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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53화 (53/138)

53화

“지금 그의 몰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약해진 몸에 혹시라도 무리하게 된다면 자칫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잠영일호의 말에 그녀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좀 성급했나?”

“돼지도 잡아먹기 전에는 살찌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놈을 좀 풀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잠영일호의 말을 들은 화영영은 내심 공감했다.

너무 흥분해서 왕일의 몸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빼빼 말라가는 몸을 보면서도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지?”

“최소한 예전 몸 상태로 만들려면 이십 일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십 일?”

과거 같았으면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백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대한 기간을 줄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잠영일호가 직접 왕일을 관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잠영일호가 나간 후 화영영은 탁자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가장 자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잠을 자는 일이었다.

누워서 눈을 감으면 언제나 잠은 그녀의 불안을 감싸주었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공포 또한 덮어주었다.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도피처인 잠.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잠이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거의 한 시진을 누워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틀었다.

얼마 만에 해보는 운공인지 그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소수마공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붕괴도 빨리 찾아올 것이란 것을 알기에 운공마저 멀리했었다.

하지만 왕일을 만난 지금 무언가 변화가 있기를 바라면서 운공을 하는 중이었다.

‘제발…….’

왕일을 만날 때마다 정신적인 충만감은 주었지만, 눈으로 보이는 육체적인 변화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조바심을 낸 것인지도 몰랐다.

천천히 소주천을 한 화영영이 대주천을 하면서 의식을 깊이 침잠시켰다.

‘추워.’

소수마공을 익힌 후로는 외부에서 추위를 느낀 적이 없는 그녀였지만, 내부에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바로 적막함과 추위, 그리고 고독이었다.

점점 더 깊이 들어가자 마치 가시처럼 얼음 기둥이 삐죽이 솟아 있는 거대한 원형이 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화영영의 단전이었다.

멈칫한 그녀가 그 속으로 들어가길 망설였다.

단전 속은 팔대지옥 가운데, 팔한지옥이 있다면 그곳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자신이 만든 단전에 그런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단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단전 주위에서 망설이던 그녀가 결심했는지 천천히 단전 속으로 정신을 이동시켰다.

‘여전하구나.’

차갑고 황량한 단전은, 예나 지금이나 송곳 같은 날카로운 조각들이 광폭하게 휘몰아치는 곳이었다.

그것들이 그녀의 정신을 지날 때면 갈가리 찢기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

‘역시 무리였나?’

자그마한 변화라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실망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지만, 아직 포기는 일렀다.

‘이제 시작이다. 뭘 기대했던 거지? 설마 완치라도 되기를 원했단 말인가?’

남찬우가 알고 있는 것을 화영영이 왜 모르겠는가?

자신의 몸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화영영도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지키며 아름답게 죽어가길 희망했다.

때문에 만일 왕일을 만나지 못했다면 몇 년 안에 그녀는 자살을 했을 것이다.

실망감과 함께 앞으로의 기대를 가지고 단전을 빠져나오려는 그때, 화영영은 멀리에서 희미한 빛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전 내부를 휘돌고 있는 얼음송곳을 잘못 본 것인가 했는데, 가만히 주시하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뭐지?’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서 화영영이 단전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있었다.

허공에 떠서 몰아치는 강풍과 끊임없이 위협하는 얼음송곳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피어 있는 작은 불꽃송이.

어른 새끼손톱만 한 작은 불꽃이었지만, 그것을 발견한 화영영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 따스함이 온 영혼을 채울 것 같이 느껴졌다.

그 불꽃은 휘몰아치는 삭풍과 얼음송곳의 위협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한줄기 빛이 되어 그녀의 단전을 밝히고 있었다.

그때 단전을 배회하던 송곳 하나가 불꽃을 향해 날아왔다.

‘안 돼!’

황급히 그 앞을 가로막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통과한 송곳이 불꽃송이와 충돌했다.

캉!

이런 소리가 들릴 리 없건만, 그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응?’

불꽃과 부딪친 송곳은 잘게 부서지며 사방으로 퍼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떨어지는 눈꽃송이 같았다.

그 결과 불꽃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이지만, 작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꽃은 제 몸을 사르며 송곳을 변화시키고 있었지만, 송곳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것들의 채 만분의 일도 변화시키기 전에 불꽃은 사라지리라.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송곳인 만큼 언제 불꽃과 부딪칠지 알 수도 없었다.

운공을 마치고 눈을 뜬 화영영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어떤 가능성을 본 그녀였기에 이전보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송곳이 눈꽃으로 화하는 광경은 그녀에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불꽃송이에 다가갔을 때, 느꼈던 따뜻함이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화영영이 왕일이 있는 전각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화영영이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왕일도 몸을 추스르며 음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토납법은 낮에, 음기를 이용한 방법은 밤에 행하며 열심히 처먹어댄 결과, 이제는 좀 사람다워졌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쉬지 않아서 기름기 쫙 빠진 몸에 근육이 자리 잡고 있는 중이었다.

여명이 터오자 음기가 물러가기 시작했다.

“후우~”

깊은 숨을 내쉰 왕일이 동경 앞에 섰다.

“쳇! 나름 좋은 몸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모두 비곗덩어리였다니.”

최적의 몸이라 생각했던 것이 틀린 모양이었다.

덩치는 전에 비해 거의 삼분의 이로 줄었는데 지금이 더 보기 좋았다.

육 척을 조금 넘을 것 같은 키에 군살 없이 쫙 빠진 몸매는 이전의 육중해 보이는 몸과 확연히 달랐다.

“이제야 좀 살만하구나.”

단 삼 일 만에 멀쩡해진 왕일을 보고 잠영일호도 놀랐었다.

모든 것은 화영영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년이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지?’

화영영이 단전에 변화가 찾아왔다면 왕일은 몸, 정확히 말하면 혈도에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꽉 막혔거나 찢어지고 엉뚱한 곳으로 뚫렸다고 생각한 혈도들이 어느새 회복 기미가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막힌 것이 완전히 뚫린 것은 아니었지만, 음기를 통해 혈도를 뚫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스스로 조사해본 결과 가닥가닥 끊어진 혈도들이 제 스스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중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 통증들이 모두 혈도가 자극을 받아서 생긴 것이었나?’

하지만 여전히 들어온 기나 음기는 내공으로 화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아직도 그것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없거나, 아니면 왕일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마 어르신의 말씀대로라면 언젠간 알게 되겠지.’

그는 마호성의 가르침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변화는 좋은 거야.’

왕일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토납법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설 때,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빌어먹을!”

기감으로 확인하자 화영영이었고, 몸이 좋아진 것을 귀신같이 알고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허나 이미 화영영으로 인해서 몸이 달라진다고 여긴 왕일은 그다지 싫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은 고통도 혈도가 변화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서 좋을 것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조치가 취해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비수는 등 뒤에서 가는 법이었다.

“이 요녀야! 또 내 정기를 빨아 먹으러 왔냐? 차라리 목을 물어뜯어서 피를 빨아먹지 그러냐!”

말을 뱉어놓고 왕일은 찔끔했는데, 진짜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화영영의 얼굴이 너무 굳어있었기에 자책했다.

‘요녀는 좀 심했던 것 같아.’

비수의 날도 세우기 전에 비명횡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했다.

“닥쳐!”

그런대로 괜찮은 반응이었다.

일단 싸대기 먼저 맞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쯤에서 죽는다고 한번 난리를 쳐야겠지?’

이전과 같은 반응을 보여야 하니 죽는다고는 해야겠지만, 처음에 너무 강하게 나갔으니 좀 덜 지랄하기로 했다.

“차라리 죽여라! 죽여! 아니, 내가 죽어준다. 죽어줘!”

주먹으로 머리를 내리치는 시늉을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화영영이 마혈을 찍을 것이고, 데리고 들어가 그 요상한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힐 것이었다.

쾅!

“크윽!”

자신의 주먹에 머리를 강타당한 왕일이 바로 쓰러졌다.

진짜 죽을 마음은 없었기에 머리가 터지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골이 흔들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진짜 뼛속까지 저릴 정도로 아팠다.

‘미친년! 왜 하필 지금 멈칫거린 거야!’

처음에는 어디 네가 진짜 죽나 하고 두고 본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아니었다.

‘멈칫거려?’

아직도 화영영은 그저 멍하니 왕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왕일을 말릴 수도 있었지만 화영영이 당황한 듯한 몸짓을 하는 바람에 늦어졌고, 왕일은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내리치는 결과가 벌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일단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 화영영으로서는 왕일이 죽는다는 말에 이전과 같은 반응을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진짜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그녀를 당황하게 하였고, 반응이 늦어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진짜 왕일이 죽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요것 봐라?’

그런 그녀를 보면서 왕일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년, 이제까지와 다르다!’

왕일은 기감을 통해 화영영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고, 이것은 실로 굉장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재정립시킬 수 있는.

왕일의 계획은 아직 멀고도 먼 길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화영영의 머릿속에는 갖가지 고문 방법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놈이 익힌 무공이 뭔지 알아내야 해. 그래야 이놈이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을 테니까.’

어찌하면 근골을 상하게 하지 않고, 고통만 가중시킬 수 있는지 방법을 찾던 화영영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꼭 그것을 자신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방법에 정통한 놈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일단 왕일의 마혈을 찍은 화영영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그녀의 말에 허공이 갈라지며 잠영일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이놈이 익힌 모든 무공을 알아내서 가져와. 물론 근골은 상하게 하지 말고.”

“예.”

화영영의 말을 들은 왕일은 당황했다.

막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시점에서 그 길을 뚫어주던 년이 갑자기 변심을 한 꼴이었다.

‘썅!’

잠영일호의 옆구리에 매달려가면서 왕일은 화영영을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

잠영일호가 왕일을 데리고 간 곳은 예로부터 고문에 자주 이용되는 지하실이었고, 그곳엔 능히 짐작이 가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횃불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들고, 천정에 달려 있는 쇠사슬과 탁자에 놓여 있는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은 검붉은 도구들.

웅혼장은 분명 인근에 알려지기를 나름 정기를 품고 있는 무관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마교의 비밀분타라는 비밀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음침한 곳도 필요한 것이다.

“어떻게 한다?”

피를 머금었는지 검붉은 색을 띠고 있는 탁자에 왕일을 눕힌 잠영일호가 그 옆에서 도구들을 만지작거렸다.

“흠, 근골을 상하게 하면 안 되고, 몸에도 무리가 가면 안 되고, 정신을 망가뜨려도 안 되고… 난감하군.”

말은 그래도 말투는 뭔가 즐거운 것을 기다리는 악동같이 느껴졌다.

“이봐, 그냥 말해줄 수는 없겠나?”

잠영일호로서는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다.

지금 왕일의 처지로는 가진 밑천 다 떠들고 나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기대도 안 했다.

“오, 말을 하고 싶어도 아혈을 점했으니 말할 수 없겠군. 자, 이제 아혈을 풀었으니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 뒤의 말은 생략해도 좋았다.

장마에 터진 둑 마냥 왕일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에, 그러니까 일단 패진무관에서 팔방풍우와 간단한 토납법을 배웠고, 연환비검, 낙화검, 천왕도는 그저 훑어봤고, 마지막으로 불사지존이 남겼다는 비급을 본 것이 전부요.”

왕일의 말을 들은 잠영일호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냥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은 없나 보지?”

왕일은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그러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당황했다.

“어째서? 어째서 믿지 않는 것이오?”

“그럼, 내가 그 말을 왜 믿어야 하는데?”

“…….”

되묻는 잠영일호를 보면서 그저 멀뚱히 눈을 뜰 수밖에 없는 왕일이었다.

사실 그가 잠영일호의 입장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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