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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77화 (77/138)

77화

그들이 왔다는 것은 자신들의 행적을 감추기 위해 따로 떠났던 이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은 슬퍼하기보다는 분노하기를 원하였고, 그것을 풀기를 바랐다.

-언제 가시겠습니까?

천이 전음을 보내자 왕일이 잠영일호를 바라봤다.

-왜?

“언제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낮이지만 먹구름이 잔뜩 끼었기 때문에 어두웠다.

하지만 완전한 밤보다는 훨씬 밝았기에 사물을 식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떠났던 이들이 들어오면서 왁자지껄한 정문을 바라보던 잠영일호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지금!”

밝을 때 공격을 한다는 것이 황당한 결정일 수 있었지만, 밤이 되어도 그다지 좋은 점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저들이 날리는 독침을 보기 어려우니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저들의 후방에서 시선을 끌겠다.”

잠영일호가 말을 마치고 천천히 뒤로 빠져 백독문의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일을 가장 잘 할 이는 그밖에 없었다.

“천.”

“네.”

“신호가 오면 일단 내가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겠다. 너희들은 모두 잠행을 하도록.”

“무모합니다!”

낮지만 강한 천의 말에 왕일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 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해.”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아마도 잠영일호가 벽력탄이라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았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불이 붙는다거나 하는 여타 다른 피해는 없었다.

신호가 오자 왕일이 도를 들고 일어섰고, 천을 비롯한 이들이 그늘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수하들이 모두 몸을 감추자 왕일은 천천히 백독문을 향해 걸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왕일의 몸을 두들겼지만 그는 그것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과연 내가 맞는 것일까?’

지금 그가 하는 행동은 잠영일호의 말과 죽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괜찮겠지.’

잠영일호가 그리 말했다는 것은 교주인 사마유운이 뭔가 언질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는 왕일이었지만,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화영영 그년이 다 낫기 전까지는, 날 죽이지 않을 거야.’

“후우~”

깊은 숨을 몰아 쉰 왕일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번쩍! 콰르르르르릉!

순간 번개가 주위를 밝혔고, 뇌성이 천지를 울렸다.

그리고 그와 때를 맞추어 왕일의 발이 대지를 박찼다.

“적이다!”

“문을 닫아!”

망루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무사가 왕일을 발견하고 외치자 우르르 정문을 향해 달려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막 백독문을 향해 들어갔던, 시선을 끌기위해 남았던 이들을 죽이고 돌아온 백독문도들이었다.

이십 장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미처 다 닫히지 못한 문을 향해 왕일의 몸이 돌진했다.

“쏴라!”

화살과 독침이 왕일을 향해 날아왔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진 못했다.

화살은 그의 도를 뚫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고, 독침의 독은 이미 무용지물이란 것이 밝혀진지 오래였다.

독침이 왕일의 살갗을 뚫자 곧 그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독은 비로 차가워진 왕일의 몸을 데우는 역할만 했을 뿐이었고, 일단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안 왕일은 자신감을 얻었다.

‘더 독한 것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독은 나에게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확인할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왕일이 다른 이들을 물리고 혼자 온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잔뜩 도에 뇌기를 모은 왕일이 그것을 닫히고 있는 문을 향해 내뿜었다.

“하앗!”

펑!

기합과 함께 발출된 뇌기가 문을 두드리자 폭음과 함께 문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지지지직!

“끄으으으…….”

‘됐다!’

경력에 휘말린 이들이 죽는 것은 예상한 일이었고 그 파괴력이라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뇌기에 감전되어 부들부들 떠는 뒤쪽의 인물들은 왕일이 바라고 있던 모습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

왕일의 무위를 본 백독문 무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사실 왕일같은 놈은 백독문이 진짜 싫어하는 놈이었다.

독도 안통하고, 원거리에서 쏘는 것들은 모조리 튕겨내니 방법은 같이 붙어서 싸우는 것뿐인데, 백독문은 초절정고수에 의해 유지되는 문파도 아니었고 절정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강시를 만드는 것에 그렇게 매진했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일단 적이 침입을 했으니 막기는 해야 했다.

그리고 아직 그들의 자랑인 강시는 그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문제는 뒤에서도 연신 두들기고 있는 놈이 있어서, 누구를 먼저 처리해야 하는지 그것을 정하는 것이었다.

강시가 무한정 많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크악!”

왕일의 도에 다시 한 명의 무사가 터져나갔다.

몸통을 맞았기에 그나마 비명을 지를 시간이라도 있었지, 그 전에 머리를 맞은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저놈이 우선이다! 저놈을 죽여!”

아무래도 잠영일호는 멀리서 화살을 쏘아대니 그 피해가 왕일보다는 훨씬 경미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눈에 보이는 시각효과 또한 왕일이 뛰어나니 왕일이 표적이 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붙어있던 암기들을 후두둑 털어 낸 왕일의 머리에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이렇게 쉽지?’

이곳에 오기까지 죽은 이들이 얼마이고, 한 고생이 어떠했던가.

그런데 막상 들어오니 너무 쉬웠기에 마치 사기라도 당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일렀다.

이제 백독문의 정예가 그를 막으러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를 상대한 것은 백독문에서도 하급에 속하는 이들과 인근 부족에서 끌어 모은 이들 뿐이었다.

뭔가가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 몸을 돌린 왕일이 도를 이용해 그것을 막았다.

쾅!

왕일의 도를 때린 것은 단 한 대의 화살이었고, 그 화살에 맞은 왕일이 젖은 땅을 주르륵 미끄러졌다.

왕일의 눈에 다시 살을 메기는 궁수와 그런 그의 좌우로 달려오는 이들이 보였다.

다섯이었는데 만도를 든 그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 대롱을 든 이십여 명의 사람들은 벌써 주둥이에 대롱이 물려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왕일은 일단 주의해야 할 것은 화살을 든 놈이라고 생각했다.

독침이야 신경 쓸 것 없고, 만도야 오려면 시간이 있으니 그가 궁수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왕일이 궁수를 경계할 때 화살이 날아왔다.

미리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피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독침들이 미리 그가 피할 방향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쏟아졌다.

“흥!”

왕일은 독침은 신경도 쓰지 않고 좌우에서 만도를 휘둘러오는 적들을 맞아 도를 휘두를 준비를 했다.

따끔.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독침들이 있었지만, 온 몸에 이미 뇌기를 돌리고 있었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독침이 박힌 자리가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릿한 게 이제까지의 독과는 다른 것 같았다.

그 저릿함 때문에 만도를 맞아가는 왕일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늦었고, 설상가상으로 파괴력을 가득 담은 화살이 한 대도 아니고 세 대씩이나 날아오는 중이었다.

‘젠장! 너무 방심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왕일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사이 만도는 이미 그의 몸을 갈라오고 있었고, 화살은 벌써 코앞에서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왕일이 몸을 휘돌렸고, 그와 함께 그의 도도 같이 회전하면서 몸을 꿰뚫으려는 화살들을 쳐냈다.

그러는 동안 어떤 만도는 벌써 왕일의 옷깃을 스치려고 하는 중이었다.

“하압!”

기합소리와 함께 도와 대지가 만났다.

쾅!

왕일의 도가 땅에 꽂히면서 그 속에 담겨있던 뇌기가 대지에 흘러들어갔다.

파지지지지직!

젖은 땅을 타고서 퍼진 뇌기가 막 왕일의 몸을 가르려던 만도의 주인들을 관통했고, 뇌기에 관통당한 만도의 주인들이 마치 무언가에 막힌 것 마냥 그대로 딱 정지했다.

그 찰나의 순간 왕일은 기분 좋게 자신의 몸을 따라 흐르는 뇌기를 느끼며 다시 몸을 휘돌렸다.

도의 궤적에는 만도도 있었고, 그것을 든 팔도 있었으며 어떤 이는 몸통이 걸렸다.

이번 휘두름에는 뇌기를 실지 않았기에 도의 날카로움만으로 그것들을 스치며 지나갔다.

서걱!

왕일의 도는 예전과 달랐다. 뭉툭한 도신은 예리하게 날이 서있었으며,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잘라버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아악!”

몸통이 잘린 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팔이 잘린 이는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왕일은 그런 그의 머리를 밟으며 멀리서 다시 화살을 메기고 있는 궁수에게로 몸을 날렸다.

콰직!

목이 부러지며 비명소리가 멈췄고 순간 왕일은 궁수의 면전에서 도를 힘껏 내리 찍고 있었다.

당황한 궁수가 활을 들어 그 공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실린 힘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번에는 뇌기가 서려있었기에 활이 터져나가며 그 파편들이 궁수를 향해 쏘아졌다.

“크윽!”

그래도 실력이 있는 인물인지 활이 터짐과 동시에 몸을 뒤로 날리려했다. 그러나 왕일의 발이 먼저였다.

퍽!

발에 맞은 궁수의 턱이 부서지며 입술이 코에 닿았다.

“개새끼! 멀리서 숨어서 쏘니까 좋냐!”

팔꿈치로 궁수의 머리를 부수는 왕일의 귀에 까칠한 음성이 들려왔다.

-불만 있냐?

당연히 잠영일호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에도 잠영일호는 여기저기로 화살을 날려 백독문의 인물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왕일도 알 수 없었고, 백독문의 무사들도 알 수 없었다.

“아니요!”

일단 대답은 하기로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미친척하고 자신에게 화살을 날릴지 누가 알겠는가?

궁수를 처리한 왕일이 주위를 둘러보자 우르르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적들이 보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들은 어수선했고, 뭔가 체계가 잡혀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사실 허둥대는 적들의 움직임은 왕일이 아니라 위치를 바꿔가며 원거리에서 화살을 날려대는 잠영일호와 어둠속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덕분에 왕일은 쉽게 적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완벽한 조화.

그 말밖에는 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왕일이 몸에 박힌 독침을 제거하고는 다시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

“후우~”

긴 숨을 내쉬며 왕일이 자신의 도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폭우도 피를 흐르게 하지 못했다.

흐르기도 전에 도가 게걸스럽게 피를 먹어치웠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과거 살인 후에 쾌감에 떨던 자신이 떠오른 왕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그것을 극복했는지, 아니면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왕일은 현재 쾌감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후회나 자책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그의 옆구리를 찔러오는 칼이 있었다.

챙!

“웃차!”

다시 하나의 생명을 사라지게 만든 왕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비규환.

딱 그 말로 설명이 되는 상황이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음에도 불타는 곳이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 기름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주변을 밝혀주었지만, 모든 것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다.

왕일은 불이 만들어내는 음영 속에서 움직이는 이들을 느낄 수 있었다.

천을 비롯한 이들이 그곳을 징검다리삼아 이동을 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을 죽이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가?’

지금까지 죽인 이들이 몇 명인지 몰라도 남아있는 이들은 아직도 많았다.

적힌 책자에는 분명 천이 안 된다고 했었고, 일전에 죽은 이들이 이백은 되었었다.

그리고 오늘 죽인 이들이 자신만 해도 벌써 백은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왕일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이들은 넘쳐났고, 날아오는 독침은 빗방울과 비교해도 적지 않았다.

화살도 처음 상대했던 궁수만큼은 아니어도 죽이고자 하는 의지는 더 강했고, 수도 더 많았다.

‘지쳤나?’

몸에 힘은 떨어지지 않았다.

도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적들의 모습과 날아오는 화살, 칼을 지켜보는 눈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것일까?

서걱!

순간 왕일은 자신의 도에 목이 잘려 날아오르는 적의 머리를 보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렇군. 너무 오랜만이야. 그리고…….’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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