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운남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알게 모르게 어려서부터 독을 먹었다.
그렇기에 미약한 독은 그냥 넘길 수 있고, 조금 독한 것들도 배탈만 앓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따로 해독제를 준비하지 않아도 지금 풀리는 독은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았다.
백독문은 그렇게 생활에서 접하는 독들로 외부에서 온 이들을 중독 시킬 수 있는 독을 만들어 냈다.
‘놈! 대가를 치러주마!’
백독문주가 이를 가는 사이 왕일은 자신의 변화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기어 다니던 아기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높게 보였었는지 이제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하였다.
그런 그의 귀에 잠영일호의 질책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놈!
왕일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지 않았다.
다시 그런다면 진짜 멍청한 놈이었으니까.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지금, 뭔 짓거리냐? 벌써 놈들이 안정되지 않았느냐.
사실, 침입을 한 그들로서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 되어야만 움직이기에 편했다.
그러나 왕일이 넋 놓고 있는 사이 백독문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왕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과 기감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땅 속에 은신하고 있는 이들과 멀리 외곽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그들이 노리는 것이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잠영일호의 말처럼 심상치 않은 것은 확실했다.
왕일이 알기로 천 등은 모두 외곽에서 움직이는 이들의 안쪽에 있었다.
‘이것도 발전이라면 발전이군.’
기감의 영역이 몰라보게 넓어졌다. 물론 신경을 써야했지만 작정하고 은신하고 있는 이들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유용한 일이었다.
무어라 딱히 말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예전에는 기의 파동을 이용해 사람을 찾았다면 지금은 그 사람이 내뿜는 작은 빛이 그의 머릿속에서 춤추는 것 같았다.
눈으로 사물을 보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여러 가지 색으로 치장된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었다.
이름을 모르겠는 색도 있었고,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 진 듯한 색도 있었다.
처음 그것을 느꼈을 때 현기증까지 느낄 정도였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서 색채만으로도 사물과 사람을 구별하게 되었다.
‘붉은 색이 많군.’
지금 왕일을 둘러 싼 이들은 대부분이 붉은 색이었다.
거기에 각기 다른 색채들이 조금씩 모여 개성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뭉쳐있는 사람들은 푸른색이었다.
대략 열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그것들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서둘 필요는 없었다.
지금 모른다고 하여서 내일도 모른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넓게, 넓게 퍼지던 기감이 점점 좁아들더니 반경 삼 장안으로 줄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왕일의 시야도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뇌기는 몸속에서 혈기왕성하게 날뛰며 내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이제 준비가 된 것이다.
***
“컥!”
언제 움직였는지 누구도 알 지 못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두 곳에 왕일의 몸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는 동안 다른 몸뚱어리는 학살을 저지르고 있었다.
“뭐… 뭐냐?”
백독문주도 눈치 채지 못한 순간적인 움직임이었다.
그의 눈은 왕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건만 왕일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 지 못했다.
그러나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막아야만 했다.
아직 왕일의 동조자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지금, 왕일이 도망가서 또 난장판을 만든다면 기껏 만들어 놓은 함정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었다.
“사청사, 사적사는 놈을 묶어라!”
백독문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붉고 푸른 옷을 입은 여덟 사람이 신형을 날렸다.
“총관!”
“예.”
“혈봉을 풀어라!”
“예? 하, 하지만…….”
혈봉, 혈의, 청사는 아직까지 충분한 양을 마련하지 못했다.
혈마교를 치면서 너무 많은 희생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혈마교와의 싸움에서 자신이 있었다.
그들의 독과 곤충, 뱀을 믿었던 것이다.
거기다 강시까지 있으니 승리를 장담했었다.
마교 전체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나온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런데 승리에의 맹신에 대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렀으니 그들이 받은 심리적 타격은 엄청났다.
그저 벌을 키우고, 개미를 키운다고 해서 그들이 혈봉과 혈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독초와 독화를 먹여 그것에 내성을 키우고 또한 몸속에 독을 저장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련해야 비로소 진정한 혈봉과 혈의가 되는 것이다.
청사는 그 조련이 더 어려운데, 곤충인 벌과 개미가 뱀보다도 더 빨리 조련된다는 것도 이해 못할 일 중의 하나였다.
아무튼 아직 준비되지 않은 혈봉을 풀라는 것은 도박이었다.
그들이 아군을 공격할 수도 있었으니까.
“청사도 푼다.”
문주의 말에 토를 달고 싶었지만, 현 상황에서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은 총관도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총관이 모습을 감추는 그 시각에도 왕일의 학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사적사와 사청사가 전장에 내려서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밧줄을 던지는 것이었다.
각기 붉은 줄과 푸른 줄이 왕일을 사이에 두고 허공을 갈랐다.
‘뭐지?’
그물에 갇힌 적이 있던 왕일이었기에 찜찜함을 느껴 피하려 했지만, 밧줄이 더 빨랐다.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일 장 길이의 밧줄이 왕일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흥!”
가일층 속도를 올린 왕일이 몸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그가 언제 채찍과 같은 무기를 상대해 본적이 있었겠는가.
무지한 것이 위기를 초래했다.
막 왕일을 휘감으려는 듯한 동작을 취하던 밧줄의 끝이 갑자기 고속으로 휘청거리더니 공간을 후려쳤다.
팡!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진동하면서 그 충격파가 왕일의 얼굴을 두드렸다.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순식간에 수증기가 되어 원을 그리며 공간을 표시했다.
물론 그 공간에 왕일의 얼굴이 있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찌릿찌릿한 기운과 얼굴이 마비되는 것을 느낀 왕일의 귀가 멍멍해졌다.
‘뭐… 뭐야?’
만일 그곳에 왕일의 머리가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장담을 할 수 없었을 만큼 밧줄의 위력은 컸다.
그렇다고 의외의 충격에 넋 놓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직 밧줄은 일곱 개나 더 남아있었으니까.
마치 뱀의 머리처럼 매섭게 쏘아지는 밧줄이 왕일의 머리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웃!”
그것을 피했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다른 밧줄은 나무를 휘감는 뱀처럼 왕일의 다리를 옥죄려 똬리를 트는 중이었다.
“이까짓 것!”
피하지 못하겠으면 잘라버리면 된다는 생각에 도를 휘둘렀지만, 그것도 오판이었다.
막 두 개의 밧줄을 피한 왕일이 정면에서 쇄도해오는 밧줄을 향해 도를 휘둘렀지만 낭창하게 휘어지는 밧줄을 맞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공격을 하려 신형을 멈추는 바람에 다른 일곱 개의 밧줄들이 모두 각기 다른 부위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오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왕일의 움직임이 그들의 밧줄보다는 빨랐다.
왕일도 그렇지만 적들도 공격을 하는 시점에서는 몸의 속도가 늦춰지게 마련이었다.
어느새 그런 적들 중 하나의 앞에 선 왕일이 도를 내리치는 순간 다른 밧줄이 날아왔는데, 이상하게도 왕일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을 향해서였다.
그런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왕일은 자신의 도를 내리 긋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휭~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일의 도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그 자리서 사라지고, 왕일의 도는 허공을 베었다.
적이 밧줄을 이용해 동료의 몸을 끌어당긴 것이다.
동료를 믿는 마음이 강했는지 도가 머리끝까지 왔을 때에도 그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고, 동료는 그의 그런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서로를 믿는 이들의 합공을 경험이 적은 왕일이 상대하게 된 것은 실로 불운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일에게도 동료는 있었다.
이들처럼 서로를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
피윳!
막 왕일의 뒤통수에 밧줄을 던지려던 이가 기겁을 하고 뒤로 몸을 꺾었다.
평소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 순간적으로 허리를 거의 직각에 가깝게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 그의 뺨에 남아있는 흔적.
주르륵 한 방울 피가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어디선가 날아 온 화살 하나가 남겨 놓은 것이었다.
이내 빗물에 씻겨 내려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놀란 마음까지 씻겨 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가하게 화살을 날린 자를 찾을 시간은 없었다.
화살을 피하느라 멈춘 사이 왕일이 도를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어!”
아주 독기가 올랐는지 왕일의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날카로웠다.
시뻘건 눈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연상시켰고, 누가 봐도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가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막 죽음을 눈앞에 둔 그의 동료들도 그것을 볼 수 있었기에 왕일을 향해 밧줄을 날렸다.
하지만 왕일은 그것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앞의 상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적이 동료를 믿고 그러한 것처럼.
피윳!
막 왕일을 공격하려던 밧줄들의 끄트머리와 중간부분이 무언가에 의해 잘려나갔다.
밧줄을 자른 뭔가가 땅에 처박혔지만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파괴된 흔적이 전부였다.
무형시!
잠영일호의 비기가 날아와 밧줄을 자른 것이다.
왕일의 도로도 막지 못한 것을 화살로 자른 것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잠영일호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공격을 하는 순간 그 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자신들의 밧줄이 잘리자 밧줄 주인들의 얼굴에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과 경악이 함께 어우러졌다.
서걱! 철퍽!
정확히 이등분 된 적의 시체가 빗물이 흐르는 대지에 몸을 뉘였다.
시체를 가르고 지나갔음에도 도에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다만 빗물만이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괴이한 도를 든 왕일의 눈이 나머지 일곱 명에게로 돌려졌다.
그리고 왕일의 눈과 나머지 일곱 명의 눈이 마주쳤다.
그것이 적들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동료의 죽음에 충격을 받기는 했겠지만, 그들의 밧줄을 자른 이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그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다가왔다.
왕일만 신경을 쓰느라 숨어있는 죽음의 사자를 놓친 것이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풀잎이 날아왔다.
“컥!”
단말마의 비명이 터지며 세 명이 쓰러졌고, 나머지 네 명은 각기 한 곳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채 신형을 날렸다.
그렇지만 그들을 노리는 것은 잠영일호만이 아니었다.
촤악!
거친 물살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허리 어름이 갈라지며 두 조각이 된 이가, 놀란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도를 휘둘러 그를 벤 왕일의 신형은 멈추지 않았다.
서둘러 품에서 단도를 꺼내는 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챙!
“윽!”
도는 그 도신이 두껍기 때문에 검에 비해 무겁다.
연도도 있지만, 대부분의 도는 검보다 무겁다.
특히나 왕일의 도는 보통 도의 세 배 내지는 네 배까지도 나가는 무게였다.
그런 것이 휘둘러지는데, 아무리 기를 둘렀다고는 해도 작은 단도로 막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힘에 밀려 주르륵 뒤로 미끄러지는 이를 집요하게 따라붙는 왕일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있었다.
휘둘러지는 도의 궤적에 청의인의 머리가 있었고, 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핏방울들만이 허공에 부유했다.
이제 남은 적은 단 두 명.
적의인과 청의인이 남았지만, 잠영일호의 공격에 둘 모두 팔과 다리에 상처를 입은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이제 그들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어보였다.
피융!
허공을 가르는 왕일의 도.
이제 그것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고, 팔을 다친 이는 몰라도 다리를 다친 이는 이내 체념을 했는지 빛줄기를 보면서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팔을 다친 이도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도의 모습에 지나간 날들을 떠올리며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반격을 하려는지 그의 멀쩡한 나머지 손에는 검붉은 단도가 들려 있었다.
쾅! 챙!
폭음과 청명한 소리가 어울리며 주변으로 빗방울들이 흩어졌다.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복면인들.
백독문주의 뒤에 오연히 서있던 다섯 명의 복면인들 중 일부였는데, 그들이 드디어 왕일을 상대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런데 왕일의 도와 부딪친 복면인은 도가 내뿜는 기에 복면이 갈기갈기 찢어졌음에도 얼굴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그러한 것으로 볼 때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이니 그 나이에 금강불괴를 이룬 것이 아니라면 분명 강시일 것이었다.
하지만 의아한 것은 강시라면 어째서 사이한 힘과 상극인 뇌기를 품은 왕일의 도이건만, 그것과 충돌하고도 아무런 충격을 입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있다면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여린 속살이 전부였다.
그것이 어찌 도와 부딪히며 금속성을 냈는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멍청한 놈!
왕일은 들려오는 전음처럼 자신은 진짜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뇌기를 몸의 일부처럼 생활화 하라는 잠영일호의 말을 잊은 자신을 자책했다.
적을 공격함에 있어 방금은 그저 도를 휘두른 것이 전부였다.
뇌기를 싣지 않았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