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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48화 (48/138)

48화

‘젠장!’

갑자기 나타나 왕일 등을 공격한 여인은 바로 옥골음희 화영영이었다.

그녀는 지금 복면 속에서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자신의 공격을 막은 왕일에게서 뇌정지기를 익힌 이들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뇌정지기를 익히지 않았다고 단언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 한 번의 공격으로 왕일이 뇌정지기를 익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쳇! 반응이 없다니. 역시 헛걸음이었나?’

그녀가 익힌 소수마공은 음기의 결정체라고 할 정도의 무공이었다.

이것은 익히기도 힘들지만, 현음지체(泫陰之體)라는 신체를 타고나야지만 익힐 수 있었다.

현음지체는 일종의 병으로 스물이 되기도 전에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깊고 넓은 음기를 가진 신체로 극히 드물기도 하였지만, 그런 신체로 소수마공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도 힘들었다.

그녀의 사부가 중원을 떠돌다가 화영영을 발견한 것은 실로 천운이었다.

‘내 운이 다한 것인가?’

화영영은 자신의 사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었다.

음기의 정화가 골수에 박혀서 사름시름 앓다가 끝내는 마치 얼음이 된 것처럼 조각조각 부서지며 죽었다.

그것도 음기의 폭주로 인해 발정난 상태에서.

화영영은 이미 육십에 이르는 나이였고, 그녀의 사부가 죽기 직전에 이룩한 무공의 경지에 다다랐다.

겉모습은 이십 후반에서 삼십 초반으로 보였지만, 육체는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가 남긴 단 하나의 단서는 뇌정지기를 익힌 이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찾은 이들 대부분이 뇌정지기를 갓 맛본 자들이었다.

시간을 두고 그들이 경지에 오르는 것을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허망함뿐이었다.

모두 죽거나 반신불수에 걸려 거동을 못하는 상황에 처했었다.

‘빌어먹을!’

훌쩍 날아오른 화영영이 하늘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서 있었건만, 전혀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 것은 워낙 나무와 일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번쩍!

순간 낙뢰가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쾅!

직통으로 화영영을 강타한 낙뢰는 그 힘을 잃지 않고 그녀가 밟고 선 나무를 완전히 두 조각으로 갈라버렸다.

하지만 표표히 지면으로 내려서는 화영영은 낙뢰로 인해 전혀 피해를 받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호신강기가 지켜주었으리라.

“이따위 것이 뭔데…….”

그녀는 자신의 수하들 대부분을 남찬우의 밑으로 보냈다.

장로라는 직함으로 전각 하나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녀의 손발이 되어주던 수하들은 모두 남찬우의 밑으로 들어갔고, 배정된 하인들과 하녀들만이 그녀의 전각에 출입하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어느새 그녀가 머물고 있는 전각은 마교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 되어 있었다.

뇌정지기를 연구한 것도 오래되었고, 그것을 가지고 남자들에게 익히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얻은 결론은 뇌정지기는 허황된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결론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남찬우의 말을 듣게 되었고,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하고 이곳을 찾았건만, 역시 기다리는 것은 실망뿐이었다.

***

-어찌된 일입니까?

천이 전음으로 물었지만, 왕일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 한 번 공격하고는 청승을 떨고 있는 화영영의 내심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분출된 그녀의 살기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꿀꺽.

천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정도로 화영영의 살기는 고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욱!”

어느새 다가온 것일까?

화영영의 주먹이 왕일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비록 내공이 담기지는 않았지만, 그 충격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쨍그렁.

어찌나 강한 일격이었는지, 왕일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도를 떨어뜨렸다.

포위한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천조차도 화영영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일하게 그것을 감지한 왕일도 슬쩍 몸을 틀려는 시도를 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시도는 좋았지만, 이미 그녀의 주먹이 복부에 닿은 후였다.

왕일의 멱살을 잡은 채 노려보던 화영영이 손을 휘둘렀다.

쫙! 쫙!

화영영의 손이 왕일의 뺨을 왕복해서 갈겼다.

그녀는 현재 분노보다 실망감으로 인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런 녀석이 뭐라고 남 장로는…….’

[혹시 아니라고 해도 죽이진 말아주게.]

남찬우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왕일의 목을 날려버렸을 것이었다.

뭔가 있다는 듯이 자신을 부추긴 남찬우가 원망스러웠다.

물론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조그만 단서에도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처량했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화영영의 손은 점점 매서워졌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천이나 다른 이들은 자칫 왕일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에 나설 수가 없었고, 그렇게 천 등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다시 낙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번쩍! 쿠쿠쿠쿠쿵!

비록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비가 오는 상황이었고, 빗물이 흘렀기 때문에 왕일과 화영영은 그 여파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악!”

화영영은 자연스레 일어난 호신강기가 보호했지만, 왕일은 그러지 못했다.

호신강기가 일어나며 잡고 있던 옷이 바스러지면서 화영영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워낙 가까이 있었기에 낙뢰를 피하지 못했다.

흐르는 빗물을 타고 전해진 낙뢰에 감전된 왕일이 바닥에서 발발거렸다.

“뇌정지기를 익혔을지도 모른다는 놈이 이따위 낙뢰에 벌레처럼 꿈틀거리다니.”

분한지 화영영이 쓰고 있던 복면도 벗어 던졌다.

퍽!

화영영의 발차기가 분노를 담고 왕일에게 날아갔고, 순간 화영영의 내부에서 불꽃이 튀었다.

“응?”

발차기를 하면서 약간 기를 운용했는데, 발과 왕일이 만나는 순간 그녀의 내공이 흔들린 것이다.

그렇다고 내상을 일으킨다거나 하는 불온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오히려 순간적일 망정 청량한 느낌이 살짝 피었다 사라졌다.

퍽! 퍽! 퍽! 퍽! 퍽!

발차기를 계속하는 화영영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천 등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얻어맞는 왕일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왕일의 자체치유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내력을 실은 화영영의 발차기는 아직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을 쉬지도 않고 맞았으니 온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화영영이 실수를 눈치 챘는지 발차기를 멈췄다.

어떻게 발견한 가능성인데, 자칫 순간적인 만족감을 위해 죽일 뻔했던 것이다.

화영영이 여태 만난 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었다.

순간 태도가 돌변한 화영영이 쓰러진 왕일의 머리를 안더니 무릎에 올려놓고는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미 왕일은 정신을 잃은 상태로 축 늘어져 화영영의 품에 안겨 있었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사랑하는 정인을 잃은 여인이, 안타까운 마음에 정인의 볼을 쓰다듬는 것으로 볼 정도였다.

“어디 갔다 이제 왔니.”

화영영의 눈에는 사랑스럽다는 감정보다는 사흘 굶은 거지가 잔칫상을 바라보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쏴아아아아아아!

마치 왕일의 앞날을 말하는 것처럼 비가 거세게 내렸다.

***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와중에 동굴에선 기묘한 대치가 이뤄지고 있었다.

화영영은 왕일을 옆에 뉘여 놓고 비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천 등은 한곳에 모여 그런 화영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화영영이었다.

기절한 왕일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응?”

묘한 것을 봤다는 표정이다.

그녀는 음공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소수마공을 익혔고 음기의 저주라고 불리는 현음지체였다.

그런 그녀가 음기의 흐름을 모를 리 만무했고, 지금까지 왕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음기의 유입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왕일의 몸이 뜨거워지니 더욱 어리둥절해 하는 중이었다.

보통 음기를 흡수하면 당연히 몸이 차가워진다.

왕일처럼 음기를 무지막지하게 흡수하고도 뜨거워진다는 것은 기사였다.

거기다 더욱 신기한 일이 일어났으니, 화영영에게 두들겨 맞아서 생긴 멍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 마호성은 무공이 높기는 하였지만, 음기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친밀도가 낮아 알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번개를 맞은 직후에 음기의 유입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기에 화영영이 알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마호성과 있을 때 흡수했던 음기의 양이 아기 오줌만 한 양이었다면, 지금은 퍼붓는 장대비였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화영영은 마교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또한 왕일이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연장하는 것과, 기왕이면 그것을 치료하여 좀 더 오래 살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이곳 귀주를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귀주 동부는 삼일 맑은 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우기가 길며, 방금 전처럼 거의 비슷한 장소에 벼락이 두 번이나 떨어질 정도로 천둥벼락이 빈번한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귀주가 화영영과 왕일이 있어야 할 최적의 장소였지만, 이곳을 정파들이 들쑤시고 다닌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이 만일 화영영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난리가 나리라.

“흐음… 조금만 견디면 될 것도 같은데…….”

남찬우는 분명 호남을 도모한다고 하였다.

귀주에 있는 이들은 모두 소모품이 될 것이었다.

지금 귀주 서쪽에 만들어놓은 혈마교라는 이름만 거창한 껍데기에 모여든 사파인들은 조만간 정파 무리들에게 몰살당하든가, 그렇지 않는다고 하여도 유명무실한 조직이 될 것은 분명했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칼받이로 쓰일 곳이었다.

“누구냐?”

뚱딴지같은 말.

화영영은 그 말을 한 것으로도 귀찮은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끌어내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신같은 신법으로 나타난 인물은 바로 왕일에게 혈음독고를 먹인 복면인이었다.

“잠영일호, 장로님을 뵙습니다.”

그는 왕일에게 그저 가라고 했지만 감시의 눈길을 늦춘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왕일의 뒤에서 그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호오~ 네놈이 이 녀석의 그림자였냐?”

“예.”

물끄러미 왕일을 바라보던 그녀가 잠영일호를 바라봤다.

“내가 모르는 것이 더 있나?”

잠영일호는 잠영대주의 바로 밑에 있는 인물이니만큼, 이런 하찮은 일에 끼어들만한 지위가 아니었다.

“그놈의 친구라는 녀석에게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누가 관심을 두고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잠영대는 남찬우의 명을 받는 곳이었으니까.

“왜?”

“폭풍도 장우석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 장우석?”

“예. 하만성의 제자인 장우석입니다.”

“호호호호, 흥미가 일 만도 하군.”

“저도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현재 친구라는 놈은 교로 이송중입니다.”

화영영은 그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 근처에 인가가 있느냐?”

“동쪽으로 오십여 리만 가시면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장로님의 명을 받들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좋아. 같이 간다.”

말을 끝낸 화영영의 시선이 천 등에게로 옮겨졌고, 그녀의 시선을 받은 그들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서 그녀가 말 한마디만 하면 그들의 생사가 결정되는 것이었으니까.

꿀꺽.

천이 검을 한 번 잡았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어차피 실력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고, 만일 반항이라도 하였다가는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사를 장담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천에게는 이제 갓 세 살이 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산 채로 돼지우리에 떨어지는 꼴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때, 지금까지 죽은 듯 누워있던 왕일이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린 것은 좀 되었다.

잠영일호가 나타나기 전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렇게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돌아가는 형국을 지켜보던 왕일은, 화영영이 미약하게 일으키는 살기를 감지하고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차렸다.

지금은 나설 때였다.

“같이 간다.”

누워있던 왕일이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잠영일호는 복면 속에서 묘한 표정을 지었고, 천 등은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화영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왕일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음기의 유입이 현저하게 줄어들다가 멈춘 것을 알고는 잠영일호를 부른 것이었다.

“왜?”

이유가 알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장난을 치는 것인지 입가에 한줄기 미소를 띤 화영영이 물었다.

“내 수하들이니까.”

“뭐?”

“분명 저들의 생사여탈권은 나에게 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미 저들은 내 소유다.”

“네놈의 목숨 줄은 내가 붙들고 있지.”

“큭!”

화영영이 왕일의 목을 잡고서 와락 끌어당기며 말하자 왕일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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