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왕일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들의 눈길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설픈 악인이 될 바에야 그냥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
잠영일호가 왜 그런 말을 하였고, 왜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알게 되었다.
왕일은 이들을 책임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가 이 싸움에 나서는 유일한 이유는 화영영이 원하기 때문이었고 가능하면 자신의 무공을 다듬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직막으로 예전 자신이 느꼈던 희열을 느끼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변했다고는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그런 희열이 계속되다가는 더 큰 것을 찾으려 할 수도 있었고, 그가 가장 바라지 않는 모습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악인이되 살성은 되지 않을 것이다.’
느낌을 확인하고자 아무나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어쩐지 갈수록 더욱 변명이 늘어나는 것 같았지만, 왕일은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일에게 맞고 쓰러졌던 노인이 일어났다.
“다시 말해봐.”
“…….”
“잘 들어라!”
노인을 무시한 채 단상 위로 돌아온 왕일이 고함을 질렀다.
“살아남는다면 이전과는 다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도 중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교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곳에서 삶을 영위할 것이다.”
그 말에는 약간 반응이 있었다.
“지금은 노예이지만, 살아남는 이들은 나의 부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자면 일단 오늘 싸움에서 기필코 살아남아야 한다!”
눈에 희망의 빛이 보였지만, 그것은 왕일을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었다.
“오늘 싸움에서 진다면 남아 있는 이들 또한 같은 운명에 처해지리라.”
그 말에 눈에 독기가 서렸다.
“지킬 것이 있는 자! 죽어라!”
마지막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남아 있는 이들은 진짜 어린아이와 병자 그리고 아이를 임신한 여인들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싸울 수 있는 이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제 목숨 소중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거기다 살아난다면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음에.
마지막 말은 자신보다 더 소중한 이가 있다면 죽음으로 싸움에 임하라는 소리였다.
말을 마친 왕일이 천을 바라보았다.
“두 부대로 나눠라.”
“어떻게 나누면 되겠습니까?”
“죽을 자와 살아남을 자. 스스로 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단! 죽을 자가 너무 적다면, 내가 뽑겠다.”
비록 천에게 말했지만, 그 말은 모든 이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천이 중인들을 바라보자 이미 그들 스스로 두 패로 나뉘는 중이었다.
한쪽은 나이가 많은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다른 한쪽은 여인과 어린 소년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일차로 죽을 자들이 백독문과 부딪치면 이차로 살아남을 자들이 상대하려는 계획이었다.
***
멀리서 왕일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악불군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웃기는 놈 아니냐?”
악불군의 말에 독고평이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할까?”
“어차피 화 장로님이 결정을 하셨으니 이번 싸움은 우리가 이겨야 합니다.”
“저놈들로는 힘들겠지?”
“예.”
단정적인 대답.
거의 이천이 이르는 인원으로도 백독문의 이백을 막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일반인 이천이 아니라 최소한의 무공이라도 익힌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천과 같이 정말 뛰어난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실패한다고 생각했다.
“좀 도와줄까?”
“전황을 보다가 끼어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놈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실합니다.”
“뭐, 뭐 썼다고 했지?”
“이미 알려진 혈의와 청사, 그리고 혈봉을 사용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오지는 않았겠지?”
“아마도 버러지들이 너무 약했던 모양입니다. 계획했던 것처럼 마지막에 오백 정도만 더 쏟아 부었으면 뭘 가지고 왔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이 백 명씩 보낸 것은 이유가 있었다.
백독문이 보유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제 알게 되겠지.”
그것은 독고평도 알고 있었다.
다만 대처법을 강구하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가볍게 말했다고 해도 백독문의 독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 하면 우리가 나서지 않을 수도 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악불군의 말을 듣고 독고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기에 절대 저들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불군은 흥미로운 눈초리로 왕일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기는 얼마나 준비됐지?”
“오백 자루입니다.”
“많이 모았네?”
“군대에서 돈을 주고 버릴 것들을 좀 가져왔습니다.”
“그건?”
“열 개입니다. 하지만, 가까이 군이 있는데 과연 써도 되겠습니까?”
“뭐가 걱정이야? 덮어씌울 놈이 알아서 찾아왔는데, 그리고 이곳 주변의 현에는 이미 충분한 뇌물을 먹이지 않았나?”
“그렇기는 하지만…….”
“됐어. 정파 놈들이야 아무리 떠들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고, 관에서만 침묵해준다면 백만 개를 써도 상관이 없으니까.”
“혹시라도 마음을 바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흥! 상관없다.”
관이란 것은 언제나 유용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악불군이었다.
도구를 잘못 쓰다가 손이 벨 수도 있지만, 자기 손만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줄까요?”
“그게 좋겠지.”
“알겠습니다.”
독고평이 신형을 날려 왕일에게로 향했다.
두 패로 갈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왕일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를 바라보았다.
-독고평 대주다. 부교주님의 심복이도 수라대를 맡고 있다.
어디서 지켜보고 있는지, 잠영일호가 전음으로 그의 신분을 가르쳐주었다.
“자, 받아라.”
독고평이 품에서 검은 자루를 꺼내더니 왕일에게 내밀었다.
“무엇이오?”
왕일의 말을 들은 독고평의 눈가가 씰룩였지만, 이내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벽력탄이다.”
왕일도 벽력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지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사용할지는 알아서 결정하도록.”
그 말만을 남기고 독고평은 자리를 떠났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에게 결정을 강요하는군.’
독고평이 떠나기 전에 모인 사람들을 흘깃 보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단순히 던지라고 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천!”
“예.”
왕일이 천을 부르자 그가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누가 죽고 누가 살든 간에 하나의 굴레 속에서 부대끼던 이들이었으니, 어찌 얼굴이 밝을 수 있겠는가.
“벽력탄이다.”
천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알고 있군?”
왕일의 질문에 천이 조심스럽게 벽력탄을 갈무리하더니 대답했다.
“지식은 전해지는 것이지요. 물론 전할 수 없는 지식도 있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터지게 만들도록.”
왕일의 말을 들은 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너를 비롯한 지, 우 등은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
“저…….”
“명령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알겠나?”
“예.”
천은 죽을 자의 자리에, 그것도 선봉에 설 생각이었다.
그리고 벽력탄을 사용할 한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천이 돌아간 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몇 사람이 왕일을 바라보았는데, 그런 그들의 눈을 마주 바라보는 왕일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윽고 사람들이 완전히 나뉘었고, 가장 앞줄에는 육십부터 삼십 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열 명이 서 있었다.
왕일의 말이 없었다면 천도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때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바로 독고평이 거느리고 있는 수라대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는데, 얼굴에 상처가 없는 이가 없었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상처로 도배되어 있는 이들.
마교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마검대, 잠영대, 수라대, 광살대를 이루는 사 대 가운데 하나인 그들은 광살대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싸움에 미친 이들이었다.
오죽하면 밥 먹는 것보다 싸움을 더 좋아한다고 하겠는가?
겨우 오십여 명이었지만, 그들이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연무장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철그렁.
그들이 내려놓는 자루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다른 말은 없었다.
자루를 내려놓고는 그저 중인들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일을 향해 시선을 던졌는데, 그 속에서 적개심이 살짝 내비쳤다.
-그들의 부교주에 대한 충성심은 남다르다. 네가 부교주에게 한 행동들이 그들의 적개심을 키운 것이니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들은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잠영일호의 전음을 들은 왕일은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그들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도저히 그 설렁설렁해 보이는 악불군의 밑에 있는 조직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자신과 싸우지 못해서 안달하는 악불군을 보지 않았던가.
그것도 완전하지 않은 자신과는 싸우기 싫은지 맛있게 익어가는 과실을 바라보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악불군의 시선을 생각하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루에서 나온 무기는 도와 검이었다.
이천여 명에 오백 자루의 무기. 턱없이 부족했지만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다 죽이지는 않겠지.’
왕일은 필요한 때가 되면 도움의 손길을 줄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살려나?’
이제는 갈 시간이었다.
***
기암괴석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역암산에도 평평한 곳은 있었다.
초지가 펼쳐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거의 백여 장에 육박할 정도로 넓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천여 명이 자리를 모두 차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바위가 우후죽순처럼 솟아 있는 곳에 천여 명이 흩어져 있었고, 나머지 천여 명이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바람은 신경 쓰지 마라.”
옆에 서 있는 잠영일호의 말에 왕일이 의문을 표했다.
“그래도 그들은 독을 쓰는 곳 아니오?”
“주무기는 독충과 독물이다. 그것들은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지.”
“그렇다 하더라도 독을 쓸 것 아니겠소?”
“쯧쯧. 그리 유심히 살피라 했거늘, 아직 이곳을 다 파악하지 못했단 것이냐?”
마치 모자란 제자를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소리에 왕일이 주변을 바라보았다. 분명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곳은 저 아래가 평지이지만, 주변에는 우후죽순처럼 바위들이 솟아 있다. 그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 언제 어떻게 변할 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해약을 복용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독에 당할 수도 있는데, 주무기인 독충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왜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 독을 쓰겠느냐?”
그의 말에 왕일이 다시 바람을 느끼자, 과연 잠영일호의 말처럼 순간순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었다.
“암습을 할 수도 있지 않겠소?”
잠영일호가 준 책자에는 백독문에대한 것도 나와 있었다.
독충, 독물보다도 더욱 위험한 것이 은밀하게 숨어드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를 무시하지 마라.”
‘역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놨다는 얘기였다.
“아마 저들도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몇 놈을 골로 보내줬거든.”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다는 말이었고 그 속에서 잠영대나 수라대가 이득을 본 모양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소.”
“말해봐.”
“어째서 이렇게 어렵게 싸움을 끌고 가는 것이오?”
솔직히 잠영대나 수라대가 나선다면 쉽게 끝날 수 있는 일 같았다.
“왜 쉽게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아니오?”
“아니다.”
잠영일호의 대답에 왕일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판단하기에 마교에서는 백독문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곳만 해도 지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말하곤 하지 않았는가?
“놈들의 침투조 다섯을 죽이는데, 내 부하 둘이 죽었다.”
말하는 잠영일호가 순간적으로 살기를 흘렸는데, 태연해 보이던 그도 지금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