
그것을 내세워 동맹문파들의 협조를 얻으면 그만이었다.
절대 고수라는 두 사람의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구절심은 그것이 없다고 해도 잘 해 나갈 자신이 있었다.
이미 자신은 두 사람의 진전을 거의 이었기에 충분히 하나의 몫은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놈들도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다른 놈들에게 알리기 싫겠지. 또한 우리를 이용해 저지른 수많은 비리들도.’
자신을 제거하려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대비를 해 두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이것을 이용해 놈들을 제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왜 사부들은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같이 떠올랐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그것도 나름대로 알아봐야겠군.’
구절심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당도한 곳은 지하 깊숙이 자리한 하나의 석실이었다.
***
“정신이 드느냐?”
한철진이 눈을 뜨자 구절심의 얼굴과 함께 그의 음성이 들렸다.
뒷목이 뻐근한 것이 맞을 때 잘못된 모양이었다.
어쨌든 음성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무언가가 그의 이마를 누르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네놈을 당장 죽일 수도 있지만,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이다.”
구절심이 한철진의 눈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이냐?”
“무슨 소리냐!”
일단 한철진은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에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하였다.
“이년의 죽음을 숨긴 것 말이다.”
축 늘어진 적미정이 구절심의 손에 들려 있었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김없이 삭발된 상태였다.
“뭐, 뭐하는 짓이냐! 이놈! 그녀를 어떻게 한 것이냐!”
“뭐하는 중이냐고? 글쎄다. 뭐하는 중일까?”
능글능글하게 미소를 지으며 적미정을 한쪽 구석으로 집어 던진 구절심이 마치 고민하는 것처럼 이마를 눌렀다.
그 모습에 한철진은 분노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석실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는 것이 전부였다.
“이놈 감히!”
“크큭, 그런대로 쓸 만한 몸뚱이였는데 말이야. 왜 그런 눈을 하지? 아아, 아직 몰랐나보군. 난 또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자, 여기가 어디일까?”
석실을 가리키며 키득거리는 구절심이었지만, 그럴수록 한철진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이곳이 어디냐면, 네놈이 아침에 방을 나서고 나면 내가 이년을 귀여워 해주던 곳이다. 어때? 이곳이 마음에 드나?”
“네, 네놈!”
“말랐지만, 그래도 탄력이 있는 몸이었지. 거기다 약을 주면 더 발광을 하면서 품속으로 파고들었는데, 아주 좋았었어.”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릴 테다!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 으아아아아악!”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구절심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고 싶었지만, 그것은 이룰 수 없는 바람이었다.
온 몸이 구속되어 그저 발버둥 치는 것이 한철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질기다더니, 그 말이 맞는 말인 것 같군.”
말을 한 구절심이 한철진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한철진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을 하였다.
“지금 네놈을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바로 네놈이 그리 애지중지 하던 적가년의 머리카락이다. 어때? 내 배려가? 마지막이나마 그년과 같이 있게 해주려는 내 세심한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나?”
한철진은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몰랐다. 그저 흐를 뿐이었다.
그렇게 한철진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런, 이런. 겨우 이런 일로 고마움에 눈물까지 흘리다니, 이러면 내가 너무 무안해 지잖아. 자, 그럼 고마움의 대가로 내 궁금증을 좀 풀어 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첫 번째는 사부들이 어째서 너 같은 놈을 여태 살려뒀냐 하는 것이다. 진즉에 네놈을 대신할 놈을 세우면 되는데 말이야. 두 번째는 과연 이 년의 죽음을 숨기고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느냐다. 어때? 쉽지? 자, 이제 대답을 들어볼까?”
구절심의 말에 한철진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머리에, 팔에, 다리에 느껴지는 적미정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래. 네놈이 은혜를 아는 놈이라고는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한번 놀아 보도록 하자꾸나.”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일까?
한철진의 감겨 있던 눈이 부릅떠졌다.
“아프지? 난 참 이해가 안 되더라고. 고문이란 자고로 대상에게 상실감을 주고, 두려움을 주어야 하는데, 겨우 쇠꼬챙이로 손톱이나 발톱을 찌르고 있으니 말이야. 어이, 너무 괴로워하지 마. 이제 겨우 손가락 한 마디가 없어지는 중이니까.”
그저 잘랐다면 순간적인 고통으로 끝났을지 몰랐다.
하지만, 구절심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줄 톱으로 야금야금 자르고 있었다.
그 고통이 어떨지는 당한 한철진만 알겠지만, 흐르는 땀과 악다무느라 부러져버린 이빨, 그리고 찢어진 눈 꼬리에서 흘러내린 핏줄기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
“놈이 무어라 하더냐?”
구양신마의 물음에 구절심이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 적가년의 죽음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같잖게 사랑했다고 하더군요.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오늘 사부님들의 의혹에 대해서 밝히려고 했답니다.”
패진무관과 신흥사패의 밀착관계를 모르는 이가 없었고, 이미 소문도 퍼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천선부의 발족식에 남궁가의 가주인 남궁창성과 당가의 태상가주인 당만, 화산파의 문주인 유세원과 종남파의 문주인 송시열이 한철진과 같이 모습을 보여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없었다.
뒤이어 구절심이 남궁민, 당종휘, 화산일검, 종남신검 등 신흥사패의 후계자라 일컬어지는 이들과 함께 나타나자 열광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계인이 선명한 사람들과 도복을 입은 이들이 있는 곳은 심각한 분위기였다.
오지 않아도 될 자리였지만, 소림등에서도 사람들을 보냈고 한철진은 그들에게 패진무관이 마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알릴 셈이었다.
“미련한 놈. 겨우 여자 하나 때문에 삶을 포기하다니.”
사실 수작만 부리지 않았어도 구양신마는 한철진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혹시나 있을 대외관계에서 한철진이 맡아야 할 역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구절심으로 하여금 한철진에게 신경을 쓰도록 하는 역할도 했었다.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것 같은 한철진을 계속 놔둠으로써 구절심이 오해를 하게 만든 것이다.
“놈들의 시선이 너를 향할 것이니 더욱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일인자와 이인자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간 한철진에게 쏠렸던 관심이 일거에 구절심에게로 몰릴 것이기에 이 같은 만남도 자제해야 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구현현에 가는 것은 삼가도록 해라.”
구양신마의 나직한 말에 구절심의 몸이 굳어버렸다.
“비록 아이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우리와 신흥사패와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려면 그들 중의 하나와 혼인을 해야 한다, 그러니 그 아이에 대한 것은 비밀로 하자꾸나.”
“그, 그녀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구절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우가 안전한 곳으로 옮겼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당분간은 비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말하는 구양신마의 얼굴에 득의의 빛이 떠올랐다.
‘놈, 허튼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몰랐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감히 우리를 배신하다니! 네놈이 비록 천생의 반골이라고 해도 한철진 그놈과 같은 쓰레기일 뿐이다. 겨우 계집 하나에 정신을 빼앗기다니.’
마교에 있을 당시에도 구양신마와 구음신마는 가정을 이루지 않았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약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에 관한 것은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그때 가서 다시 얘기를 하도록 하자. 그리고 나중에 내가 연락을 하기 전까지는 패진무관을 완벽히 장악하는 일에만 몰두하도록 해라. 완벽한 패진무관의 관주가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그만 나가보아라.”
힘없이 일어선 구절심이 문을 나설 때, 구양신마는 마음속의 감동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다.
‘비록 연단에 서있지는 못했지만, 마교의 핵심이었던 우리가 정파의 축하 속에서 개파 선언을 하게 되다니.’
사실 처음 계획은 정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면 여론을 몰아서 마교를 치게 하는 것에 있었다.
신흥사파도 그것에 찬성을 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조금 더 높은 목표를 가지게 된 것이다.
‘정파의 수장이라?’
다시 생각해도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한 계획이었다.
***
‘걸려들었어.’
구절심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고 다시 만들면 그만인 소모품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여자 따위에 휘둘릴 줄 알았나?’
이런 날을 대비해서 마련해 놓은 것일 뿐이었다.
상대가 약점이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라며 만든 여인의 존재로 인해 구절심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벌 수 있었다.
‘날 옭아맸다는 생각에 감시의 눈이 허술해질 수 있어. 물론 당장은 그렇지 않겠지만, 조만간 그리 되겠지. 현 무림의 상황이 그리 녹녹치 않으니까.’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약간의 충격에도 끊어져 잡고 있는 이의 손을 다치게 만들 정도로 무림은 폭풍전야였다.
“술을 가져오너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구절심은 시녀에게 술을 달라 소리치고는 거칠게 탁자위에 있던 서류들을 흩어버렸다.
‘보고 있겠지?’
구절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라면 여인의 존재를 알아내지 못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