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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78화 (78/138)

78화

오랜만에 하는 살인이 하루에 너무 많이 찾아왔다.

그래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지 몰랐다.

차고, 찌르고, 베면서 왕일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다 결국에는 하는 행동에 의문까지 갖게 되었다.

‘나는 왜 여기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돌이켜보면 왕일은 지금 이곳에서 살인을 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바란 것은 복수였고,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달리다 만난 인연들이 지금 자신을 이곳으로 내몰았다.

‘강요인가?’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서 이곳에서 도를 휘두른다는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내 의지다! 이것은 내 싸움이다!’

부모님의 죽음도, 동생들의 죽음도, 장수련의 죽음도 왕일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생도 그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아니, 현재까지 살아온 인생은 그가 꿈꿨던 미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바뀌어야 했다.

도를 잡은 손은 왕일 자신의 손이었고, 그 도를 휘두르는 것도 그의 팔이었다.

죽어가는 적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은 그의 눈이었으며, 적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도 바로 왕일 자신이었다.

‘지금부터 걸어가야 할 길이 이런 것이라면 결코 주저하지 않겠다!’

순간 크게 몸을 휘돈 왕일이 도를 하늘로 치켜들고 사자후를 터뜨렸다.

“우아아아아아아!”

수동적이었던 자신을 내던지고 새로운 앞날을 펼치겠다는 그의 의지와 신념이 입을 통해 천지에 그 시작을 알렸다.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번쩍!

주위에 높은 건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벼락이 정확히 왕일의 도에 내리 꽂혔다.

마치 그가 벼락을 불러오기라도 한 것처럼!

콰콰콰콰쾅!

순간의 광명이 지나가고 천지를 떨어 울리는 괴성마저 사라진 후 찾아온 적막과 어둠.

그 속에서 붉은 횃불이 타올랐다.

일시지간 주위는 침묵했고, 경외했으며, 두려움과 혼란이 그 고요의 바다에 몸을 띄웠다.

붉은 횃불이 주위를 둘러보자 그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 살아있는 이들의 숨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까지 서로를 죽이기 위해 광분하던 전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대지를 두들기는 소리와 불이 타들어가며 내는 작은 소란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누군가가 왕일을 바라보며 뭐라 한 소리를 하면서 뒤로 몸을 움직이자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조금씩 물러서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그러더니 마치 썰물이 빠지는 것처럼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퇴각은 눈사태처럼 불어나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사라졌다.

남아있는 이들은 진정한 백독문의 무사들뿐이었는데, 그들의 눈에도 두려움은 존재했다.

운남은 많은 미신이 있는 곳이었고, 대부분의 부족은 자연이 그 미신의 대상이었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폭우와 벼락, 그리고 천지를 밝혀주는 태양과 밤을 지키는 달,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폭풍을 일으키는 바람.

그 중에서 왕일이 벼락을 조종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미신과 현재의 상황이 어울려 두려움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렇게 왕일은 다시 태어났다.

***

“뭣들 하느냐! 죽여라!”

미신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죽은 사람까지도 이용을 하는 자, 스스로의 강함을 위해 노력하는 무사.

바로 백독문의 정예들이었다.

“암습을 하는 놈들이 있다! 그놈들을 찾아라!”

이미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잠영일호를 향해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면 그를 발견할 일은 없었겠지만, 연신 화살을 날리고 있었기에 그들의 눈에 띈 것이다.

그리고 상관의 질책과 독촉이 이어지자 망설이던 이들이 다시 무기를 앞세워 왕일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시 화살과 독침이 사방에서 왕일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태어난 왕일이 이전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 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지금 왕일은 정신적으로만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날아오던 독침은 아예 왕일의 살갗도 뚫지 못했다.

벼락을 맞으며 각성하는 그때 옷이 폭발하듯 날아갔기에 맨살이 드러나 있었는데, 천잠사는 그 이름값을 하느라 아직 왕일의 하체를 가리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드러난 몸에 독침이 수 없이 날아들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막기라도 하듯이 이내 힘을 잃고 떨어졌다.

달려들던 무사들이라고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왕일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가 발을 구르자 땅을 타고 뇌기가 원을 그리며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드디어 뇌기의 활용법을 제대로 터득한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뇌기에 맞은 적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멈칫했고, 그 찰나의 순간은 왕일의 도가 그들을 훑고 지나가는데 충분하고도 넘쳤다.

왕일의 움직임은 확연하게 더 빨라졌으며, 힘이 있었고 단호했다.

머리가 있는 이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왕일에게 가까이 와서는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러나 그것이 꼭 옳은 결정이라고 볼 수 없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기에 민첩한 반응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왕일의 기술은 그렇게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편해졌군.’

적들이 공중에 있자 화살과 독침이 날아오지 않아서 그들을 상대하는데 여유까지 느낄 정도였다.

찔러오고, 베어오는 무기들을 향해 왕일이 들고 있던 도를 휘둘렀다.

채채채채챙!

무기와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 무기의 주인들이 허공에서 내려와 땅에 두 발을 디뎠다.

무기와 무기가 맞닿으면서 왕일의 뇌기가 그들을 감전시킨 것이다.

발이 땅에 닿자 그들은 다시 왕일이 내뿜는 뇌기를 맞았고, 근육들이 순간적으로 수축되면서 움찔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살아생전에 하는 마지막 행동이기도 했다.

마치 왕일의 뇌기는 전가의 보도 같았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다수의 적을 순간적이지만 행동불능의 상태로 만들었고, 왕일정도의 고수에겐 그것은 무한한 시간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독도 통하지 않고,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쳐낼 정도의 실력과 기가 실리지 않은 무기는 쉽게 잘라버리는 날카로운 도, 거기다 접근전에서는 확실한 비장의 한 수를 가진 왕일은 백독문에게 죽음의 사자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백독문은 절대위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천적과 같은 왕일과 위치를 옮겨가며 자신들을 죽이고 있는 궁수, 그리고 어둠속에서 보이지 않는 검을 들이미는 살수까지.

비는 쏟아지고 있었고, 건물은 불탔으며 날은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백독문이 아무리 초절정의 고수가 없다고 하여도 절정의 고수는 있었고, 이제 그들이 나설 차례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마침내 백독문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백독문주의 눈에 아수라장이 된 자신의 문파가 보였다.

흰 수염과 흰 머리, 거기에 어울리는 흰 옷을 입은 노인은 현재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벌써 이런 난리판이 벌어진 것이다.

연무장에 홀로 선 왕일을 보는 백독문주의 눈에 분노의 빛이 가득했다.

그런 그가 주위를 둘러보자 우왕좌왕하면서 문파 내를 들쑤시고 다니는 수하들이 보였다.

“멈춰라!”

내공을 실어 사자후를 발하자 그때까지 체계가 잡히지 않은 채 침입자들을 찾아다니던 이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백독문주를 바라보았다.

“모든 문도들은 연무장으로 모여라!”

문주의 말에 토를 다는 이들은 없었다.

잠영일호를 찾아다니던 무사들도, 천 등을 색출하려던 이들도 모두 몸을 날려 연무장으로 모였다.

“한심한 놈들!”

문파가 뒤집어질 정도의 소란이었으니 이곳에 모인 이들이 거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틀어박혀 있을 이들은 없을 것이니까.

그런데 지금 나온 이들을 모두 합해도 채 사백이 넘지 않을 것 같았다.

수색을 나갔던 이들도 모두 돌아왔으니 지금 있는 이들이 전부인 것이다.

혈마교를 치기 위해 나갔던 이백과 청성을 돕기 위해 나간 오십여 명을 제외한다면 거의 삼백여 명이 지금 연무장 한가운데서 무게를 잡고 있는 왕일에게 죽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문주가 그렇게 열이 받는 와중에 포위된 왕일은 전혀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겁을 먹었다기보다는 이 휴식의 시간을 이용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찬찬히 되새기고 있었다.

“넓군.”

연무장이 넓은 것이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왕일이 말하고 있는 넓다는 것은 확장된 자신의 시야와 감각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까 맞은 벼락이 어떤 작용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반만 맞은 생각이었다.

적절하게 벼락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자신을 극복하면서 정신이 성장한 것이 더 옳은 이유였다.

그리고 벼락이 마침 맞게 떨어졌는지, 아니면 진짜 그가 벼락을 불러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왕일의 눈이 한 곳을 응시했다.

“좁지 않으시오?”

뜬금없는 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속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잠영일호가 대단하다는 듯한 말투로 답을 했다.

-보이냐?

“잘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지 마라. 놈들에게 내 위치를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냐?

전음을 받은 왕일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아니나 다를까, 왕일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벌써 십여 명의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벌써 전음은 다른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왕일은 잠영일호를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자신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나 잠영일호와 붙는다고 해도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잠영일호가 어째서 저렇듯 숨어서 싸워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중이었다.

잠영일호가 나서서 신위를 발휘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라고 왕일은 생각했다.

그러나 왕일이 잘못 판단한 것이 있었으니, 잠영일호는 왕일처럼 독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 몸이 아니란 것이었다.

물론 독침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나, 그것을 막기 위해 내공을 소모하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녹초가 될 것이고, 그런 잠영일호는 적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터였다.

왕일은 자신의 뇌기가 주는 이점이 얼마나 큰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왕일이 자신의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백독문주는 그런 왕일에 대해서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사실이냐?”

“예.”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왕일이 벼락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도와주러 왔던 이들이 거의 대부분 빠져나갔다니 이 싸움에 이긴다고 하여도 다시 그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듯 하였다.

‘뭐, 놈의 목을 걸어두면 곧 잠잠해지겠지.’

그건 그렇고 독이 통하지 않는다니 상당히 난감한 문제였다.

게다가 파악한 바로는 왕일이 혈마교 공격 당시에 강시들을 모조리 처리한 놈일 가능성이 컸기에 강시를 투입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했다.

가뜩이나 지금도 사기가 바닥인데, 거기다 강시까지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간 아무런 힘도 못써보고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놈들을 더 투입시키자니 그것 또한 불 보듯 뻔 한 상황이었다.

또한 왕일 말고도 백독문주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었다.

어느 한 가지를 미리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단 눈에 보이는 놈부터!’

왕일로 결정을 봤지만, 문제는 그것이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자 언제나 든든하게 생각되는 사청사(四靑巳)와 사적사(四赤巳)가 서 있었고, 그 뒤로 검은 두건을 뒤집어 쓴 다섯 명이 있었다.

“문주님?”

그의 시선을 느꼈을까? 사적사 중의 하나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일단 지치게 만들어라.”

“예.”

명령을 받은 중년인이 손을 이리저리 흔들자 왕일을 둘러 싼 이들이 거리를 벌리더니 안과 밖을 동시에 경계하는 진을 펼쳤는데, 특이한 것은 밖을 담당하는 이들의 손에 방패를 들려있다는 점이었다.

긴 타원형의 방패는 그들의 몸을 숨겨주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지만, 잠영일호가 쏘는 화살을 막아낼 정도로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무사들은 외곽에 넓게 포진해 있었다.

만일 이곳에 있는 이들이 싸울 수 있는 전부라면 결국 건물에 있는 이들은 여자들과 아이들뿐이라는 결론이 나오고 천 등은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싸울 수 없을 것이었다.

“다른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중년인의 물음에 문주가 고개를 저었다.

“남아있는 놈들은?”

“이곳으로 오면서 모두 연무장으로 오란 전갈을 보냈으니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인들과 아이들을 모종의 장소로 이동시키는 몇몇 무사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다는 말이 맞았다.

“암행할 이유를 주지 않으면 스스로 몸을 드러낼 터. 그때를 노리면 될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르르 무사들이 모이는 틈을 타서 땅 속에 숨어드는 이들이 있었다.

문주의 명을 받은 그들은 천 등이 모습을 보이는 그때, 그들을 향해 암수를 날리리라.

“독에 영향을 받지 않는 놈이 저놈 하나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냐?”

“현재까지 파악된 것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암굴을 이용해 외곽에서부터 독을 풀어라.

백독문주의 전음을 받은 부하가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지금 이곳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숨어있는 수하들을 이용해 계략을 펼치려는 것이다.

‘흥! 놈들이 숨어있더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계획을 준비하면서 왕일이 날뛸 것을 염려했지만, 다행히도 멍청하게 가만히 서있었기에 백독문주는 일을 벌이기가 더 쉬웠다.

“뭣들 하느냐! 함성을 질러라! 살기를 키워라! 적이 눈앞에 있다!”

지금 보이는 모든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함이었다.

이곳에 집중을 하는 것 같지만, 이미 백독문 전체에 독이 풀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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