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흥! 머리를 썼구나.”
왕일이 뛰어드는 어둠속에서 일단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은 야행의를 입고 복면을 쓴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네 명이 왕일을 지나치며 세 구의 강시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다면 도망가도 좋다.”
주저앉아 헐떡거리고 있는 왕일의 앞에 한 사람이 섰고, 그가 왕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그럴 것 같았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왕일이 심호흡 몇 번 하더니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얼마면 되겠느냐?”
왕일은 복면인의 말을 이해했다.
“일 각.”
“좋아. 대신 일 각 후에 저 세 구의 강시는 네 몫이다.”
“네.”
복면인들이 누군지 궁금하긴 했지만,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무위는 왕일을 질리게 만들었다.
쾅! 쾅! 쾅! 쾅! 쾅!
들리는 것은 폭음이었고, 날아다니는 것은 강시들이었다.
네 명이 번갈아가며 세 구의 강시를 허공에 띄우고는 땅에 떨어질 틈을 주지 않았기에, 강시들은 허공에서 손발을 허우적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빌어먹을! 하늘 위에 또 하늘이란 건가?’
보기는 쉬워보여도 지금 복면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왕일은 알 수 있었다.
팔과 다리를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두르며 발버둥치는 강시들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해 그것들의 몸을 후려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거기다 강시들을 허공에 띄울 때, 조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튕겨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복면인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강시들을 같은 높이와 각도로 띄우는 중이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듯 복면인들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
‘어떻게 하지?’
막상 시간을 벌었지만 왕일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경이로운 회복력으로 몸에 활력은 되돌아왔지만 그것만으로는 강시들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 옆에 서있던 복면인들의 수장이 고함을 질렀다.
“이 미친놈아! 왜 여기로 기어오고 지랄이야!”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강시 하나를 달고 달려오는 잠영일호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좀 쉬자고요!”
평소 잠영일호의 말투가 아니었다.
뭔가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의 말투였다.
“빌어먹을 놈.”
한 소리를 내뱉은 복면인이 잠영일호를 쫓고 있는 강시를 향해 몸을 날렸고, 이내 그의 검에 의해 강시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멍청한 녀석!”
퍽!
강시를 복면인에게 맡긴 잠영일호가 왕일에게 다가오더니 얼굴을 후려쳤다.
“너는 대장이다! 너만 바라보는 네 부하들을 그렇게 버리면 죽으라는 것이냐!”
“도망친 것이 아니…….”
“변명하지 마라! 네가 아무리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네 모습을 보고 남아있는 이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너만 살기 위해 도망쳤다고 생각지 않겠느냐? 무엇보다 네 행동의 속뜻을 알 정도로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느냐? 그들과 신뢰관계를 형성했느냐? 그들이 어찌 네 마음을 알겠느냐!”
잠영일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왕일의 가슴을 후벼 팠다.
“가라! 가서 네 할 일을 해라!”
그때 잠영일호를 쫓아 온 강시를 막고 있던 복면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긴 어딜 가! 그놈이 원한 것은 일 각이라는 시간이었단 말이다!”
복면인의 외침에도 잠영일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것도 네가 배워야 할 부분이지. 도움을 청하려거든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왕일은 복면인이 ‘얼마면 되겠느냐?’란 물음에 그저 시간을 벌어달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여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기왕 빚을 지는 것이라면 확실하게 지는 것이 좋다. 어정쩡한 빚은 없느니만 못한 것이니까. 작은 빚쟁이는 시달려도 큰 빚쟁이는 대접을 받는 법이거든.”
긴박한 순간이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시간을 벌었어도 아무런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초조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문득 왕일은 새삼 잠영일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어째서 날 이렇게 도와주는 것일까?’
뭔가 노리는 것이 있으니 그럴 것이란 것은 어린아이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잠영일호가 베푸는 친절이 과한 것은 사실이었다.
‘무공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장하길 바라고 있어.’
뭔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그 이상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믿음?’
석휘명이 보여주던 가식적인 웃음과는 다른 어떤 것이 느껴졌다.
‘이게 친구라는 걸까?’
왕일은 잠영일호가 자신을 대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
-저 미친놈 지금 뭐하는 거냐?
복면인의 물음에 잠영일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시면서 뭘 물어봐요?
황당하게도 가만히 서있는 왕일은 마치 참선에 든 고승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 와중에 깨달음이라니, 진짜 미친놈이 맞구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복면인도 깨달음이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런 상황을 맞은 왕일이 신기해 이렇게 말을 할 뿐이었다.
-사형, 교주님의 호위대주란 자각 좀 가지세요. 말 좀 근엄하게 하시지 미친놈이 뭡니까?
잠영일호에게 사형이라 불린 복면인은 마교 교주인 사마유운의 호위대주인 문재호란 인물이었다.
-그럼 미친놈에게 미친놈이라고 하지 뭐라고 그러냐?
복면인, 문재호의 말에 잠영일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됐고요. 교주님은 어디까지 바라시는 겁니까?
사마유운이 문재호를 보냈다는 것은 왕일을 살리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주님도 교주님이지만, 여기 온 것은 사부님의 뜻을 전하고자 함이다.
-아버지께서요?
-그래.
잠영대주의 제자로 알려진 잠영일호는 사실 그의 아들이었고, 그의 대제자인 문재호가 사마유운의 호위대주였으니 실상 마교에서 잠영대주의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 그가 정보를 틀어쥐고 있었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다음 대 교주의 자리까지 차지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뒤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그런데 네가 하는 꼴을 보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구나. 저 녀석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복면을 벗어도 좋다고 하셨다.
문재호의 말에 잠영일호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왕일을 보고 생각한 것을 아버지와 사마유운도 같이 느꼈던 것이다.
-정말입니까?
-아무렴. 설마 너보다 그분들이 못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바람이 불면 먼지가 날리고 향기가 퍼지는 법, 지금과 같은 시기에 저런 놈이 나왔으니 예사로 볼 일이 아니지 않느냐?
문재호는 하나의 강시를 상대하면서도 전음으로 잠영일호와 대화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는 것 같았다.
-대신 너에게 주어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교에서의 네 권한도 박탈될 것이고.
예상한 바였다.
그렇기에 잠영일호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교주님께서는 저놈을 어디까지 인정하시는 것입니까?
교주와 화영영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잠영일호는 그것이 못내 걸렸다.
만일 제약이 있는 믿음이라면 언젠가는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놈을 양자로 들이실 계획이다.
“예?”
잠영일호가 순간 전음을 보내는 것도 잊은 채 말을 하였다.
-놀라기는. 물론 당장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은 놈이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겠지.
-그것이 절 저놈 옆에 두는 이유입니까?
-그래. 그리고 사부님께서 네게 전하라 하셨다. 복수를 부탁한다고.
복수.
이 말이 나오자 잠영일호의 신형이 부들부들 떨렸다.
-복수는 적가장의 이름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 교의 이름이 아닌 적가장의 이름으로.
거듭되는 문재호의 말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잠영일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물론입니다.
-우야, 힘들 것이다.
잠영일호의 이름은 우였고, 적가장의 후계자였던 적후연의 아들이었다.
-그나저나 사형, 언제까지 놀고 계실 겁니까?
말처럼 강시 하나를 상대하고 있는 문재호는 여유가 넘쳤다.
-이제 끝낼 생각이다. 버러지들이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천이라 불린 놈은 상당히 유용할 것 같으니까.
이곳에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백독문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너도 도와!
은근슬쩍 왕일의 옆에 앉으려는 적우를 향해 문재호가 호통을 질렀다.
-쳇! 제대로 된 활강시도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쉬게 내버려두지.
구시렁거리던 적우를 문재호가 째려보았다.
-알았다고요.
말을 마친 적우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
쾅!
적우의 무형시에 격타당한 강시가 뒤로 밀려났지만 결정적인 타격이 되지 못해 다시금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사형!
-됐다.
전음을 들은 적우가 훌쩍 뛰어 물러나자 그곳에는 기를 한껏 끌어올린 문재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압!”
기합과 함께 쏘아진 문제호의 검이 빠르게 회전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화살과 같았다.
카카카카카칵!
강시가 검을 양손으로 막았는데, 그곳에서 불꽃이 튀었다.
“으음…….”
검을 밀어 넣고 있는 문재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들렸고, 그 순간 적우가 활시위를 놓았다.
쾅!
“하압!”
얼굴에 정통으로 무형시를 맞은 강시의 몸이 순간 휘청거리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문재호의 검이 강시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몸통에 부딪쳤다.
그그그그그긍!
“키에에에엑!”
검이 회전하면서 배를 뚫자 강시가 고통에 찬 소리를 질렀는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몸통을 뚫리고도 빠르게 접근한 강시로 인해 모든 기력을 쏟은 문재호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쾅! 쾅! 쾅! 쾅!
적우가 연속적으로 무형시를 날렸지만 그것은 강시의 걸음을 늦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위로 띄울 수 없었기에 강시가 땅을 박찰 때마다 무형시에 의해 뒤로 밀려난 것보다 더 많은 거리를 앞으로 전진 했다.
“사형!”
“왜 불러!”
적우의 걱정스런 외침에 짜증을 가득담은 문재호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것으로 보아 적우가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러는 사이 강시는 문재호의 코앞까지 다가와 손만 뻗으면 문재호의 모가지를 틀어쥘 수 있는 거리였다.
타격이 아니라 단순히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독에 노출될 수 있었기에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문재호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죽엇!”
말과 함께 문재호가 손을 아래로 내리자 하늘에서 검이 벼락처럼 강시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쾅!
검에 강타당한 강시의 머리가 박살나며 검이 강시의 가랑이 사이로 검봉을 삐죽 드러냈다.
“흥! 감히 어디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문재호의 몸은 흠뻑 젖은 상태였다.
“사형, 괜찮아요?”
“괜찮다. 겨우 되다만 강시 따위에 어떻게 될 나냐?”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는 문재호를 향해 적우가 고갯짓을 했다.
“그 되다만 강시에 사형 수하들 다 죽게 생겼는데요?”
“응?”
문재호가 고개를 돌리자 강시들을 허공으로 띄우는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고, 옷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대, 대주님!”
호위대의 애잔한 부름에 문재호가 손을 들어 화답했다.
“어, 그래. 조금만 기다려.”
“기다리긴 뭘 기다립니까! 죽기 일보직전이란 말입니다!”
말 그대로였다.
호위대들의 무공이 높기는 하지만 백독문의 강시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정도의 힘은 없었기에, 그들은 계속된 심력과 내공의 소모로 지쳐가고 있었다.
“우야.”
“저도 여력이 없습니다.”
적우도 지금까지 무형시를 남발하였었다.
무한정 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내공도 바닥을 기는 형편이었고, 마지막에 문재호를 도와주느라 내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빌어먹… 응?”
그 순간 주위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공기가 요동치더니 한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뭐냐?”
“아무래도 놈이 깨어 나려나봅니다.”
왕일은 희뿌연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곳에서 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허… 음기와 양기가 회오리치다니, 대체 저놈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 뭔지 궁금하구나.”
가끔 빛이 번쩍이는 것이 안에서 폭풍이라도 불고 있는 것 같았다.
“대주님!”
“좀 기다려 봐 이것들아! 곧 너희를 구원하러 선남(仙男)이 갈지도 모르니까.”
선남이란 선녀와 마찬가지로 선경(仙境)에 산다는 남자를 이르는데, 신선들이 늙은이들을 일컫는 것이라면 선남은 젊은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었다.
“사형, 선남은 좀 아닌 것 같은데?”
적우가 바라보는 곳에, 머리는 산발하고 눈깔은 시뻘건 야차 한 마리가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