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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58화 (58/138)

58화

‘이러실 분이 아니시거늘 어찌?’

그의 눈이 왕일에게로 향했다.

왕일도 변했지만, 그의 영향인지 화영영도 변해 있었다.

그녀도 예전 같으면 이런 햇볕 따위에 미소를 짓는 여인이 아니었으니까.

“아, 내가 아직 말 안 했었나?”

능청스런 화영영의 말에 잠영일호가 내심 어이없어 하였다.

‘농담을?’

참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예.”

“혈마교.”

“예?”

못 들어서 다시 물은 것이 아니었다.

“혈마교라고.”

“그곳엔 무슨 일로?”

“어차피 교로 돌아가 봤자 나한테 남은 것은 달랑 건물 두 개 뿐이잖아.”

“그렇지만…….”

-이미 놈들의 이동이 시작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는 거야. 어차피 죽을 놈들 내가 좀 쓸 데가 있어서.

-그런 일이라면 다시 놈들을 데려오면 그만입니다. 제가 교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아니, 교에 피해 주기 싫어.

-설마, 직접 일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잠영일호의 시선이 왕일에게로 향했다.

-뭐, 심심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냥 그렇게 알아.

-교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안 하면 나 혼자 한다고 협박이라도 하지, 뭐.

사실 협박도 필요 없었다.

그녀가 한다고 하면 사마유운은 허락할 것이었다.

아니, 그녀의 안전을 위해 고수들을 보내줄 수도 있었다.

다만 그녀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일단 교에 보고는 하겠습니다.

-그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는 김에 하만성을 선물로 줄 테니 기다리라고 하고.

-예.

말을 마친 잠영일호가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그로서는 정말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황당한 사건을 보고해야 했고, 은밀히 백독문에 정보를 흘리려는 것도 막아야 했다.

‘벌써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겠지?’

그들의 이동이 은밀하게 시작된 것이 보름 전이었다.

그 소식을 돋고 화영영이 계획한 것이리라.

‘그때, 모종의 거래가 있었구나.’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었다.

‘역시 목표는 한철진이겠지? 그나저나 하만성까지 끌어들이려고 하다니, 화 장로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인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좋은 쪽이라면 좋겠지만,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것은 거의가 좋지 않은 경우였다.

왕일이 변한 시점이 바로 그때였다.

왕일의 살아온 날을 들은 그때. 석휘명은 왕일이 아무것도 모르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얘기로 알 수 있는 일도 있었다.

바로 구음신마와 한철진이 확실하게 연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석휘명은 한철진이 적요신을 죽이는 과정을 못 봤다.

물론 그 와중에 구음신마가 도와주었다는 것도.

왕일은 그 복면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이미 석휘명의 얘기를 들은 남찬우는 그들이 구음신마이거나 아니면 그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것은 화영영과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얘기를 듣고 왕일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복수!

그리고 왕일이 무림에 대한 지식이 희박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자신을 모르랴.

무림에 적을 둔 이들 치고서 마교의 옥골음희 화영영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왕일은 심지어는 정한검 남찬우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그때 봤었던 기억과 마교 소속이라는 것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주가 누군지 물어봤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그래서 마교가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녀가 마교의 장로라는 것을 얘기한 화영영은 왕일의 복수를 도와주는 대신에 그녀의 일에 적극 협조할 것을 제의했다.

결과는 당연한 찬성.

그리고 왕일이 부탁한 다른 것도 있었는데, 바로 석휘명의 안전이었다.

그 말을 전해야 하는 잠영일호는 속으로 혀를 찼는데, 왜냐하면 그가 알기로 석휘명은 왕일에 대해서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무엇을 조사하는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도 비룡장에 대해서만 정보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왕일의 행동이 변했다.

이년, 저년 하던 말투도 싹 바뀌었고, 고통이 수반되는 벼락 맞기와 화영영의 내공 거르기도 솔선수범하여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간이 남을 때마다 두 사람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그냥 대련이 아니라 마치 생사투를 벌이는 것 같은 처절한 대련이었는데, 물론 그 처절함을 몸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왕일이었다.

그의 실력으로는 화영영의 움직임이나 공격을 막기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버텨서 오늘날까지 왔다.

화영영의 뒤에 서 있는 왕일은 마치 그녀의 몸종 같았다.

***

‘나 혼자 패진무관에 복수하기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휘명을 믿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이년만 잘 구슬린다면 훨씬 빠르게 복수의 칼날을 빼들 수 있으리라.’

이것이 왕일의 본심이었다.

석휘명은 그가 생각하기에 뭔가 다른 일에 빠져 있는 듯 했는데, 마치 패진무관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아버지인 당정의 복수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개방에 가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일단 왕일 자신이 적요신에게 약을 쓴 것이 사실이고, 아무리 한철진이 시켰다고 말을 해도 누가 믿어줄 것인가?

그런 것 때문에 처음부터 포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왕일은 이런 결심이 또 다른 비극적인 만남을 주선하리란 것을 알지 못했다.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

“요즘 장을 기웃거리는 놈들이 있습니다.”

허진영의 말에 허장천이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삭빠르고 신중한 놈들이다. 꼬리를 잡을 만하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더구나.”

‘역시… 나보다 먼저 알고 있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잡을 수 있는 놈들이 아니라면 무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도가 되겠지.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하도록 하여라. 그러다 기회가 된다면 놈들을 잡을 수도 있음이니.”

“알겠습니다.”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남궁가 놈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현재 비룡장에서는 소림과 무당을 비롯해서 신흥사패에 대항하는 곳에 자금을 퍼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신흥사패의 눈에 비룡장이 고와 보일 리 만무했다.

그로 인해서 비룡장과 연계된 곳이라 파악된 곳 소상공들 중에서 신흥사패의 영향력이 통하는 곳은 알게 모르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었다.

‘흥! 네놈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알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허장천은 특별히 신흥사패가 염탐한다고 하여도 걱정되는 것은 없었다.

그들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무사들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라고 해봤자 이십여 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돈을 주고 고용한 무사들이었다.

“그만 물러가 보도록 하여라.”

어쩐지 허장천이 허진영을 대하는 태도가 좀 누그러진 듯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딸인 허혜령이 태기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령아에게 각별히 조심하라고 하고.”

“예.”

방을 나서는 허진영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그와 허혜령은 조금씩 대화의 폭을 넓혀가다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다.

남녀 사이란 알 수 없듯이, 허진영의 뜻에 따라 강제로 맺어진 두 사람이 어느새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게 되자 자연 금슬도 좋아졌고, 그토록 허장천이 바라던 아이까지 들어섰다.

하지만, 허혜령이나 허진영은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자신들의 자식이 아닌 허장천의 손자가 되어 자랄 것을 알고 있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허진영의 나가는 모습을 본 허장천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놈들도 세간의 눈이 있으니 무력으로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이대로 손발이 잘려나가는 것을 구경만 하다가는 몸통마저 위험해지리라.’

정파라는 굴레를 짊어진 신흥사패가 무력으로 비룡장을 접수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볼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은밀히 비룡장의 하부조직이라 할 수 있는 중소문파들을 압박하는 중이었다.

정 피해가 심한 곳은 비룡장에서 일체의 이주비용과 손해배상을 해주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조금만 더 이어진다면 나머지 안전한 이들도 동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비룡장만 남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관의 힘을 빌리는 것이 좋겠군.’

아직까지 소림 등이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을 끌어낼 준비를 서서히 갖추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하는 허장천이었다.

허장천으로서는 참으로 기막힌 기회였다.

사실 남궁세가와 연계된 것으로 보이는 세 문파, 즉 신흥사패를 상대함에 있어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라 여겼었는데, 그들이 소림 등과 척을 지면서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원래 계획은 자금을 앞세워 그들의 자금줄을 끊고 혈천강시로 그들의 기반을 차례로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승리한다고 하여도 여타 다른 정파와 척을 지게 됨으로, 그의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대할 것이고 비룡장의 존폐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신흥사패가 소림과 대립하는 관계가 된 것이니, 이는 삼십 년 전 마교가 자중지란을 겪으며 약해진 것도 한몫했다.

적이 없으니 내부에서 적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허장천은 새로운 욕심에 눈을 떴다.

아니, 오룡회를 장악하면서 세웠던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나 일호, 즉 석휘명이 살아남을 것을 저어해 그들을 키웠던 장소를 폐쇄한 뒤 다른 곳으로 모두 이동시킨 후였다.

‘언제가 좋을까?’

신흥사패와 소림 등을 이간질시키는 것은 시기가 문제였다.

조금 더 갈등이 심화되고 불신이 커지면 써먹을 방법이었다.

‘어떻게든 충돌이 일어날 것은 당연지사다. 그 와중에 누구 하나 죽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고.’

그런 상황까지 치달으면 완성되기만을 기다리는 혈천강시를 앞세워 소림 등의 영향력 하에 있는 문파들을 칠 생각이었다.

분명 소림 등은 신흥사패를 의심하여 추궁할 것이나, 그들은 당연하게도 부인할 것이었다.

하지만 부인한다고 그대로 믿어줄 소림이나 다른 문파가 아니니, 그때 가서 두 세력 사이의 골을 깊어지게만 만들 수 있다면 정파들끼리 사생결단을 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다만 걸리는 것은 마교인데, 그놈들의 움직임 여하에 따라서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어.’

만일 마교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신흥사패는 마교의 짓으로 몰아갈 것이고, 자칫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여 정사대전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마교를 상대함에 있어서는 일치단결하는 정파였으니까.

‘시기! 시기가 문제다!’

이미 판은 짜여 있지만, 천운이 도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흥! 만일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고 하여도 문제될 것은 없지만…….’

이미 다른 방안을 모색해 놓은 허장천이었다.

그리고 그 방안을 실천하게 된다면 그때는 진정한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었다.

‘이렇든, 저렇든 최후에 웃는 자는 바로 내가 될 것이다.’

자신에 찬 허장천이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세상을 잡기라도 하듯이.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허락할 수 없다!”

남찬우의 말을 들은 사마유운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화 장로를 아시지 않습니까?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으음…….”

사마유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하려는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어찌 허락할 수 있단 말인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나?”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패진무관은 현재 구음신마과 연관되어 있고, 또한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화영영이 너무 쉽게 보고 덤비는 것일 수 있었다.

자칫 신흥사패의 합공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

“뭔데?”

“고가형제 놈들을 끌어내려고 그런 무리수를 두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왕일이라는 놈의 일은 제쳐두고서라도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에게 하가 놈을 잡아다준다는 연락도 같이 주었습니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것이 아니라면, 이번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잘 되어가고 있다며?”

“화 장로의 상태에 대해서 본인 말고 누가 가장 잘 알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누가 그런 것을 바란다고!”

사마유운이 탁자를 내리치면서 말하자 남찬우의 얼굴이 굳었다.

사마유운은 겉으로는 활달하고, 냉정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불같은 성질이 감추어져 있었다.

“교주님, 고정하십시오. 그리고 귀주와 산서는 그 거리만 해도 상당히 멉니다. 당장 어떤 도발을 하거나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한 혈마교를 나서는 순간 정파의 감시망에 걸려들 것인데, 쉽게 나서겠습니까?”

“으음… 그 버러지들은?”

“거의 이동이 끝나고 있습니다.”

“정파는?”

“아직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알게 되겠지?”

“예. 그렇다고 해도 당장 쳐들어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신 우리가 하려던 일을 할 수는 있겠지.”

백독문에 혈마교가 마교의 전초기지이고 운남을 도모하기 위한 발판 역할을 할 것이란 소문을 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백독문은 분노할 것이고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었다.

이참에 배신자들의 후손 모두를 제거하려던 기존의 계획은 성공할지 몰라도 화영영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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