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내, 내가 피… 필요할 텐데?”
“네놈이 필요하다?”
살짝 손에 힘을 푼 화영영이 말꼬리를 올리며 입가에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함께 점점 높아지는 살기.
“네놈이 필요하긴 하지만, 내가 왜 네놈의 말을 들어야 하지?”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네놈은 그저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럼 시체랑 놀던가.”
말을 마치자마자 혀를 이빨사이에 넣더니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그것이 어찌나 급작스럽고 빨랐는지, 화영영이 서둘러 마혈을 찍어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혀가 거의 반이나 잘려버렸다.
피가 줄줄 흐르는 입을 하고서도 왕일의 눈은 그녀의 눈을 직시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는 꺾지 못할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흥!”
코웃음을 친 화영영이 왕일의 목을 놓자 잠영일호가 서둘러 지혈하더니 가지고 있는 금창약과 붕대로 왕일의 혀를 치료하였고, 그 순간 멈췄던 음기의 유입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화영영이 천 등을 바라보았다.
“하인이 필요하긴 하지.”
그녀의 말을 들은 천 등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목숨은 부지했으니까.
“가자.”
화영영의 말에 잠영일호가 왕일을 둘러메더니 신형을 날렸고, 그 뒤를 따라 나머지 인원도 동굴에서 사라졌다.
쏴아아아아아-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쏟아지는 빗줄기만 남아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가 급히 그들이 머물렀던 곳에 다가오더니 서둘러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것은 왕일이 떨어뜨린 도였고, 그 인물은 천이었다.
“허어~ 겨우 도 하나에 다시 혀를 깨물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천이 혹시나 늦게 온다고 또 혀를 깨물 것을 염려해 황급히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
남찬우와 같은 탁자에 앉아 있는 석휘명은 이것이 중대한 갈림길이란 것을 알았다.
한 탁자라고는 하지만, 열 개의 의자가 있는 곳에서 남찬우가 상석에 앉아 있었고, 석휘명은 그 끄트머리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회의실인 것 같은데,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남찬우가 한 행동이라고는 한 시진 째 차를 마시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석휘명에게 시선을 돌린 것은 석휘명이 들어올 때뿐이었다.
“흠, 차 맛이 좋군.”
‘이제 시작인가?’
석휘명은 남찬우가 입을 연 것이 본격적인 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찬우가 곧장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석휘명이 굳어 있는 몸을 풀고자 목을 움직이자 우드득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말이리라.
‘빌어먹을, 뭘 바라는 것이지.’
그러나 석휘명이 아무리 초조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없었다.
대화의 주도권뿐만 아니라 그의 목줄을 틀어쥔 것도 남찬우였으니까.
“휴우~”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을 때, 다시 남찬우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앉은 것은 상석이 아니라 석휘명의 바로 앞자리였다.
“자, 그럼 들어보기로 할까?”
어떤 설명도 없었지만, 석휘명은 지금 그가 가진 패 중에서 꺼낼 것과 숨겨야 될 것을 골라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정해둔 상태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숨겨둔 패들 중에서 몇 개는 꺼내야겠지만, 확실한 보장이 없는 한 꼭꼭 숨겨야 될 것들도 있었다.
“장우석을 죽인 것은 우리가 맞습니다.”
폭풍도 장우석의 얘기를 꺼낸 것은 그것이 아니라면 남찬우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요량으로 비급을 노출시킨 것이지만, 숨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단 정보를 주더라도 아는 것부터 주고 슬쩍 떠보는 것이다.
그러다 숨겨둔 비수를 꺼내는 것, 이것이 석휘명이 협상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저는 멸혼방의 살수입니다.”
“멸혼방?”
그것은 의외라는 듯이 남찬우가 되물었다.
그는 석휘명이 살수라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찬우의 반응에 석휘명은 일단 하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말을 하는 것은 그만큼 신뢰도에 영향을 미치니까.
“실력이 좋은 놈들인가 보군.”
“인원이 적은 탓도 있겠지요. 겨우 열 명이니까요.”
이제 붕 떠 있는 자신의 과거를 잘 꿰어 맞추기만 하면 되었다.
뒷조사를 하는 와중에 패진무관과의 관계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석휘명은 그곳에서 얻은 정보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하려는 중요한 말이 앞뒤가 맞기 때문이었다.
오룡회의 진실 된 정체에 대해서는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꺼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밝힌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칠 것이고, 그때 가서 써먹을 수 있으니까.
“더 가진 것은 없나?”
역시 남찬우는 멸혼방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석휘명이 살수라는 것도 그저 흥밋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그리 쉽게 넘기지 못할걸?’
“구음신마.”
“……!”
역시 남찬우의 반응은 석휘명의 예상대로였다.
마교에서도 구음신마와 구양신마의 행방에 대해서 많은 조사를 했을 것이나, 아직까지 그들이 그렇게 활동하는 것은 그들의 정확한 행보를 마교에서 모른다는 것이었다.
구음신마를 언급하는 것은 패진무관을 들먹이는 것이고, 또 그것은 오룡회의 존재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를 봤나?”
“예.”
남찬우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석휘명은 지금의 침묵이 싫지 않았다.
‘내 가치를 재고 있을 테지?’
가치가 떨어진다면 고문실에서 생을 마칠 것이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면 마교에서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으리라.
그것도 교주 다음으로 권력을 쥐고 있다는 남찬우의 수하로서.
실상 부교주가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교주의 영향력이 더 컸고, 그런 교주의 심복인 남찬우가 교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잠룡대를 남찬우가 관리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석휘명을 가만히 바라보며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기고 있던 남찬우가 이내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볼까?”
***
남찬우의 말에 석휘명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최소한 고문실로 끌려갈 일은 없는 것이다.
석휘명은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제가 패진무관에 가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습니다. 살행을 하던 와중에 공격당해 기억을 잃는 지경에 처했었지요. 그런 저를 당가의 당정이 구해 아들로 키웠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패진무관에 들어갔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석휘명은 감출 것은 감추면서 필요한 것만 말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왕일에게서 확인한다고 하여도 그는 기절해 있었기에 십 칠호 등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흠… 그 패진무관이란 곳과 구음신마가 연관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단순한 것이지만 이것으로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고, 앞으로의 방향을 정할 수도 있었다.
참으로 귀중한 정보였다.
더군다나 막 마교가 기지개를 켜려는 시점이었으니 정보의 비중은 더욱 컸다.
‘놈, 머리를 굴리는 구나.’
남찬우는 석휘명이 더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멍청한 놈이 아니라면 비장의 패 하나는 가지고 있을 테니까.
‘구음신마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까지 숨겨야 하는 것은 뭘까?’
그것이 궁금했지만 이제 선택의 순간이었다.
‘이득이 될까?’
지금도 남찬우의 주위에는 똑똑한 놈들이 널려 있었다.
그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그의 속뜻을 헤아려 움직이는 이도 있었다.
“그럼, 놈들이 패진무관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일단은 좀 더 석휘명을 관찰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저와 같이 있던 왕일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왕일?”
“예.”
“어째서?”
“왕일은 가족들을 모두 흉수에게 잃었습니다. 아니, 그가 살고 있던 마을 전체가 흉수에게 몰살을 당했지요. 그런 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나온 이였고, 게다가 흉수의 얼굴까지 목격 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패진무관에 들어오기 전에 흉수에게 거듭 습격을 받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구양신마와 연관이 있었다?”
“예. 알아본 바로는 그 흉수들이 이전에도 서너 개의 마을을 몰살시켰다 하니,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고 그 와중에 왕일과 관계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럼 다시 공격해 올 수도 있겠군.”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왕일이 더 중요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벌써 몇 년 전이고, 외모도 많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흉수들은 왕일을 잊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정파에서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기에 숨죽이느라 우리를 찾을 겨를도 없었을 것이니, 지금 우리의 위치를 알 리 없을 것입니다.”
“하긴, 알았다면 진즉에 처리하러 왔겠지.”
“허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중요하지 않다?”
“예. 저는 그것도 그것이지만, 패진무관 자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패진무관이?”
“예.”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미 구음신마를 왕일에게 붙여놨기에 다시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당시 구음신마 정도의 고수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패진무관이 멸문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럴싸한 얘기였다.
사실 구음신마 혼자만 하더라도 패진무관 따위는 하룻밤도 새기 전에 몰살시킬 수 있었다.
“그것에 뭔가 이유가 있었다?”
“예. 당시 제가 본 바로는 구음신마와 대등하게 싸운 인물이 있었습니다.”
은근히 남찬우가 십칠 호 등을 패진무관에 소속된 비밀조직으로 여기게 만드는 말이었다.
“패진무관에?”
“예.”
똑, 똑, 똑.
다시 탁자를 두들기는 남찬우의 손가락을 보면서 석휘명은 어느 정도 자신의 도박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내가 말을 꾸민다고 해도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룡회와 구음신마 정도다. 왕일은 아무것도 모르니 너도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나타난 것은 구음신마와 오룡회였고, 둘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오룡회가 왕일을 노리고 왔으니 나머지 구음신마는 뭔가 다른 이유로 온 것이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한철진이 패진무관의 실권을 장악했다는 것은 한철진과 구음신마 사이에 뭔가 모종의 흑막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석휘명은 생각했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서 패진무관과 한철진을 감시할 것이다. 남찬우, 이자는 그리 멍청한 자가 아니니까.’
“뭘 바라지?”
‘드디어!’
원하던 질문이 나왔다.
“제게 정보조직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이미 충분하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오겠습니다.”
자신의 필요성을 스스로 입증하겠다는 것이었다.
“좋아. 두 달의 시간을 주지. 그 안에 증명해봐.”
“감사합니다.”
남찬우의 말을 들은 석휘명은 자신의 계획이 점점 무르익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정보조직으로 오룡회를 조사할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오룡회와 구음신마를 연관시킬 수만 있다면 마교는 알아서 자신의 복수를 해줄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일단 구음신마에 대한 것도 조사해야겠지?’
남을 속이고자 한다면 진실 속에 거짓을 묻어야 했다.
전부 거짓이라면 그것으로는 사람을 속일 수 없었다.
딱!
남찬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치 안개와 같이 나타나는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잠영대의 대주이자 남찬우의 오른팔이라 일컬어지는 이였다.
“필요한 것을 지원해주도록.”
“어디까지 할까요?”
“풍운 삼관을 돌파한 이들까지.”
풍운관은 마교의 서열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비무를 통한 서열 재정립 방식이 많은 사상자를 내자 고심하여 만든 곳이었다.
일관이면 평무사, 이관이면 조장, 삼관이면 열 개조를 거느리는 당주의 실력이었다.
남찬우의 말을 들은 잠영대주가 눈에 이채를 발했다.
그만큼 파격적인 대우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남찬우가 말한 것은 당주 이상의 권력을 주는 것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