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무엇을 말입니까?”
“내 몸!”
당연히 봤다.
솔직히 불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잘 보였다.
“그게…….”
머뭇거리는 왕일을 바라보던 화영영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인의 입장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보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지금에도.
“어떻더냐? 이런 누더기와 정을 통했다고 생각하니 기분 더럽더냐?”
“예?”
“지저분한 몸뚱이를 안은 것을 알았으니, 기분이 더럽기도 하겠지. 하지만, 네놈의 복수를 하려니 어쩔 수 없지? 그렇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년이 왜 이 지랄이야?’
왕일은 진짜 이유를 몰랐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왕일의 말을 들은 화영영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게 시치미를 떼야겠지. 네놈의 마지막 희망은 나일 테니까. 한철진이란 놈을 잡으려면 말이다.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거야.”
“저…….”
“됐다. 나가봐라. 대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필히 네놈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겠다.”
왕일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딱 잘라버린 그녀가 축객령을 내렸다.
뭐, 딱히 할 말도 없던 왕일이었기에 나가라고 하자 얼씨구나 하고 자리를 피했다.
‘미친년. 저년은 진짜 미친년이다.’
화영영을 통해 복수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쪽으로 생각하니 미친 것이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제정신으로 패진무관을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
잠영일호로부터 패진무관의 현 상황을 전해들은 왕일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현재 패진무관을 향해서 무작정 달려들 문파는 없을 듯했다.
‘근데, 누더기나 지저분하다는 게 무슨 뜻이지? 예전에 많이 놀아났다는 건가?’
달리 그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저년 신경 쓸 때가 아니지.’
화영영이 깨어나기 전에 아무리 생각해도 내공을 쓸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존재함에도 말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안위도 모른 채 운공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왕일이 화영영의 전각을 나서자 그의 눈에 보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별관을 둘러싼 담 위에 서 있는 잠영일호였다.
그가 왕일을 향해 손짓을 했다.
‘쳇!’
아직 그에게 자유시간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부르셨소?”
“화 장로님은 무사하시냐?”
“물론이오만?”
그때 일어난 충격음이 얼마나 컸는지 알지 못했기에, 왕일은 어째서 잠영일호가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
“…됐다. 그만 가봐라.”
뭔가를 더 물어보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잠영일호가 왕일을 보냈다.
자신에게 목숨까지 걸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일을 벌인 것이라면 억지로 알아내서 좋은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왕일이 나간 석실에 앉아 있던 화영영도 서둘러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분명 일이 틀어지기 전에 뭔가 반응이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녀석! 그토록 방정은 안 된다고 했거늘…….”
그러고 보니 그 사실에 대해서 화를 낸다는 것을 잊었다.
워낙 충격적인 일이었고, 또 무엇보다 자신의 몸을 봤다는 것에 대해서 수치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보다 몸을 더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은, 아직 여자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일단 몸부터 확인하자.’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천천히 깊은 무아지경으로 들어가는 화영영.
단전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어떤 기대감으로 가득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단전은 심한 눈보라가 춤을 추는 황량한 곳이었다.
‘눈보라?’
그녀의 몸을 찢어발기던 날카로운 얼음송곳들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것들과 어울려 춤추는 눈보라들은 그 양이 훨씬 증가해 있었다.
하지만 어디를 찾아봐도 불꽃은 없었다.
그 작은 몸을 희생하며 얼음송곳을 눈송이로 바꿔주던.
그러나 불꽃은 없었어도 얼음송곳보다 눈송이가 더 많았고, 그것을 확인한 화영영이 기쁨에 겨워 눈을 뜨고는 혹시나 하여 옷을 벗었다.
“……!”
흉터는 있었지만, 그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부서지고, 찢어지고, 갈라진 흉한 몰골의 몸이 아니라 그저 심한 상처를 입었다 생각할 정도의 흉터만이 존재했다.
눈물 한 방울이 화영영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결국 그녀는 해낸 것이다.
사부가 남긴 사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마지막 방법이 통한 것이다.
“가자!”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신형이 연무실에서 사라졌고, 물론 그곳은 왕일이 있는 방향이었다.
***
한편 잠영일호와 헤어진 왕일도 서둘러 별관에 있는 자신의 전각에 마련된 연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토납법을 하는 것도, 운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왕일은 지금 자신의 내부에 자리 잡은 어떤 것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싸운다는 것보다는 애타게 찾고 있었다.
‘나와! 나오란 말이다!’
그런다고 나왔을 거면 예전에 나왔을 것이다.
분명 무엇인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코 깊숙이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도, 손가락으로 아무리 후벼 파도 걸리는 것이 없는 것처럼, 있는 힘껏 숨을 내뿜어 그것을 내보내려고 해도 나중에는 숨을 뿜다 지쳐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왕일은 지쳐가고 있었다.
‘왜? 왜 안 나오느냔 말이다!’
그때의 느낌을 되살려 생각해보면 분명 그것은 있었고, 온몸 가득히 퍼져 있었다.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화영영의 내공에 반응해 움직인 것은 그의 신경 하나하나였다.
그렇기에 그 희열에 몸서리치지 않았던가.
퍽!
갑자기 왕일이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몸과 팔, 다리까지 주먹으로 두들겼다.
“어딨어! 어디 있냐고!”
아무리 자신을 두들기고 닦달해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너지듯 쓰러진 왕일이 자포자기 음성으로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어디… 어디 있냔 말이야…….”
약간의 습기가 느껴지는 그 음성에는 스스로에 대한 좌절과 절망 그리고 원망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자신의 것이되 자신이 쓸 수 없는 그것이 정말 증오스러웠다.
곳간에 음식을 가득 쌓아놓고도 열쇠를 찾지 못해 굶어 죽는 형국이었다.
차라리 음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더 나을법한 상황이었다.
“도대체 왜 보이지 않는 거야!”
그때, 화영영이 그런 왕일의 옆에 나타났다.
하지만, 왕일은 아직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책망하느라 바빴다.
“왜? 왜? 차라리 희망을 주지 말지. 왜 나에게…….”
화영영과 대련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봐주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그는 반탄기를 쓰기도 전에 혈맥이 얼어붙어 죽었을 것이다.
단전이 없기에 나중에는 석휘명에게 이길 수 없을 것이라던 철사명의 말이 떠올랐다.
석휘명과 대련을 수없이 했었기에 그것은 왕일이 피부로 느꼈던 것이었다.
점점 강해지는 석휘명을 보면서 얼마나 속으로 울었던가.
순간 그렇게 절망하는 왕일의 주위로 음기가 요동치면서 몰려들었다.
안개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왕일은 음기의 물결에 몸을 실었다.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어서 빨리 자신을 위로해주기를 갈망했다.
‘빨리… 어서…….’
그런 그때, 갑자기 밀려오던 음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가… 가지 마!”
발작적으로 눈을 뜨며 음기를 잡으려는 몸짓을 하는 왕일의 눈에 화영영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어쩌면…….’
화영영과 같이 하다보면 그것의 해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오셨습니까?”
“청승은 다 떨었냐?”
왕일은 말투로 보아 아마도 지금 온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벗어.”
‘빌어먹을!’
그날 총 여섯 번의 거대한 폭발음이 혈마교를 뒤흔들었지만, 이전처럼 비상종이 울리지는 않았다.
왕일은 어째서 음기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이 화영영과 연관이 있는지, 아니면 왕일 스스로 그것을 거부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음기가 이제는 왕일을 외면하는지.
모든 것은 의문으로 남은 채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
화영영과 왕일이 별관에 틀어박히고, 정확히 열흘의 시간이 지나갔고, 그 시간동안 화영영과 왕일이 있는 별관에 출입한 것은 천과 지가 유일했다.
그것도 오랜 시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약초와 음식을 전해주고는 바로 별관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별관 주위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 심심하면 한 번씩 악불군이 찾아와 기웃거렸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귀찮게 하는 것을 빼면, 천 등은 이곳 혈마교로 온 이후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가족들과 재회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의 사명을 안고 떠났던 많은 이들 중에서 살아 있는 이들도 가족과 상봉하는 즐거움을 누렸으나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삼백의 인원 중에서 천 등을 포함해 겨우 마흔두 명만이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는데, 그들과 같이 온 왕일과 같은 처지에 있던 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혈마교에 도착하는 그날, 그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혈투를 벌이며 사지에서 살아났다고 기뻐하던 그 표정 그대로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현재 혈마교에 거주하는 인원은 거의 삼천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정파의 눈을 피해 도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광서와 귀주가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급격한 인구의 유입으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가장 급한 것은 먹을 것이었다.
아무리 궁핍하게 사는 것이 몸에 익은 그들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먹을 것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역시 돈이었다.
주변에서 닥치는 대로 식량을 구입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었기에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돈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마교는 혈마교가 곧 백독문과 싸움을 할 것이고, 그 와중에 대부분이 죽을 것이라 여겼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정파는 싫어할지 몰라도 흥인현을 비롯한 인근 현에서는 혈마교를 반기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옴에 따라 엄청난 물류의 이동이 있었고, 그것은 곧 돈이었다.
궁벽한 곳에서 언제 그런 돈을 만져보겠는가?
혈마교에서 찔러준 돈도 있었지만, 물류가 소비되면서 거둬들이는 돈이 더 컸다.
이런 상황이 되자 관리들이 나서서 외지에서 물건을 사들이는 형국이었다.
만일 이것을 가지고 뭐라 했다가는 관과 틀어질 것이 분명하기에 정파에서도 뭐라 하지 못했다.
그렇게 혈마교는 흥인현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악불군의 전각에서 그의 수하인 독고평과 제자인 막달평이 지도를 놓고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독고평은 악불군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도를 무기로 삼는 중년인이었고, 막달평은 이제 삼십 대로 접어드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막달평은 그 생김새가 사부인 악불군과는 정 반대였는데, 온몸이 딱딱한 근육질로 덮여 있었고, 수염도 길게 자란 것이 아니라 마치 장비를 보는 것처럼 가시 같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놈들이 어디까지 왔다고?”
악불군의 물음에 독고평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운남의 경계인 선위현까지 진출했습니다.”
“몇이나 되더냐?”
“알아본 바로는 채 이백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백?”
악불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이곳의 사정은 어느 정도 외부에 유출된 상황이었다.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지는 못했겠지만, 들어오는 식료품이나 일상 비품을 계산하면 대충이나마 답이 나왔다.
물론 최소한의 물자를 가지고 생활했기에 그리 정확하게 산출하지 못하겠지만, 일단 이천은 넘는 것으로 정파에서도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겨우 이백의 인원으로 이곳을 친다고 오고 있다니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분이 더러운 것은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것밖에 안 왔다는 사실이었다.
“백독문은 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문파입니다.”
“그럼 몽땅 몰려와야 할 것 아니야? 이놈들이 나를 무시하나?”
“알지 않습니까? 그놈들에겐 수천, 수만은 될 수하들이 있다는 것을.”
백독문은 곤충을 부려 싸움을 하기로 유명했다.
“몇 번이나 보냈지?”
“총 네 번을 보냈습니다. 그 와중에 놈들을 다섯 정도 죽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흠… 사백을 보내서 다섯이라. 뭐, 나쁘지는 않군.”
현재 들어와 있는 인원들을 백 명씩 모두 네 번에 걸쳐 백독문을 습격하게 하였고, 그들은 모두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악불군은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거나 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