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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52화 (52/138)

52화

귀주성 동쪽에 있는 태강현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곳이었다.

인구가 이백여 명이 안 되는 이곳의 가장 큰 문파라 하면 웅혼장이었고, 마을 유일의 무관이기도 하였다.

그곳의 장주는 섬전검 최민이었는데,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벌써 십여 년이 되었다.

최민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마침 그가 태강현을 지날 때, 마을 객점에서 시비가 벌어졌었다.

당시 그에게 시비 건 인물들은 태강현에서 보호비를 받고 있던 귀랑파라는 조직이었는데, 십여 명으로 이뤄진 뒷골목 불한당들이었다.

아무튼 그때, 그들의 두목인 여삼춘을 최민이 죽였고 달려드는 수하들도 모조리 때려눕혔다.

그리고 그들의 건물을 차지하고 웅혼장이라 명한 것이었다.

그 후 사람들은 최민이 귀랑파의 뒤를 이어 태강현에서 행패를 부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귀랑파를 해산한 다음 무관을 연 것이다.

그렇다 해도 처음부터 최민의 무관을 마을사람들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싸움에 한 번, 두 번 끼어들다가 결정적으로 마을사람들의 신임을 얻은 것은 잔살이도란 사파인이 행패를 부릴 때였다.

그들이 마을사람과 시비가 붙었고, 그 사람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피를 보고 흉성이 폭발했는지, 아니면 작은 현에 자신들을 막을 이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발광하는 그들을 최민이 사투 끝에 죽일 수 있었다.

그 뒤부터 마을사람들이 최민을 같은 식구로 받아들여 지금에 이른 상황이었다.

그런 최민의 웅혼장에 오랜만에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최민은 그들이 요즘 일어나는 귀주의 흉사를 피해 친척인 자신에게 피신 온 것이라 하였고, 마을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믿었다.

그 가족들은 웅혼장의 별관에 묵었는데, 찾아 온 손님들 가운데 미친 청년 하나가 발작을 일으켰기에 안쓰러운 마음마저 가지고 있었다.

“죽는다! 죽을 거야!”

오늘도 어김없이 덩치만 커다란 미친 청년이 발광하고 있었다.

목청이 어찌나 큰지 큰 장원인 웅혼장의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질 정도였다.

그 소리를 들은 하인들은 혀를 찼고, 무공을 배우고 있던 소년들은 그러려니 했다.

“가까이 오면 죽어버린다!”

목에 칼을 댄 왕일이 앞에 서있는 옥골음희 화영영에게 소리를 질렀다.

“진짜 죽을래?”

“건들지 마! 이번엔 진짜, 진짜 죽는다!”

“흥!”

콧바람에 무슨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화영영이 콧방귀를 뀌자마자 소리소리 지르던 왕일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손에서 거대한 도를 뺏어든 화영영이이 그것을 던져버렸다.

쿵!

도가 떨어진 자리가 움푹 파였다.

“진짜 죽여줄까? 응? 죽여줘?”

화영영의 스산한 목소리를 들은 왕일의 붉은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빌어먹을!’

왕일이 이러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화영영의 무자비한 손길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오히려 때려달라며 사정해서 맞은 적도 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여인의 손에 맞는다고 창피하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무서웠다.

매일 계속되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단 느낌은 왕일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상한 것은 이렇게까지 정신이 망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속삭임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왕일의 마음이 약해질 때를 노려 달콤한 말로 위로해주던 속삭임은 마치 무언가에 놀라 도망친 두더지처럼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죽고 싶진 않지?”

혈안독마라 불리며 과묵하고 잔인하며 냉정하다고 평가되었던 왕일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죽음의 공포에서 신음하는 초라한 청년뿐이었다.

“얌전히 굴어.”

왕일을 앉힌 화영영이 그의 등에 두 손을 포개더니 서서히 내공을 일으켰다.

“끄으으으윽!”

아혈을 찍혔음에도 폐부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오는 신음은 막지 못했다.

차가운 것을 넘어 가히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화영영의 내공이 왕일의 온몸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혈도가 완전하지 못했기에 그녀의 내공이 갈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왕일은 차라리 죽음을 원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화영영의 내공이 음기임에도 어째서 왕일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일전에는 구음신마의 음기를 이용해 몸을 치유하지 않았던가?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왕일은 화영영이 넣어주는 내공을 흡수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이용해 몸을 치료라도 해야 했다.

이처럼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엄살이 심하네.”

처음 만났을 때는 짧고 강하게 공격적으로 왕일의 내부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라지만, 지금은 천천히 내공을 밀어 넣어주고 있는 형국이었다.

왕일의 몸 상태로만 본다면 이렇게 들어오는 음기는 흡수해야 마땅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왕일이 신음을 지르면 지를수록 화영영의 얼굴은 발그레해졌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까지 맺혔다.

‘좋아!’

이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화영영은 근 이십여 년 간 땀을 흘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화영영은 자신의 변화에 환호하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일각여의 시간이 흐른 후 화영영이 손을 떼자 왕일이 쓰러졌는데, 그런 왕일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고 서리가 내린 듯 옅게 하얀 막이 씌워져 있었다.

한참을 육지에 올라온 물고기가 퍼덕이듯 퍼덕대던 왕일의 몸이 잠잠해지면서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럼에도 깨어나지 못하고 축 쳐져 있는 왕일을 바라보던 화영영이 방을 빠져나가자 잠영일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와 왕일을 안고서 침상에 뉘였다.

그가 왕일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

왕일의 방을 나온 화영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미리 준비해 놓은 욕조로 향했다.

천천히 그녀의 옷이 흘러내리고 드러난 나신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찢어져 도저히 사람의 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돌로 사람을 조각하여 망치로 두들겨 패면 지금 그녀의 몸 상태와 같으리라.

깊게 패인 곳은 어른 새끼손톱이 들어갈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직 부서진 곳은 없고, 찢어진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조각조각 떨어지는 날, 그녀의 음기가 폭주하여 닥치는 대로 남자의 양기를 빨아들이려 할 것이다.

그런 천형을 알기에 화영영은 제자를 구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현음지체로 채 스물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여도 인간으로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코 자신의 사부가 걸었던 길을 다른 여아로 하여금 걷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알몸을 훔쳐 본 죄로 십여 년을 고문당한 금강도 양세문이 본 것은 그녀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여인으로서 몸을 보인 것도 부끄러운데, 가뜩이나 치부라 생각하는 것을 보였으니 그녀의 분노가 쉬이 가라앉지 않은 것이었다.

천천히 욕조에 들어간 화영영이 미지근한 물을 몸에 끼얹었다.

“하아~”

왕일의 내부에 내공을 들이붓고 한 바퀴 돌리면, 마치 채에 거른 것처럼 마기가 사라지고 청량감만이 남았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계속해서 그 효능은 떨어지고 왕일이 받는 고통만 커지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전에 없던 서리까지 끼지 않았던가.

“역시, 벼락을 맞아야 하나?”

처음 왕일을 만났을 때,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그가 벼락을 맞고 나서 그것이 변했었다.

지금은 그때 맞은 벼락의 효능이 사라진 것 같았다.

“놈들이 잠잠해졌으니, 잠시 나갔다 오는 것도 괜찮겠지.”

현재 혈마교와 무림맹 간의 전투는 소강상태였다.

아니, 소강상태라기보다는 무림맹이 그 전진을 멈추는 바람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 혈마교라 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맟아야 하려나?”

내일쯤 벼락을 맞으러 나가기로 결심한 화영영이었는데,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벼락임에도 맞출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쏴아아아아아아~

밖에서는 왕일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굵은 장대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

“으음…….”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뜬 왕일은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 입술을 악물었다.

이놈의 고통은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고통이었다.

예전 황만복에게 치료를 받을 때도 아팠지만, 지금의 고통은 그때의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

마치 신경을 한 가닥 한 가닥 분리하여 쥐어뜯는 것 같은 통증이었고, 뼈 마디마디가 분리된 듯해 도저히 힘을 줄 수도 없었다.

몸부림을 치고 싶어도 칠 수 없는 상태였다.

“헉, 헉, 빌어먹을…….”

반 시진가량 그 고통을 당하고 나자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사이 얼었던 몸은 다 녹았고,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그였지만, 도저히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녹초가 된 왕일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휴식이었으니까.

“염병!”

지금까지 계속 똑같은 날의 반복이었다.

화영영이 다녀가고 나면 고통에 시달리다 밥을 먹고 잤다.

자고나면 다시 왕일을 기다리는 것은 화영영이었다.

“젠장!”

자리에서 일어난 왕일이 방에 걸려 있는 거대한 동경을 바라보았는데, 건장하던 몸이 살이 쪽 빠져서 마치 기다란 허수아비 같았다.

광대뼈는 튀어나왔고 눈은 쏙 들어갔으며, 팔다리는 더 이상 가늘어지면 뼈에 거죽만 붙어 있는 형국이 될 것이었다.

산 채로 잡아먹히는 기분이 이런 것이리라.

죽어버린다고 협박하긴 했지만, 진짜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처음에는 화영영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 모험을 한 것인데, 두세 번 더 써먹자 이제는 자신이 죽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콧방귀만 뀌는 그녀였다.

거기다 하룻밤 자고 나면 상처가 낫는다는 것을 알고는 무지하게 팼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 몸이 축나는 것을 느꼈는지 패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고맙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죽여 버린다!”

다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화영영이 공격할 때, 반탄기를 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였다.

반탄기라는 것은 상대의 공격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그 순간에 맞추어 몸에 들어온 내공을 돌려야 가능한 것이었다.

헌데, 언제 공격당하는지도 모르고 땅바닥에서 구르고 있으니 무소용이었다.

그녀에게는 왕일의 놀라운 동체시력도, 뛰어난 기감도 소용없었다.

“그년뿐이 아니지.”

화영영까지 갈 것도 없었다.

잠영일호만 해도 왕일에게는 하늘과 다름없었고, 거기다 화영영은 자신의 시야가 미치는 범위 밖에 사는 존재였다.

그렇게 복수를 다짐하는 왕일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현재 감정의 파도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토록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하던 그가.

“쳇!”

화영영에 대해 복수를 맹세하는 그때, 여느 때처럼 문 앞에서 식욕을 동하는 냄새가 퍼졌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천과 현이 음식을 가져와 식탁에 내려놓았는데, 대부분의 것들이 남자의 양기를 채워주는 음식들이었다.

그것을 본 왕일의 얼굴이 구겨졌다.

물론 그것이 맛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조리했는지는 몰라도 약초 비슷한 것들이건만 감칠맛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했다.

이대로 가다간 화영영이 죽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자칫 비명횡사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 말 없이 음식들을 빠르게 비워나가던 왕일이 갑자기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자에 강하게 내려놨다.

쾅!

그 서슬에 국물이 튀고, 음식이 든 그릇이 넘어졌지만 천이나 현 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어째서 한마디도 없지?”

“예?”

“사람이 죽을 걸 살려줬으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냐?”

그제야 왕일의 말뜻을 알아챘는지 천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그가 눈을 빛낸 것은 왕일의 뜻을 알아챈 것보다도 왕일의 행동이 많이 변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짧은 시간 겪어봤지만, 왕일은 이런 것에 이토록 격렬한 감정을 내비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넙죽 인사하는 천이 얄밉기도 했지만,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왜 절 안 하냐고 발광하니, 바로 납작 엎드려서 절하는데 그가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흥!”

코웃음을 친 왕일이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웃긴 것은 엎질러진 음식까지 다시 그릇에 담아 먹었다는 것이었다.

‘살아야지, 살아야 그년에게 복수도 할 것 아냐?’

주섬주섬 떨어진 조각까지 몽땅 주워 먹는 왕일을 보면서 천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그 음식들을 조리한 것은 천이었다.

그들이 살던 곳은 음식재료가 풍부한 곳이 아니었다.

배신자의 가족들에게 풍부하게 음식을 주겠는가?

그가 살던 곳에서는 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쥐라도 발견하는 날에는 아이들과 쥐 간의 추격전이 벌어질 만큼 음식이 귀한 곳에서 자란 천은 나무뿌리와 풀만으로도 사람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무리 약초라고는 하지만 향신료가 풍부한 이곳에서 가히 천상의 맛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명아…….’

왕일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들인 명이 생각난 것은 어쩌면 당연하리라.

천 등도 이곳에 와서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일과 월은 처음 보는 음식들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정신없이 먹기 바빴었다.

그것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좀 나이가 들었다는 현이나 황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절제할 수 있었는데, 다른 것이 아니라 집에 두고 온 자식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음식을 먹다가도 가끔 목에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저 맑은 국물인데도 불구하고.

***

“저어, 화 장로님.”

“왜?”

“설마 지금 바로 떠나시려는 것입니까?”

옷을 챙겨 입고 나서는 화영영을 바라보며 잠영일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럴 생각인데?”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것을 좀 늦추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뭐?”

잠영일호를 바라보는 화영영의 눈에 살기까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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