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놈들이 포위했습니다만, 외곽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공격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의 말을 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지만 잠영일호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나 되어 보이더냐?”
“최소 오백입니다.”
“그래?”
사실 백독문의 문도들은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오백이나 있다는 것은 총력을 기울인 것이거나…….
“주변에 있는 부족들을 끌어 모은 것이겠지.”
그것이 더욱 골치 아픈 것이란 것을 잠영일호는 알고 있었다.
우림에 사는 부족들답게 각 부족은 저마다 각기 독특한 사냥기술과 독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마취시키는 것이 목적인 것도 있었다.
힐끔 왕일을 바라본 잠영일호가 손을 털었다.
“응?”
상처부위를 지혈하고 있던 왕일은 자신의 손등에 날아와 박힌 암기를 보고 의문을 나타냈다.
아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암기를 뽑아내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전히 눈을 빛내며 사방을 둘러보는 이들과 운공에 열중인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다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잠영일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의 눈과 암기를 번갈아 바라보던 왕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좋아.”
마치 뭔가를 확인한 것 같은 만족한 듯한 잠영일호의 음성에 그 분노는 더욱 커졌다.
막 분노를 터뜨리려는 찰나.
크어어엉!
무엇인지 모를 짐승의 울부짖음과 함께 사방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새들이 사라지는 곳에 검붉은 휘장이 드리워졌다.
밤이 찾아오는 것이다.
“놈들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겠군.”
해가지면 빽빽한 삼림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완전한 암흑으로 변할 것이고, 적들에게는 최고의 은신처이자 공격무대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밤은 그들만을 위한 무대가 아니란 사실이었다.
“주변 대부분이 늪이었습니다.”
우의 말에 잠영일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는 늪이었고, 앞은 빽빽한 우림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어디로 가더라도 위험이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었다.
“놈들에게 얼마나 잘못된 결정이었는지 가르쳐 줄 시간이다.”
잠영일호가 궁(弓)을 들고 일어서자 왕일도 자신의 도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왕일은 도를 쓸 기회가 없었다.
워낙 멀리서 암기만 쏘아댄 이유도 있었지만, 잠영일호가 대응을 포기하고 무조건 후퇴를 외쳤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한을 풀 순간이었다.
잠영일호와 왕일이 걸어 들어가는 우림에 검은 장막이 내려오고, 그 속으로 나머지 이백구십 명의 인원이 사라지듯 스며들었다.
어둠을 벗 삼는 것은 백독문만이 아니었다.
죽음을 위해 키워진 존재들. 배신자들 또한 같은 길을 걸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재앙이 되리라.
***
“어차피 싸울 거면서 왜 도망친 겁니까?”
걸어가던 와중에 왕일이 궁금한 듯 물어봤는데, 그 질문을 들은 잠영일호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혀를 찼다.
“쯧쯧, 네놈 머릿속엔 똥만 찬 것이 분명하구나.”
마호성에게는 천재라는 말까지 들었던 왕일이었건만, 잠영일호에게는 똥만 찬 바보라 불리는 신세였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알 턱이 없었다.
“지금 이곳은 놈들의 본거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놈들은 함정으로 몰아넣는 다는 생각에 우리가 후퇴만 하자 심하게 공격하지 않고 몰기에만 주력했다. 그때 우리가 반격을 했다면 죽은 이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기기라도 했다면 벌써 꽁무니를 뺄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방심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 경계를 하더라도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보다는 느슨해졌을 것이다.
“교주님은 놈들을 완전히 박살내라고 했다. 그 말씀은 그저 몇 놈 죽이고 오란 것이 아니라 본거지 자체를 쓸어버리란 것이다.”
잠영일호는 이번 싸움에서 질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왕일의 머리를 스쳤다.
“몸은?”
잠영일호의 말에 왕일이 자신의 손등을 들어보였다.
어느새 그의 손등에 남아있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칠흑(漆黑)같은 어둠속에서도.
“놈들은?”
왕일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몇 군데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쪽에 많이 몰려있군요.”
백독문이 주변 부족민들을 끌어들인 것은 어쩌면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왕일의 기를 느끼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백독문의 정예만 왔다면 왕일로서도 힘들 수 있었겠지만, 부족민들이 모두 그들과 같은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은신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왕일이 더 뛰어난 것뿐이었다.
“놈들에게 공포를 보여주자.”
말을 마치고 잠영일호가 주변에 널려있는 기다란 풀잎들을 한 움큼 뜯었다.
그리곤 어느새 빳빳이 곤두선 풀잎들을 시위에 걸더니 이내 쏘아냈다.
“큭!”
비명소리와 함께 어수선한 움직임이 느껴지자 잠영일호가 재빨리 왕일의 뒤에 숨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왕일이 재빨리 도를 들어 전면을 향해 휘둘렀다.
채채채챙!
우박같이 그들을 향해 날아오던 암기들이 왕일의 도에 맞아 떨어지거나 튕겨나갔고, 도를 피한 암기들은 왕일의 몸에 박혔다.
그곳에 어떤 독이 묻혀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일에게는 어떠한 위험도 되지 못했다.
그 사이 잠영일호는 연신 시위를 당기고 있었고,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인간방패가 된 왕일의 뒤에서 안전하게 시위를 놀리고 있는 잠영일호는 새삼 왕일의 몸에 대해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쓸모가 많은 몸이라니!’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암기의 빗줄기가 멈췄고, 사방은 적막에 둘러싸였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돌아선 왕일의 눈에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잠영일호의 눈동자가 보였다.
검은 티끌이나 뻘건 핏줄도 보이지 않는 순진무구하게까지 보이는 그 눈동자를 보면서 왕일은 자신의 시력을 저주했다.
깜박이는 그 눈에는 기다란 속눈썹까지 자리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릴 정도였다.
왕일은 자신의 분노를 풀 곳을 찾고 있었고, 적들은 그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원거리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직접 때려죽이겠다고 찾아온 모양이었지만…….
쾅!
분노를 머금은 뇌기가 전면을 향해 뿌려졌고, 그 속에서 떨어진 팔다리 몇 개가 허공을 부유했다.
치솟은 흙먼지와 나무 조각들, 풀잎을 헤치며 뛰어든 왕일의 눈에 뒤로 넘어진 채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가 보였다.
“죽어!”
퍽!
내리친 왕일의 도에 맞은 이의 몸이 터지며 반으로 갈라졌다.
보통 도를 맞은 몸뚱이는 잘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일부러 내공을 이용해 상대의 몸을 터뜨리지 않는 한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왕일은 의도하지 않아도 상대의 몸이 터져나갔다.
미친 듯이 상대를 찾아 휘두르는 그의 도는 자비가 없었고, 그 도에 맞은 이들은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흩날렸다.
그 사이 좋은 방패를 잃어버린 잠영일호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왕일을 노리고 달려드는 이들에게 풀잎을 날리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풀잎이건만 그의 손에 들리면 철시와도 같이 변했으며 적의 몸을 뚫은 것도 모자라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 틀어박혔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왕일이 일으키는 살풍에 몸을 맡기며 너울거렸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이 격전을 치르는 동안 고요한 어둠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생사를 건 쟁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소리 없는 죽음의 손길을 상대에게 날렸고, 죽은 이는 그 시신조차도 어둠속에 가려졌다.
시간이 흘러 곤충과 본능을 따르는 짐승에 의해 드러나겠지만, 사람이 일부러 찾기 전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적들의 은신은 그만큼 뛰어났고, 뛰어난 만큼 죽음의 골짜기를 넘는 동안에도 세상의 밝은 빛은 그들의 몸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었다.
***
“피해는?”
묻는 잠영일호는 담담했지만, 대답하는 천의 목소리는 회한이 묻어있었다.
“현재 인원 이백삼십삼 명입니다.”
왕일이 자신의 몸에 박힌 암기들을 모두 빼내고 옆구리를 파고든 만도를 뽑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몇몇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항상 같이 다니던 열 명의 수하들 중에서 넷이 보이지 않았고, 천과 지, 현, 황, 그리고 일와 월 뿐이었다.
그 중에서 일과 월은 네 구의 시신을 앞에 두고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자신들을 보호하느라 죽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어린 두 사람과 가장 나이가 많은 네 사람이 살아남았다.
격전은 떠오르는 햇살과 함께 끝이 났고, 지금은 몸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부상자는?”
“…….”
죽은 이들 중에서 검이나 도에 죽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암기에 발라진 독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
지금 부상을 입은 이들도 독에 중독이 된 상태였다.
차라리 검이나 도에 찔리거나 잘렸다면 같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나, 독에 중독되어 의식을 잃고 있었기에 그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원을 남긴다는 것도 현 상황에서는 무리였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그것을 알기에 천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상자는?”
거듭 묻는 잠영일호의 말에 마지못해 천의 입이 열렸다.
“십오 명입니다.”
천의 말에 잠영일호가 고민에 빠졌다.
아직 놈들의 본거지에 도달하지도 못했건만 벌써 삼분의 일이 떨어져나가게 된 상황이었다.
더 간다고 하여도 일의 성패는 장담하기 힘들었다.
‘처음부터 너무 무모한 계획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온 것은 자신의 결정이었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었다.
“백독문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정보대로라면 대략 오십여 리가 남았습니다.”
천의 대답에 잠영일호가 누워있는 부상자들을 바라보았다.
버리고 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리고 잠영일호에게는 같이 싸우고 있는 이들이 동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눈이 남아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각기 다른 연령층의 사람들.
그들의 몸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베이고, 찔리고, 잘려진 옷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네 생각은?”
잠영일호의 급작스런 물음에 왕일은 답을 하지 못했다.
“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왕일이라고 딱히 좋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엇이 최선일 것인지를 생각했다.
“두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꺼내기 어려운 말이 드디어 왕일의 입에서 나왔다.
부상자들 대부분은 의식도 없는 이들이었는데, 그런 그들을 이곳에 버려둔다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왕일의 말에 쌩쌩한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진 그때, 부상자들 중에서 그나마 의식이 멀쩡한 이가 천을 불렀다.
“예.”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인지는 너도 알 것이라 믿는다.”
이제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노인의 힘겨운 말에 천이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이런 이별을 많이 겪은 이들이었다.
광산이란 그저 캐내기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함몰사고도 빈번히 일어났다.
특히 초기에는 경험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수많은 이들이 낙반에 깔려죽었다.
함몰이 일어났을 때, 그렇게 죽은 이들도 있었지만 부상을 당하거나 갱도 내에서 고립되는 이들도 있었다.
위험하지 않은 곳은 서둘러 구조를 했지만, 구조작업이 힘든 곳은 차라리 포기를 했다.
지금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형님…….”
“여자와 아이는 보호한다. 나로 인해 다른 이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알면 되었다.”
말을 마친 노인이 살아남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의 눈빛을 받은 이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잠영일호가 몸을 일으키며 말을 했고, 그렇게 열다섯의 부상자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이들의 눈에는 한가지의 굳은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반드시 살아가겠다는.
그리고 그것은 왕일의 눈에도 들어차 있었다.
***
쏴아아아아아~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백오십 쌍의 눈이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조 건물과 석조건물이 어우러진 멋들어진 장원이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백독문.
결국 그들의 면전까지 온 것이다.
건물의 앞에 여러 가지 나무로 만든 갖가지 형상과 알아보지 못할 말로 적혀 있는 현판이 있었다.
경계는 아주 심했는데, 아마도 왕일 일행을 잃어버린 탓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그때 외부에서 돌아오는 삼백여 명의 인물들이 보였는데, 몰골이 지저분하고 상처를 입은 것이 어디서 격전을 치르고 온 것 같았다.
순간 천 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