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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75화 (75/138)

75화

한참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사마유운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는데, 그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얽혀있었다.

“얼마나 된 것이지?”

‘제길!’

모르기를 바랐지만, 그러기에는 사마유운의 무공이 너무 높았다.

아니, 모든 것에 박식한 그답게 의술에도 조예가 뛰어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래.”

가만히 앉아있는 사마유운의 모습이 왠지 불안해지는 화영영이었다.

왕일이 첫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딱히 왕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음희라고까지 소문이 난 그녀의 남자 경험이 전무 하다는 것은 세인들에게는 의외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남자와 잔 경험이 없었다.

그것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 사마유운이었기에 누가 아빠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낳을 건가?”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화영영의 대답.

하긴 낳지 않을 거면 지금 아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다시 입을 다문 사마유운이 이번에는 눈을 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눈을 뜬 사마유운이 입을 열었다.

“교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가?”

“예.”

“왜?”

사마유운의 물음에 화영영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돌아가길 바라십니까?”

“물론.”

“전… 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교로 돌아가자는 사마유운의 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오랜 시간이었다.

그리고 사마유운의 마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부담이 되어 화영영을 짓눌렀다는 것을 사마유운을 알 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나?”

“아니요.”

“그런데 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화영영의 대답을 들은 사마유운이 몸을 일으켰고, 그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가 빠져나간 방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녀 자신만 알 것이었다.

“예?”

왕일은 잠영일호의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놈들을 처리하라고 했다.”

“이유가 뭡니까?”

“이유? 명령이다.”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이미 한 번 물리친 경험이 있지 않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지 않습니까? 이번엔 놈들의 본거지란 말입니다.”

황당해 하는 왕일을 보면서 잠영일호도 속이 편할 리 없었다.

‘결국…….’

사마유운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하라면 해야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악불군도 화영영도, 그리고 다른 어떠한 이들도 돕지 말고 왕일과 버러지들의 힘만으로 백독문을 친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명령이었다.

“나도 간다.”

그 말에 왕일이 안도와 의문이 겹친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잠영일호는 스스로의 결정에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왜 그 순간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잠영일호도 알 수 없었다.

사마유운의 명령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같이 가겠다는 말이 나왔고, 그런 그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마유운이 허락을 했었다.

‘기대 때문이었나?’

악불군이 화영영을 보면서 느낀 것, 그리고 잠영일호가 왕일을 보면서 품었던 희망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냈을 수도 있었다.

“그럼 잠영대도 같이 가는 겁니까?”

“아니, 나 혼자뿐이다.”

“그럼 인원은 얼마나 쓸 수 있습니까?”

“삼백.”

삼백도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정말 이유를 모르십니까?”

‘네가 이유지.’

답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파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지. 그래서 계기를 만들어주려는 것이 목적이다.”

패진무관이 한철진에서 구양신마와 구음신마의 공동제자인 구절심에게로의 권력이양을 하는 중이었기에 신흥사패는 소림 등의 도발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마교에서 보기에는 정파가 그들의 속셈대로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신흥사패가 조용히 있자 허장천도 막바지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그가 자금을 쥐고서 어려움을 호소하며 내놓지 않자 소림등도 자연 그 손길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마교가 원하는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계획대로 백독문을 치려는 생각도 숨어있었다.

현재 무림은 각자의 다른 생각 속에서 그렇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진정 수라대의 도움은 바랄 수 없는 것입니까?”

백독문이 쳐들어왔을 때도 수라대가 있었기에 그나마 피해가 적었었다.

그럼에도 천 단위가 넘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번에는 적진에 들어가면서 겨우 삼백의 인원만을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기에 왕일의 마음이 답답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

“휴우~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왕일의 머릿속에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잠영일호가 같이 가니,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마도 그가 뭔가를 준비했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 잠영일호도 다른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였다.

그리고 웃기게도 잠영일호가 제일 기대고 있는 것은 바로 왕일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니 누구의 생각이 맞을 지는 아마도 뚜껑을 열어봐야 알게 될 것 같았다.

“언제 가는 것입니까?”

“내일 인원을 선발해서 내일 모레 출발할 것이다.”

대답을 하며 잠영일호는 앞으로의 일을 그려봤다.

‘교에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우리가 진짜 백독문을 친다고 한다면 이곳으로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 결국 호남은 우리 손에 들어 올 것이다.’

자신들이 백독문으로 향하면 남찬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잠영일호였다.

남찬우는 찾아 온 기회를 버릴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

잠영일호가 돌아가고 천에게 삼백의 인원을 차출하라 지시한 왕일은 밤늦게까지 수련에 임했다.

수련하다말고 잠깐 휴식을 취하는 왕일의 머리에 삼백을 뽑아서 그들로 백독문을 친다고 하자 황당해 하던 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자신도 간다고 하자 천은 원군을 얻은 표정이 아니라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댁도 우리와 같은 처지구려.]

이 말이 얼굴 가득 적혀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죽이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명령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으니 그것은 바로 잠영일호가 같이 간다는 것이었다.

잠영일호가 같이 간다면 죽이려고 한다는 가정이 맞지 않는 것이다.

진짜 죽음의 길이라면 잠영일호가 동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니까.

변수는 또 있었다.

바로 사마유운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시험하는 거라면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을 거야.’

나름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왕일이었으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사마유운은 그를 보러온 것이 아니라 화영영을 보러 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왕일을 살필 생각도 있긴 했겠으나 좋아졌다는 화영영을 보러 온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시험이든 아니든 최선을 다하자.’

왕일의 최선은 백독문을 멸문시키는 것도, 무명을 날리는 것도, 혈마교를 발전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무조건 살아남는다!’

최악의 경우는 도망을 치더라도 살기로 했다.

물론 그 시점은 잠영일호가 죽는 시점이 될 것이었다.

아니라면…….

‘그를 죽여서라도!’

조용한 다짐을 하면서 밤을 보내는 왕일이었다.

***

헉, 헉…….

차오르는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삼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지친 몸을 뉘였다.

앉아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퍼질러 누워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거의 이십대 초반이었는데, 오히려 사십대나 오십대로 보이는 이들은 쌩쌩한 모습이었다.

“여기.”

잠영일호가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고 그것을 받아든 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나눠주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제어하는 독의 해독약이니 그런 미소를 지을 만 했다.

모두 단약을 먹고도 열 개가 남았다.

한 주머니에 삼백열 개를 담았으니 열 명이 죽었다는 얘기였다.

손 안에 남아있는 단약을 보면서 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달리다가 죽은 것이었기에 그 죽음이 더욱 안타까웠다.

그런 천이 남은 단약을 주머니에 넣고서 잠영일호에게 건네주며 그의 얼굴을 새삼 다시 보았다.

사실 열 명이 죽은 것도 잠영일호의 도움이 있었기에 줄어 든 숫자였다.

만일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최소한 오십여 명은 더 죽었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

그때 보여준 잠영일호의 무위는 옆에서 지켜보는 천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니 쫓는 적들은 어떠했겠는가?

그들이 추격을 멈춘 것도 이해가 가는 천이었다.

거리에 상관없이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날려버리고, 그런 것조차 없을 때에는 무형시를 날려버리는 그의 활솜씨에 학을 뗐으리라.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고개를 흔든 천이 자리를 잡고 운공에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기력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괜찮으냐?”

잠영일호의 말에 몸에 박힌 철침과 바늘, 그리고 삼각형의 얇은 철판을 떼고 있던 왕일이 쌍심지를 켜고 그를 노려보았다.

꽉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으로 보아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끝내 왕일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리고 부지런히 자신의 몸에 박혀 있는 것들을 떼어내는데 열중할 뿐이었다.

뽁!

“큭!”

등에 박혀있던 것을 잠영일호가 무식하게 잡아 뽑는 바람에 절로 신음이 새나왔다.

끄트머리에 낚시 바늘처럼 갈고리가 진 암기를 살 거죽을 찢으며 그대로 잡아 뽑은 것이다.

다시 왕일의 머리가 무서운 속도로 잠영일호를 향해 돌려졌고, 눈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것은 분명 살기였다.

“아프냐?”

이 말에 왕일의 인내가 바닥나고 말았다.

“젠장, 그럼 안 아플 것 같습니까!”

왕일이 이렇게 열을 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나름 성과가 있어서 천보다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왕일의 몸에 어찌 이렇게나 많은 암기들이 박혔겠는가?

바로 잠영일호가 무식하게 왕일을 잡고서 방패삼아 암기들을 쳐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쳐 냈다기보다는 완전히 암기받이로 이용해 먹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살았지.”

“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전음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라고 따지기라도 하련만, 아직도 왕일은 전음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듣고 있는데, 거기다 다른 놈들이 어떻게 되건 내가 살아야지란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확실히 왕일의 몸은 독에 강했다.

그 이전에 날아 온 암기를 몇 대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했던 것이다.

적들은 왕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암기를 왕일에게 집중시켰고, 죽은 이들 대부분이 왕일의 곁에 있다가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네가 독에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왕일은 다시금 잠영일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염려 마십시오. 이번엔 그리 무모하게 하지 않을 테니.”

“아니, 넌 그때를 기억해야 한다.”

“예?”

잠영일호의 말에 왕일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는 도망치지 않았다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그 같은 일을 하라는 듯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렇게 알아두어라.”

말을 하는 잠영일호는 좀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바가 맞는다면, 너는 좀 더 앞을 내다봐야 한다. 단순히 하위무사로 싸우는 자세만을 배워서는 안 돼. 사람을 부리는 위치에 선 자의 마음가짐도 알아야 한다. 너나 나를 위해서도.’

생각은 많았지만 그것을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우림이 펼쳐진 곳에 이런 곳이 있다니…….”

주위를 둘러보는 잠영일호의 말 속에 우려가 깃들어 있었고, 그의 말에 다른 이들도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무와 수풀로 빽빽하게 들어찬 곳에서 삼백여 명이 몸을 쉴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그때 정찰을 나갔던 지와 우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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