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만일 뇌기를 실었다면 지금처럼 세군데서 한꺼번에 공격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분명 뇌기로 강시를 처리하거나 하다못해 상처를 입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쾅!
다시 보이지 않는 화살이 날아와 강시에게 맞았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몸을 날리고 있었다.
맞은 부분의 옷이 터져나가며 살이 드러났지만, 아예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아무런 충격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공중에서 맞았기에 살짝 방향이 틀어진 것이었다.
덕분에 삼면에서 포위되어 아무런 활로가 보이지 않던 왕일이 그곳에서 빈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쾅!
우측에서 공격하는 강시를 향해 있는 힘껏 뇌기를 가득 담은 도를 휘두른 왕일이 결과에 상관없이 정면에 생긴 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좌측에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드는 여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부욱~
빨리 움직인다고 했는데도 등에 긴 밭고랑이 생겼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조금만 깊게 패였다면 척추까지 잘렸을 것이었다.
“젠장!”
몸을 날리며 흘깃 자신의 도에 맞은 여인을 봤는데, 옷만 부서졌을 뿐 충격을 입지 않았는지 다시금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달려들고 있었다.
‘어째서?’
이번엔 분명 도에 뇌기를 실었었다.
그럼 뭔가 다른 반응이 있어야 하건만,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전에 상대했던 강시와는 너무도 달랐다.
조금 우쭐 했던 왕일의 기분이 순식간에 지저세계로 빠져들었다.
높은 곳에 올라서 밑을 바라보는데, 딛고 선 곳이 모래성이라 우수수 무너지는 듯 느껴졌다.
거기다 상처가 생겼으니 욱신거리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등판에서 느껴지는 화끈함은 그 정도가 심했다.
마치 장작불에서 지글지글 타들어가는 통돼지 구이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것이 상상만이 아닌지 지금 왕일의 등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솟는 중이었는데, 그녀들의 손톱에 발린 독 때문이리라.
***
지금 상황을 보며 왕일보다 놀란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백독문주와 그 부하들이었다.
강시에게 직접 독을 바른 것이 그들이었고, 거기에 바른 독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 자체로도 맹독이지만, 강시를 만들면서 흡수된 독들과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독으로 탄생된 것이었다.
강시에게 흡수된 독들이 있어야만 현재의 독이 되었기에 따로 쓰지는 못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히 그간에 들인 노력과 물자가 제 몫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 저것…….”
백독문주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놀라는 중이었다.
독에 관한한 자신 있다고 자부하는 그도 강시의 손톱에 공격당했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운기를 해야 할 판이었다.
아니, 목숨을 부지한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왕일은 멀쩡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혈봉, 청사는?”
“예?”
옆에서 같이 놀라고 있던 총관이 되묻다가 백독문주의 서슬 퍼런 눈에 화들짝하며 부하를 바라보자, 그 부하 역시 벌어졌던 입을 다물며 서둘러 보고를 올렸다.
“혈봉은 이미 배치가 끝났습니다만 청사는 아직 준비가 미미한 관계로 좀 더 외곽에서 풀 생각입니다.”
“상관없다! 당장 풀어라!”
무어라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문주의 말 속에 담긴 의지가 너무 강했다.
“뒤쪽에 숨어있는 것들은 그것들과 독이면 충분할 것이다. 나머지 문도들은 가진 것들을 저놈을 향해 퍼붓도록 해라! 저놈이 서있는 곳을 암기들로 도배를 하란 말이다!”
총관은 문주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일은 금강불괴가 아니었다.
기괴하리만치 독에 강하지만, 그것에 합당할 만큼의 육체적 강도를 가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암기를 막아내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독이 통하지 않더라도 암기를 밟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인 것이다.
총관이 무어라 명령을 내리자 가늘어지던 빗줄기가 갑자기 더욱 굵어지고 세밀해졌다.
아니, 그것은 그냥 비가 아니었다.
바로 독침, 단도, 단검, 장검, 장도, 창과 같은 것들로 만들어진 무기들의 비였다.
쏴아아아아아~
순식간에 왕일이 있는 자리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며 강시들의 공격을 막고 있던 왕일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강시의 독에 당한 후로 몸이 정상이 아니란 것을 알았고, 지금 날아오는 무기들을 모두 막아낸다는 보장도 없었다.
낙뢰를 맞았을 때, 일시적으로 신체의 기능이 올라간 것뿐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 약발이 다했는지 평상시와 같은 몸뚱이였다.
무기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꿀꺽!
***
-뛰어들어!
쾅!
폭음이 터지면서 막 왕일을 향해 달려들던 강시 하나가 뒤로 튕겨나갔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괴력을 자랑하는 무형시였다.
아마도 잠영일호가 힘 좀 쓴 모양이었다.
그 강시가 물러서며 나타난 길을 본 왕일도 금방 잠영일호의 뜻을 이해했다.
놀란 토끼 같은 눈을 하며 자신과 눈을 마주하는 이들이 보였으니까.
바로 백독문의 무사들이자 이 무기의 비를 내리게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어디를 간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있었기에, 사실 이전에도 그들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언제든지 있었다.
그러나 사청사와 사적사에 시달리며 그들을 놓쳤고, 강시들이 투입되자 그들을 잊은 것이었다.
적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하수들은 그 적들 사이에 파고들면 몰매 맞아 죽기 십상이지만은 고수에게 있어 하수들의 사이로 파고드는 것은 적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협공의 위험을 줄이는 수단이었다.
왕일은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왔음을 알았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강시들을 뒤로 한 채 몸을 날렸다.
그 와중에 다시 강시의 손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지만, 그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카카카카카캉!
왕일은 등이 화끈거리는 와중에도 뒤에서 들리는 쇳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강시와 무기들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였는데,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지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쉭!
당황한 와중에도 백독문 무사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왕일을 향해 던진 것이다.
왕일의 뒤에 있는 것은 강시이기에 무기가 잘못 날아가 다른 이들이 다칠 염려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마음껏 날릴 수 있었다.
왕일이 곤경에 처한 그때, 천을 비롯한 이들도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혈봉과 청사가 그들을 향해 독아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인간이었다.
몸에서 나는 체취를 완전히 감출 수 없었고, 그것을 목표로 움직이는 혈봉과 청사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혈봉의 무리를 본 천이 가지고 있던 자기병을 깨뜨렸다.
그러더니 그것에서 나온 액체를 온 몸에 발랐다.
보통 인간이 곤충이나 동물을 부릴 때는 소리와 향기를 이용한다. 백독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바른 약물은 잠영일호가 특별히 건네준 체취를 없애고 악취를 풍겨 혈봉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체취가 약해지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바를 수밖에 없었다.
빗줄기가 약해진 것이 다행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푼 것이지?’
사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걱정한 것이 바로 혈봉을 비롯한 백독문이 가지고 있는 독물들이었다.
그럼에도 피해가 커진 후에야 혈봉을 푼 것이다.
천의 눈이 주위를 살피자 보이는 것은 혈봉과 청사가 전부였다.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 여기며 세심하게 훑었지만, 어떠한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청사의 움직임도 이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멀리 고군분투하고 있는 왕일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는 어떠한 독물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자신이 백독문주라고 하여도 아무런 타격이 없는 독물을 그곳에 풀지는 않으리라.
강시에게 협공을 받으며 위기에 몰린 것 같았지만, 잠영일호의 도움으로 잘 헤쳐 나가고 있었다.
‘겨우 이거였나?’
의문이 들었다.
백독문이 이 정도의 문파였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마교가 가만히 놔두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대 가운데 하나만 보내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한데…….’
분명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천은 알 수 없었다.
연단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수하들을 닦달하고 있는 백독문주의 모습만 보더라도 흥분한 그의 모습은 결코 거짓 같지 않았다.
의문은 들었지만, 일단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은밀히 움직인 천이 독물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오히려 독물의 뒤를 점한 천이 품속에서 작은 구체를 꺼내어 땅에 묻었다.
휘리릭~
작은 휘파람 소리가 그의 입에서 퍼져나가자 여기저기서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소리가 들리는 곳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독물이 있는 장소를 에워싸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쾅! 콰콰콰콰쾅!
폭발음이 연속적으로 들리며 화기로 인해 혈봉이 타들어갔고, 충격으로 인해 청사가 갈가리 찢어졌다.
몇 남은 것들도 폭음의 영향을 받았는지, 우왕좌왕하며 뿔뿔이 흩어질 뿐이었다.
대충 혈봉과 청사를 처리한 천의 눈길이 다시 왕일에게로 향했다.
‘이런…….’
위기의 순간마다 날아온 무형시가 왕일로 하여금 위기를 넘기게 해주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힘들 것 같았다.
위치가 들켰는지, 백독문주의 뒤에 서있던 두 구의 강시중 하나가 빠른 속도로 잠영일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지켜 본 천도 잠영일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무형시가 날아다녔으니 예견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도와야겠군.’
천이 지와 현, 황을 부르더니 왕일이 있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왕일이 죽는다면 자신들의 목숨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은밀하게 백독문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는 천의 귀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독이다!
백독문주의 명으로 외곽에서 푼 독이 이제야 그 효능을 발하고 있었다.
-아저씨?
-이곳은 이미 늦었다. 서둘러 형제들을 모아라.
독충에만 신경 쓰다가 독을 놓친 모양이었다.
왕일을 한 번 돌아 본 천이 지를 시켜 다른 이들을 부르게 했다.
그리고 천은 천천히 왕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세 구의 강시와 백독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고군분투하는 왕일의 몸이 점점 피에 물들고 있었다.
***
“큭!”
엉덩이에서 한 뭉텅이의 살을 뜯긴 왕일이 신음소리를 냈지만, 한가하게 아픔을 만끽할 시간은 없었다.
세 구의 강시가 목줄을 틀어쥐기 위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왜!”
자신은 무적이었다.
강시라고 해도 겁날 것은 없었다.
뇌기는 강시가 지닌 사기와는 극성이었다.
그랬는데 지금 상대하는 강시들은 아무리 뇌기에 공격을 당해도 그저 잠깐 움찔 한 것이 전부였다.
예전의 무기력한 자신으로 돌아간 것 같아 절망감이 왕일의 가슴을 점령했다.
‘이러다간 죽을 수도…….’
죽음이란 단어가 떠오르자 왕일은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강시의 공격을 또 한 번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강시의 손에 맞아 데굴데굴 구른 왕일이 피를 한 모금 뱉고는 땅을 박찼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빠르게 움직이는 왕일이 향한 곳은 강시들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도망치는 거냐!
잠영일호의 전음이었다.
하지만 왕일은 대답할 기운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강시들이 빠르게 쫓아왔고, 무기들은 여전히 그를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도망간다면 이곳에 있는 놈들을 모두 죽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왕일을 마교를 대표하는 무인으로 키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잠영일호였기에 왕일이 도망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마교란 힘을 숭상하는 곳이었기에 그런 전력이 있는 이를 따르지 않을 것이었다.
차라리 패배를 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패배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등을 보인다는 것은 수치였다.
“왕일!”
하나의 강시를 맞아 사투를 벌이고 있던 잠영일호가 멀어지는 왕일을 목청이 터져라 불렀지만, 돌아 온 대답은 없었다.
왕일은 지금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을 때는 도망칠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순간 하나의 가능성이 그를 붙들었다.
잠영일호가 아직 이 자리에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순간 왕일의 머릿속에 멀리서 뭉쳐있던 푸른색들이 떠올랐고, 도박을 하기로 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푸른색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는 것은 쉬웠다.
기감만 활짝 개방하면 되었으니까.
‘반응이 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있었지만, 그들의 색이 푸른색에서 노란색, 그리고는 점차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살기였어.’
붉은색은 살기였고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게 된 지금, 왕일은 더욱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적이 아니야.’
만일 자신을 향해 살기를 뿜었다면 저렇듯 숨어있을 이유가 없었다.
당장 뛰쳐나와 공격을 하면 될 터이니.
‘구경한 값을 치루라고!’
왕일이 풀쩍 신형을 띄우더니 붉은색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