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예강이라, 그리하면 곧 소호를 노릴 수도 있겠구나.”
소호는 합비의 아래쪽에 위치한 광광명소로 이름 높은 거대한 호수였고, 그만큼 이권이 풍부한 곳이었다.
현재 그곳은 비룡장의 관할 하에 많은 상인들과 중소조직이 장악하고 있었다.
“섣불리 소호까지 손을 뻗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강만 해도 그들이 먹으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물론 지금처럼 한다면 그렇겠지.”
허장천은 현재 남궁세가를 비롯한 신흥사패의 움직임에 뭔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탈자는 없느냐?”
“충돌이 심해진 곳은 넉넉한 이주비와 함께 다른 곳을 마련해주고 있기에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비룡장은 힘으로 세를 불리는 것을 멈추고 돈으로 소상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룡회는 중원 각지에 자리했고, 그들이 보내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비룡장은 많은 이득을 얻었다.
이득을 얻은 만큼 돌려주기도 하였고, 배신하는 곳에는 그에 합당하는 벌을 주기도 하였다.
현재 무림에서 최고의 부자를 손꼽으라면 단연 비룡장이었다.
“좋아. 그럼 돌아가 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허진영이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허장천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령아가 요즘 외롭다더구나.”
그 말을 들은 허진영이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좀 더 신경을 쓰도록 하여라.”
“네.”
허진영이 나간 후 허장천이 비밀 금고를 열고 그곳에서 두루마리뭉치를 꺼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만족할 줄을 모르는구나.”
허장천이 바라보는 종이에는 소림 등에 지출된 돈이 적혀 있었다.
소림을 위시해서 지금 신흥사패에 대항하려는 곳은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었는데, 신흥사패가 약진하며 돈 줄이 되어주던 곳이 신흥사패로 줄을 바꿔 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소림 등이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비룡장은 남궁세가의 영향권인 안휘에 있었고, 조금만 시류를 읽을 수 있다면 남궁세가와 비룡장이 충돌할 가능성을 점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런 비룡장에게 청성이 먼저 협력을 제안했었다.
그 후 청성은 비룡장을 등에 업고 아미와 무당, 소림을 끌어들였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도 청성과 같은 운명에 처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손을 잡게 만들었다.
조만간 남궁가와 비룡장의 마찰이 벌어진다면 소림에서 비룡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이다.
“어리석은 놈들.”
허장천은 청성에서 전갈이 왔을 때,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남궁세가를 비롯한 흉수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정파의 태두에 올라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그림을.
그러자면 무엇보다 후계 구도가 잡혀야 하는데, 그는 결코 허진영을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 없었다.
보던 서류를 덮은 허장천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찌 소식이 없지?”
이미 그의 나이가 적지 않았기에 후계구도를 확립하면서 장을 물려주려면 손자가 태어나도 벌써 태어나야 했다.
그럼에도 아직 그의 딸은 태기조차 없었다.
몸에 좋다는 것은 다 해다 먹였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너무 풀어준 모양이구나.”
그동안은 허진영을 압박하지 않았다. 사위로 대우도 해주었다.
“녀석에게 주인이 누군지 가르쳐줘야겠군.”
다시 허진영의 처지를 일깨워줄 시간이었다.
강제로라도 어떻게든 손자를 얻기로 결심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허장천이 벽을 쓰다듬자 비밀 문이 열렸고, 지하로 내려가는 어두운 암동이 입을 벌렸다.
얼마나 계단을 내려갔을까, 그의 눈앞에 육중해 보이는 철문이 보였다.
그그그그그극.
철문이 열리며 드러난 실내에는 철로 만들어진 관이 두 개 놓여 있었는데, 이전에 네 개가 놓여 있던 것을 생각하면 이미 혈천강시 두 구가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을까?
“크크크크, 어중간한 강시는 필요 없다. 이것이 완성되는 날, 내가 세상의 중심에 설 것이다.”
***
허장천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지도 모르고 허진영은 허혜령이 기다리고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불 꺼진 방.
아직 그가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랬다.
허혜령은 허진영 기다리지 않았고, 허진영은 그녀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녀왔소.”
침상에 있는 것이 확실하건만 미동조차 없었다.
“휴우~”
한숨을 내쉰 허진영이 옷을 벗고 침상으로 다가갔는데, 꿈틀거리는 근육이 아직도 청춘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비록 나이는 삼십 대 후반이었지만, 허진영의 외모는 많이 봐줘야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이었다.
허진영이 이불을 걷자 허혜령이 몸을 웅크렸다.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이랬다.
허혜령은 그의 손을 거부했고, 어쩌다 관계를 가질 때도 마치 죽어 있는 목석처럼 느껴졌다.
허진영이 손을 뻗자 허혜령이 몸을 더욱 웅크렸다.
허혜령의 마음이 죽었다는 것을 안 것은 오래되었다.
그녀를 알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당신은 나를 안고 싶은가요?”
작은 목소리.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떨림이나 설렘, 그것도 아니라면 절망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령 매.”
“나를 안고 싶은가요?”
“…….”
허진영이 뻗었던 손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밝은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허진영은 아직도 깊은 어둠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허혜령 또한 자신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씨받이.
자신과 그녀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위가 되었지만 그가 하는 일은 한정되었다.
장을 위해 하는 일보다 비밀스럽게 정보를 모으거나 무력을 써야 하는 일에 복면을 쓰고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 정보가 힘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보고를 받지만, 허장천은 이미 그것보다 더 자세한 것들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허장천을 위해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런 일을 벌인다고 하여도 자신은 비룡장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니까.
아니,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 것이다.
광마단이 없는 허진영은 무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광마단의 제조비법은 허장천만이 알고 있었다.
“휴우~”
‘일 호, 너는 죽은 것이냐?’
이제는 일 호가 살아오더라도 겁날 것이 없는 허장천이었다.
그의 힘이 되어줄 회주는 죽었고, 광마단이 없는 일 호 역시 자신과 별다르지 않을 터이니.
밤의 어둠보다 더 어두운 삶의 장막에서 한숨을 쉬는 허진영이었다.
***
“오래간만입니다, 맹주님.”
좌영호의 말에 현청진인이 나직이 도호를 외웠다.
“허허허, 맹주라. 무량수불.”
허울뿐인 무림맹이라고 하여도 일단 그곳의 맹주직을 맡고 있는 현청진인이었는데, 그런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였다.
“좌 대협께 못할 짓을 부탁드린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기도 하는구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벌써 몇 년이던가?
암류를 느끼기는 하였지만, 현청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요청이 들어오면 맹주령을 발동하여 협조를 구하는 것이 전부였다.
과거 맹주령은 강제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신흥사패로 인해 정파가 분열된 지금은 그것이 더했다.
“할일 없는 본도의 말상대를 해주고자 오신 것은 아니실 테고, 어찌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지…….”
“암류가 하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음…….”
하나의 정체도 밝히지 못해서 전전긍긍이었는데, 이제는 거기다 마교의 움직임 때문에 개방의 거지들이 바쁜 와중이었기에 새로운 암류가 있다고 하여도 더 이상을 손을 쓰기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암류의 발원지가 아무래도 정파 내부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섣불리 발표할 수 없었다.
완전히 신흥사패와 나머지 정파 간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지금, 정파의 몰락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제 그만 손을 떼야겠습니다. 죄송하구려, 좌 대협.”
“아닙니다.”
“그래, 개방에서는 이번에 어디의 손을 들어주기로 하셨습니까?”
“일단 중립을 지키기로 하였지만, 조만간 결론을 내리시겠지요. 방주님이 결정하실 것이니 제가 뭐라 말씀을 드리기 힘듭니다. 그러나 제 조언도 있고 하니 아마도 신흥사패와 손을 잡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조사가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암류의 거대한 흐름은 알 수 있었으니까.
“곧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마교의 이번 도발은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정파의 내분이 일어날 순간이었는데 말입니다.”
마교의 도발로 인해서 정파는 일순간이지만 힘을 뭉쳤었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의 사정을 알고 있을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도발한 마교의 속내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들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겠지요, 무량수불.”
“그나저나 그들이 어째서 혈마교를 완전히 부수지 않는 것일까요?”
현재 무림맹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은 귀주 서쪽까지 거의 정리한 상태였다.
지금 남은 것은 그들에게 쫓겨 혈마교로 들어간 이들과 기존에 혈마교에 있던 이들뿐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고지를 눈앞에 두고서 누구 하나 먼저 발을 떼려는 이가 없었다.
“허허허, 좌 대협이 모르는데, 어찌 골방에 틀어박힌 내가 알겠소이까.”
“저도 요새 다른 일을 하느라 그쪽에는 신경을 쓰지 못해서 말입니다.”
“무슨?”
“별것은 아니고, 하 대협이 특별히 찾아와서 부탁하는 바람에…….”
정도객 하만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 장 소협의 흉수에 대한 것 말입니까?”
“네.”
“그것은 개방에서도 조사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작년까지였습니다. 신흥사패와 기존세력의 긴장이 고조되고 마교의 일까지 터지자 방주님이 조사를 중단시키셨지요.”
“그렇습니까?”
“네. 그래서 저에게 부탁하신 것인데,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놈이다 보니 얻어듣는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허허허, 좌 대협의 실력을 알고 계시니 그런 것이겠지요. 그래 성과는 있으셨습니까?”
“그것이…….”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 별로 얻은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얼마간 세상사 얘기를 나누던 좌영호가 작별을 고했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바쁘신 분을 너무 붙잡은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그럴 리가요.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다음에는 무당으로 들러주십시오.”
그 말에 좌영호가 흠칫하며 물었다.
“어찌? 돌아가시는 것입니까?”
“예. 신흥사패에서 무림맹주를 다시 뽑자고 한 모양입니다. 이름뿐인 무림맹주라는 직함이 탐이라도 난 것이겠지요. 달라고 하면 그냥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만, 사문과 소림에서 반대하는 입장이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흥사패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자, 결국 어제 사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럼 무림맹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아마도 해체될 것 같습니다.”
“해체요? 마교가 도발하는 이 시점에서 꼭 해체시켜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그러니 해체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군요.”
만일 마교가 딴 마음을 먹으면 무림맹이란 이름으로 다시 뭉쳐야 할 것이고, 현 무림맹주는 누가 뭐래도 무당의 현청진인이었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행사하게 된다면 무당의 이름이 거론되고 세인들에게 각인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때문에 신흥사패에서 강력하게 무림맹주의 교체와 그것이 아니라면 무림맹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아마도 두 개의 무림맹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혹시, 귀주의 일도 그런 맥락이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무림맹의 이름으로 혈마교를 치는 것을 신흥사패가 거부하고, 그들이 거부하자 기존 무사들도 물러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청진인의 말에 좌영호가 침음을 흘렸다.
“허어~ 도대체 어찌 되려는지.”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니, 시간이 해결해주겠지요.”
“그렇게 되면 다행입니다만, 그나저나 맹주님은 그것을 짐작하고 계시면서 말씀을 안 하신 것입니까?”
아까 자신의 물음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 것을 짚고 넘어가는 모양이었지만, 한쪽 눈을 깜빡이는 것이 책망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허허허허,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이들을 탓하고 싶겠는가?
마교라는 주적을 앞에 두고도 서로의 이익만 따지는 그들의 행태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무림맹이 해체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좌영호로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안 좌영호였기에 장난스럽게 물은 것이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서로의 앞날을 걱정하며 돌아서는 두 사람의 얼굴은 그다지 밝은 편이 아니었다.
저 멀리 하늘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