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여긴?”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지만, 전장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돌아온 건가? 으윽!”
몸을 움직이려다 극심한 고통에 신음을 흘린 왕일이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젠장,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 같구나.”
억지로 가부좌를 튼 왕일은 어둠속에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밤인 것 같은데, 왜 치유가 되지 않는 거지?”
그의 몸은 밤의 기운인 음기를 양분삼아 어떠한 상처라도 치유했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황급히 기운들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그의 명을 듣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전도 텅 비었어.”
가만히 있어도 기운이 차던 왕일이었다.
그런데 단전이 생겼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모든 것들이 변해버린 것이다.
“혹시?”
황급히 토납법을 하자 기운들이 조금씩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고 혈도를 흐르다 단전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너무 적어.”
단전이 개라면 지금 느껴지는 기운들은 벼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대만의 심법을 해볼까?”
혈도도 모두 뚫려있는 상태였고, 단전도 있으니 벽력권 정대만의 심법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왕일은 순간 망설였다.
“그것으로 될까?”
잠영일호인 적우가 비웃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왕일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맞아도 죽지 않고, 찔러도 죽지 않는다. 오늘 죽어도 내일 다시 살아난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죽음도 물러서고, 오로지 그의 손만이 죽음을 인도한다. 누가 있어 그에게 죽음이 실재함을 보여 줄 것인가?
죽음의 지배자. 그가 바로 불사지존이다.]
‘어차피 백회는 뚫려있어.’
단 하나 걸리는 것이라면 마호성의 대답이었다.
[사람 잡기 딱 좋은 거지.]
거기다 불사지존도 제정신은 아니었다고 평가되지 않았던가.
‘일단은 정대만의 심법으로 해보자. 그것이 된다면 다른 심법을 구해달라고 해도 될 테니까.’
기본인 토납법이 성공했으니 그 위의 단계인 심법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여겼다.
그래서 열심히 내공을 입으로 받아들인 후에 단전으로 보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제기랄!”
환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왕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토납법으로 받아들인 기는 문제없이 혈도를 돌다가 단전으로 들어갔지만, 정대만의 심법으로 돌린 기는 이전처럼 혈도를 타고 돌다가 흔적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방법밖에 없는 걸까?”
왕일의 머릿속에 다시금 불사지존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심법은 많으니까.”
화영영에게 부탁해서 다른 심법들을 구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도 통하지 않는다면 왕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었다.
물론 불사지존의 심법이라고 다를 것이란 보장은 없었지만.
***
“재밌는 구도구나.”
한 장의 넓은 종이를 바라보는 석휘명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그곳에는 왕일이 머물고 있는 혈마교와 마교, 그리고 소림을 포함한 무림맹과 신흥사패, 패진무관이 함께 적혀있는 천선부, 그리고 비룡장이 각기 한 부분을 차지하며 적혀있었다.
“비룡장은 소림과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룡회는 해산되었을 지라도 그 세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비룡장이니까.”
이제 세상에 오룡회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고, 있는 것은 비룡장뿐이었다.
“혈천강시의 제조법을 가진 고루문의 후인, 그게 바로 허장천 그놈이고 아버님은 불사지존의 심법을 개량한 무공을 가진 철심문의 후인이셨지. 그러니 그것들을 손에 넣은 허장천 그놈이 얌전히 있었을 리가 없어. 분명 뭔가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해.”
말을 하며 한쪽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든 석휘명이 이마를 찌푸렸다.
“허가 놈의 제자들이 보이지 않은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단순히 폐관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그 제자들을 이용해 꾸밀 것이라고는 한 가지뿐이라 생각하는 석휘명이었다.
“강시! 강시가 분명해. 우리 철심문의 무공을 배우기에는 놈들의 성취나 나이가 걸리니까.”
고루문의 후인이니 분명 혈천강시를 제작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놈은 그렇다고 치고, 천선부 이놈들은 뭘까?”
현재 중원에는 하나의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었는데, 신흥사패와 패진무관이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 그 연합의 이름을 천선부라 한다는 것이었다.
“신흥사패는 원래 정파였으니 제외하고, 구양신마와 구음신마 그놈들이 패진무관을 빌어 본격적으로 무림의 일에 나서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곧 무림에 폭풍이 몰아칠 것이었다.
“꼬리를 쫓는 형국이야.”
비룡장은 천선부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마교는 구양신마나 구음신마와 불구대천의 관계였다.
그리고 정파와 마교는 원래부터 앙숙이었다.
거기에 백독문까지 더해졌고, 정파는 세를 나눠 대치하고 있었다.
혼돈의 상황인 것이다.
“뭔가 계기가 마련되면 서로를 물어뜯으려 달려들겠지?”
일촉즉발.
불씨 하나만 던져진다면 무림이라는 거대한 숲은 재가 될 때까지 타오를 것이었다.
“흐흐흐,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나 하나뿐이야. 그러니 너희들의 운명도 내가 쥐고 있다는 거지.”
천선부는 비룡장의 정확한 실체를 모르기에 아직까지 확실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에 의해 멸문한 문파들의 모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까지와 같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리라.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무너진 석가장에서 석휘명은 석호천이 남긴 유지를 얻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가진 상태였다.
“곧 허가 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주먹을 움켜쥐며 석휘명이 복수를 다짐하는 이곳은 마교의 깊고 깊은 지하였다.
***
드르륵.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 온 한철진이 물끄러미 침상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침상에는 피골이 상접한 한 여인이 죽은 듯이 누워있었는데, 바로 적미정이었다.
가늘게 이어지는 숨소리와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은 그녀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침상에 가까이 다가간 한철진이 이불을 걷자 그 속에서 초라한 몸이 드러났다.
얇은 침의만 걸친 적미정의 몸은 추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몸을 안아든 한철진이 옆방에 마련된 욕조로 향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욕조 안에는 꽃잎이 몇 개 떠다니고 있었다.
한쪽에 마련된 간이 침상에 적미정을 눕히고, 옷을 벗은 한철진이 그녀의 옷도 벗기더니 같이 욕조에 들어갔다.
정성스레 발부터 머리까지 씻기는 한철진의 손길은 한 없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초점 없는 눈동자, 생기 없는 얼굴.
아름다웠던 적미정이었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추한 몰골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한철진의 행동은 그녀가 정상이었던 때보다 훨씬 지극정성이었다.
적미정을 다 씻긴 한천진이 그녀를 침상으로 데리고 가 눕히는 순간, 미약한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형…….”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철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근 두 달간 적미정은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 음성은 너무도 포근했다.
[약! 약을 줘! 주인님, 약을 주세요. 제발…….]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음성은 악에 받쳐 있었고, 애달팠으며 간절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있는 것은 약에 대한 탐심과 이성을 제압한 약 기운이 내뱉는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음성은 미약했지만, 또렷했고 그 대상을 분명하게 하고 있었다.
한철진이 적미정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흐리멍덩함 속에서 작게 빛나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형?’
“여기… 여기가 어디죠?”
“방이야.”
“제 방이 아닌가 봐요.”
“응. 사매가 많이 아파서 송의원 댁으로 옮겼어.”
“제가, 제가 어서 일어나야 사형이 힘들지 않을 텐데…….”
“아니야. 힘들기는. 사매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몸을 낫는 것만 생각해.”
아마도 패진무관이 습격을 받고 적요신과 홍동곽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때로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기억이 그때로 되돌려 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한철진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사형…….”
“응? 왜?”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고생이 많으신가 봐요.”
세월의 흔적과 그간 방탕한 생활로 망가진 얼굴이었다.
“고생은…….”
“고마워요.”
갑자기 한철진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도 이랬었다.
부친과 정인을 한꺼번에 잃고 시름시름 앓던 그녀를 돌볼 때 그녀의 따뜻한 시선을 받을 수 있었고, 결국 약해진 그녀의 마음을 뚫고 혼인을 할 수 있었다.
“사매, 이까짓 병은 훌훌 털고 일어나야지.”
“…….”
“사매?”
옅은 미소를 띤 채 눈을 감은 적미정은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자신의 손을 한철진의 손에 맡긴 채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사매?”
불러도 대답 없는 연인의 모습에 한철진은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짓눌렀다.
너무 늦게 안 사랑에 절망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후회하면서 그렇게 한철진은 숨죽여 흐느꼈다.
크게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지금도 이곳을 감시하고 있는 놈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한철진이 손으로 적미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행여나 그 미소가 사라질 것이 두려워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차라리 원망을 했다면, 자신을 저주하면서 죽어갔다면 이렇게까지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된 사랑의 방식으로 인해 망가진 삶과 영혼을 돌려놓으라며 악을 썼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고마웠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이 순간에 마지막 선물을 준 그녀가 한 없이 고마웠다.
‘내세가 있다면, 영혼이 있다면, 내 너의 신발이 되리라. 가시밭길이 나오면 내가 피를 흘릴 것이고, 자갈길이 나오면 내가 문드러지리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내 너의 옷이 되리라. 북풍한설이 불어오면 내가 얼어 부서질 것이고, 뜨거운 폭염이 덮친다면 내가 녹아 흘러내리리라. 너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너무, 너무 늦게 알았다.
자신이 적미정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
드디어 날이 밝았다.
오늘은 패진무관과 남궁세가 등이 모여서 천선부를 발족하는 날이었다.
천선부의 발족을 축하하고자 패진무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지금 패진무관의 거대한 연무장으로 하나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문을 연 한철진의 눈에 미리 대기하고 있는 이가 보였다.
구절심.
패진무관의 총관이자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인물.
타인이 보기에는 한철진의 충직한 수하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진저리가 처질 정도로 거머리 같은 감시자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철진에게 자유는 없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했다.
평소라면 구절심의 그런 행동에 인상을 찌푸렸을 한철진이었건만, 오늘은 그런 구절심의 지시에 거부감도 모욕감도 들지 않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으니까.
“적매가 피곤해 보이니 오늘은 오후까지 깨우지 말도록.”
“약은 어떻게 할까요?”
약 얘기에 한철진의 눈가가 꿈틀거렸지만 그것뿐이었다.
“지금 많이 지친 것 같으니 있다가 내가 직접 주겠다.”
“알겠습니다.”
구절심이 한철진을 안내한 곳은 여러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오늘을 위해 한철진을 단장시키기 위한 여인들.
약으로 인해 피폐해진 한철진의 얼굴을 정상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럼 조금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알았다.”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드는 한철진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구절심이 문을 닫았다.
***
한철진은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다.
항상 퀭하게 들어가 있던 눈과 홀쭉했던 볼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정상인의 그것과 같게 변했다.
말라버린 몸뚱어리는 어쩔 수 없었지만, 원채 키가 컸고 기골이 장대했기에 얼굴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그간의 병약해 보이는 모습은 없어졌고, 훤칠한 미남이 되었다.
“훗!”
뭐, 나쁘지 않았다.
계획한 일을 하고 나면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는 판국이었기에 마지막 모습이 초라한 것보다는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드르륵.
어찌 알고 왔는지 단장이 끝나자마자 구절심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