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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64화 (64/138)

64화

“버러지들이 얼마나 남았느냐?”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죽은 것들과 작전을 수행하다 죽은 것들을 빼면 총 이천오백 정도가 있는데, 그중에서 싸울 수 있는 이들은 이천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아이들이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늙은이들입니다.”

“별다른 문제는?”

“탈출하려는 놈들이 있었는데, 그놈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본보기로 몇 놈 죽였더니 얌전해졌습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해약을 주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죽기 싫으면 가만히 있겠지요.”

아무리 결속력이 강한 이들이라고 해도 그중 몇은 그 속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도 삼천이 넘는 이들 중 단 몇이라는 것이 얼마나 결속력이 강한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마교에서 그런 그들을 관리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해약을 먹지 않으면 죽는 독약을 먹인 것이다.

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해약 자체가 독약이었다.

수십 년이나 지속되는 독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해약을 줌과 동시에 독을 복용시켰다.

그렇게 그들은 중독되어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도 따로 있었다.

아무리 배신자들의 후손이라고 해도 삼십여 년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광산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광산은 그 자체로도 위험하였고, 외부에 말이 새나갈 경우 관에서 조사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황금이라면 더욱더!

그렇게 삼십여 년을 광산에서 금을 캤기에 살 수 있었지만, 그 광산의 수명이 다해가서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물론 그 금은 마교를 풍요롭게 만드는 일에 쓰였다.

“이거, 이거. 내 명성에 먹칠을 하게 생겼군.”

“그렇기야 하지요. 이만한 인원이 있음에도 백독문 따위에게 등을 보여야 하다니.”

이 전쟁은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패배. 그것도 대패를 당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였다.

정파가 마음 놓고 판을 벌이게 하기 위해서.

***

“나오셨습니까.”

별관을 나서는 화영영의 모습을 본 잠영일호가 급히 다가왔다.

하지만 말을 하던 그가 멈칫했는데, 그것은 화영영의 외모가 상당히 변했기 때문이었다.

생기가 넘쳤고, 얼굴은 더 밝아졌으며, 삼십 대로 보이는 것은 비슷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피어나는 화사한 꽃 같았다.

“왜? 무슨 일이 있나?”

“예? 아, 아닙니다.”

말을 마친 잠영일호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화영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놈들은?”

“백독문은 현재 귀주의 경계를 넘어 육반수에 있는 청운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귀주 남쪽에는 소림을 위시한 다섯 개의 문파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교를 경계하기 위함인가?”

“예.”

사실 소림 등으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자그마치 삼천이 넘는 이들의 대이동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넘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행동이지만 겸사겸사 마교가 더 이상 행동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한 여차하면 백독문과 힘을 합치기 위함이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번 행동에 신흥사패는 동참하지 않았다.

그 이면에 깔린 생각을 알기 에 자신들의 목줄을 죄고자하는 행동에 동참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두 사람에게 천이 다가왔다.

“저…….”

“무슨 일이냐?”

화영영이 나서기도 전에 잠영일호가 천을 가로막았다.

“대장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천의 말에 화영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이 황급히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버러지들에게 무슨 일이 있나?”

버러지란 이곳으로 온 삼천 명에 달하는 배신자들의 후예를 일컬음이었다.

“좀 많이 죽었습니다. 백독문 놈들을 귀찮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흥!”

왜 천이 서두르는지 알 것 같았기에 화영영이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에서는?”

“화려한 패배를 원합니다.”

그 정도는 악불군이 이곳에 온 것과 정파의 사정을 듣는 순간 이미 짐작한 그녀였다.

잠영일호의 답을 들은 그녀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난 이곳을 내줄 생각이 없다.”

교와 상반되는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화영영의 말을 들은 잠영일호가 담담히 대꾸했다.

“언제까지 답을 얻을 수 있지?”

“화 장로님의 생각대로 하시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사마유운은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혈마교를 희생시켜 정파를 싸우게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혈마교를 존속시켜 정파가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혈마교로 인해서 그들의 신경이 귀주에 쏠리는 동안 다시 호남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사실 귀주보다는 호남이 더 먹음직스러운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과연 정파가 백독문이라는 문파 하나의 유입으로 인해서 정면 대결을 벌일 것인가도 의문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지루한 탐색전과 이간질, 거기에 불신감이 커져도 뭔가 매개체가 없다면 냉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다.

그럼 마교의 입장에서는 달리 변할 것이 없었기에 혈마교를 그냥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화영영의 뜻대로 하게 한 것이다.

가만히 잠영일호를 바라보던 화영영이 의미모를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얼마나 와 있지?”

“잠영대 중 열 명이 와 있습니다.”

단 열 명이 그간 잠영일호를 도와주었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었다.

“열 명씩이나?”

“한가한 놈들을 모조리 끌고 왔을 뿐입니다.”

잠영대 열 명이면 사실 악불군이 오지 않았더라도 화영영의 안전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단지 도주만 시키는 것이라면.

“언제부터 잠영대가 그리 한가해졌지?”

“묘한 놈이 우리 일을 대신할 때부터지요.”

“묘한 놈?”

“휘명이라고 왕일의 친구라는 놈입니다. 일전에 말씀을 드렸지요?”

“그 하만성의 제자인 장우석을 죽였다는 놈?”

“예. 같이 죽였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겠지요.”

“둘이 진짜 친구인가?”

“그렇게들 얘기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적인 경우가 더 많지요. 물론 당사자는 그것을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말입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좋아. 일단 왕일의 모든 것을 적어서 내게 보내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잠영일호가 품에서 무엇을 꺼냈는데, 하나의 책자였다.

“여기 있습니다.”

책자를 받아든 화영영은 속으로 잠영대, 아니 잠영일호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실망시키는 법이 없군.”

“사부님께 잘 배웠을 뿐입니다.”

잠영일호의 말에 잠영대주를 떠올리는 화영영.

그녀도 복면을 쓰고 있는 잠영대주를 딱 한 번 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화영영은 그에게서 위험한 냄새를 맡았었다.

“약초를 좀 더 구해줘.”

“알겠습니다.”

아직 왕일의 종마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곳을 지키라고 전해.”

화영영의 말을 들은 잠영일호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그? 그놈이 아니라, 그?’

분명 왕일을 가리키는 짧은 단어이지만,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네.”

***

“대장… 님?”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왕일의 모습을 본 천이 말을 더듬었다.

무어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왕일이 왠지 변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후루룩.

천이 뭐라고 하건 말건 왕일은 차를 마시는 것에만 열중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차 맛이 좋아.”

엉뚱한 답변을 한 왕일이 찻잔을 내려놓더니 천을 바라봤다.

“이 차 맛이 왜 좋은지 알아?”

“예? 아, 모릅니다만.”

“그 할망구가 끓여준 것이기 때문이야.”

할망구라면 화영영을 이르는 것이리라.

“아, 예.”

천은 짧게 대답한 후에 다시 차를 마시는 왕일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지금은 한시바삐 처리할 일이 있었지만, 왠지 왕일이 그런 그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길게 늘어뜨린 흑발, 윤기 나는 피부, 선명한 붉은 눈.

그 속에 자리 잡은 검은 동공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빛을 빨아들이는 지저의 굴 같았다.

그런 것들도 변화라면 변화였지만, 왕일의 태도가 더욱 천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왕일은 뭔가 모르게 쫓기는 듯한 모습이었고, 정리되지 않은 서랍장을 보는 것 같은 어지러운 느낌을 주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보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느낀다고 할까?

딸깍.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천의 상념을 깨웠다.

“할 말이 있다고?”

“예.”

“해봐.”

그 말을 들은 천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누굴?”

“제 가족, 동료, 친구들을 살려주십시오.”

“왜? 그들이 모두 죽을 짓이라도 했나?”

“아닙니다.”

“그런데 왜 모두 죽는다는 것이지?”

“벌써 오백이 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묻는 왕일의 음성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너무도 차분했다.

하지만 지금 천이 매달릴 곳이라고는 왕일이 유일했기에 그런 것들은 무시했다.

“어떤 이유로 죽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확실한가?”

“그것은… 하지만, 나간 이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원은 계속 빠져나가는 상태이고 말입니다.”

“그럼 진짜 죽었는지도 모르잖아?”

“…….”

왕일의 말을 들은 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 본명은 사비월입니다. 나이는 마흔둘. 교에 의해서 산에 갇히기 전까지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발탁되어 무공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처럼 무공을 익힌 이들은 많았지만,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이는 저를 포함해 백 명이 넘지 않습니다. 삼십 년 동안 말입니다. 저처럼 무공만 익힌 이들은 그나마 축복을 받은 이들입니다. 다른 이들은 하루 여덟 시진을 꼬박 어두운 탄광에서 금을 캐며 지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을 오래 살리고,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들도 무공을 배웠습니다. 그러다 특출한 능력을 보이는 이들은 저처럼 다시 발탁되기도 했지요.”

여기까지 말한 천이 왕일을 바라봤지만, 왕일의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광산의 금이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 의견이 아니고 나이 드신 분들의 의견입니다. 그러다 한꺼번에 이동하기 시작하자 불안감의 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사람들을 데려다 죽이고 있다?”

“직접 죽이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보가 없으니 알 도리가 없습니다.”

“마교가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지? 차라리 그 광산에 몰아넣고 무너뜨려버리면 더 쉬울 것을 말이야. 여기까지 옮기는 일만 해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때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말은 내가 대신해줄까?”

바로 잠영일호였다.

급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었음에도 왕일은 전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마치 그가 나타날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하지만 천은 달랐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치 금기를 범한 사람처럼.

“그렇게 해주겠소?”

“물론.”

말을 마친 잠영일호가 왕일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 전에 이들, 버러지들이 왜 산에 갇히게 되었는지 말해주지. 이놈들은 과거 하극상을 일으켰던 이들의 후손이다. 그 일로 분노하신 교주님이 관계된 모든 이들을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잡아들이신 것이지. 그 와중에 반항하는 이들은 모조리 죽었다. 사실 그때 마침 광산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들도 모두 죽을 목숨이었지. 어쨌거나 모진 게 목숨이라고, 가정을 이루게 해주었더니 당시만 해도 겨우 오백여 명이었는데 계속 불어나더군.”

“그 편이 더 관리하기 쉬울 테니. 그렇지 않소?”

“맞다. 가족이 생기자 오히려 더 열심히 일을 하더군.”

“자, 그럼. 이제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해주겠소?”

“뭐, 별것 아니다. 아까 이놈이 말한 것처럼 광산이 바닥을 드러내니 쓸모가 다했을 뿐이다. 겸사겸사하여 그 버러지 같은 목숨을 교를 위해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뿐이지. 백독문이란 놈들이 이곳을 향해 온다는데, 그들을 처리하러 보낸 것이다. 다만 역량이 모자라 죽은 것이고.”

“사실이오?”

왕일의 물음에 잠영일호가 살짝 머리를 갸웃했다.

“왜?”

“그것이 전부일 것 같지 않기 때문이오.”

“다른 이유랄 것도 없지. 아, 백독문 놈들이 만만치 않은 놈들이라는 얘길 빠트린 것 같군.”

복면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왕일은 그가 지금 미소를 짓고 있다 여겼다.

복면이 살짝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권한이 있소?”

“권한이라… 어떤?”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오.”

-화 장로님의 전갈이다. 이곳을 지키라는.

전음을 받은 왕일이 잠시 움찔했지만,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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