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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들의 무림 생존기-47화 (47/138)

47화

그 모습을 본 왕일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분노했다.

그곳에서 나오고 있던 현을 향해 도를 날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무언가 하나가 그의 머릿속에서 끊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날아가던 왕일의 도를 천이 막았다.

이성을 상실한 채 도를 날리고 있었기에 반탄기를 펼치지 못했다.

반탄기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그것을 펼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현을 향해 공격하려는 자신을 막아서는 천을 향해 도를 휘두를 뿐이었다.

결과는 왕일의 참패였다.

복부에 주먹을 맞은 왕일을 천이 제압했다.

[왜! 왜, 죽였느냐!]

서릿발 같은 기세로 묻는 왕일의 물음에 현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지금 목격자를 남기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말보다도 천의 물음이 더 왕일의 가슴을 후벼 팠다.

[듣지 못했습니까? 여인의 비명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그것이 멈춘 이유를 진정 몰랐습니까?]

들었다.

뛰어난 오감을 가진 왕일은 분명 그들의 소리를 잡아내었다.

그것이 멈췄을 때, 왕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왕일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이를 벨뿐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얻어진 희열에 몸을 떨고 있었다.

축 늘어진 왕일을 업고 나온 것은 천이었다.

그날 왕일은 하루 종일 멍한 상태로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왕일이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그의 얼굴은 예전보다 조금 더 차가워졌고, 더 굳어 있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긴 왕일은 다른 문파의 담을 넘고 있었다.

***

동생들의 모습이 아련했고, 부모님의 얼굴은 이미 떠오르지도 않았다.

떨어지는 빗물에 손을 대자 마치 붉은 피가 그의 손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번쩍! 쿠쿠쿠쿠쿵!

멀리서 우레와 천둥이 세상을 뒤집어놓을 것처럼 지상에 강림했다.

그 순간 서서히 음기가 왕일을 향해 몰려들었다.

불을 쫓는 불나방처럼 가만히 서있는 그의 백회로 음기가 스멀스멀 기어왔다.

그때처럼.

충격을 받고, 하루 종일 누워 있던 그때 음기가 처음 찾아왔다.

땅에 누운 몸이 마치 늪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때, 왕일은 뭔가 자신의 백회를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살짝살짝 건드리던 것이 천천히 몸속으로 들어올 때도 그것이 음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느끼고는 있어도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왕일의 머리는 텅 빈 공간이었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

공허와는 다른, 무념무상의 상태와도 다른, 아예 존재감이 사라진 듯한 상태였다.

여인과 아이의 주검을 본 순간, 왕일은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부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의 왕일에게 찾아온 음기는 먼저 그의 열려진 혈도를 탐색이라도 하듯 돌아다니다가 막힌 혈도 앞에서 움찔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막힌 혈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쫓겨난 아이가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듯이.

그러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여태 왕일이 운기를 통해 받아들인 기들이 그러했듯이, 음기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 것이다.

하지만, 밤은 길었고 음기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그날 왕일의 몸은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붉게 달아올랐고, 거듭 유입되던 음기가 몸속에 있던 어떤 것을 파괴하는 것을 느꼈다.

바로 마교가 심어둔 혈음독고가 죽는 것이었지만 왕일은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혈음독고란 남만에서만 서식하는 곤충으로 황소 백 마리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독을 분비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크기의 곤충이었다.

해독제는 그것의 발작을 막는 일종의 진정제였다.

천을 비롯한 현, 황 등은 독을 먹였지만, 왕일 등과 같이 그들을 이끄는 이들에게는 혈음독고를 먹였다.

단약을 먹은 첫 날 몸에 반응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왕일이었지만, 이런 것을 알 수 없었기에 마교에서 특별한 것을 준비했다고 생각했었다.

어쨌든 그렇게 밤이 지나고 왕일이 정신을 차린 것을 밝아오는 햇살이 음기를 밀어낸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린 왕일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다른 문파의 담을 넘는 것이었고, 그날 왕일은 살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 등이 죽이는 것을 말리지도 않았다.

***

천천히 왕일을 에워싸면서 밀려들던 음기가 백회로 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별히 운기 할 필요도 없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음기는 언제나 그를 삼켜버릴 듯 밀려왔으니까.

특이한 것은 구름이 해를 가린다고 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꼭 밤이 되어야지만,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렇게 스며든 음기는 왕일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잘못한 것이 없어. 애초에 너를 이렇게 만든 것들이 잘못한 거야. 네 동생을 죽이고, 부모를 욕보인 놈들이 잘못이야. 네가 지금 하는 일은 모두 그들의 책임이야. 너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권한이 있어.]

계속되는 속삭임.

처음 음기가 백회를 두드린 그날처럼 왕일의 머릿속에서 그를 위로하는 속삭임이 뇌리에 가득 울려 퍼졌다.

‘맞아. 그놈들이 잘못한 거야.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그놈들이야.’

왕일은 자신을 위로하는 속삭임에 동의했다.

[주위를 둘러봐. 네가 그들을 죽인 것이 아니잖아. 주위에 있는 것들이 저지른 일일 뿐이야.]

‘나는 나를 죽이려는 놈만 죽였어. 나는 정당한 일을 한 거야.’

[네가 시킨 일도 아니야. 너는 그저 방관했을 뿐이지. 그런 네게 무슨 죄가 있겠어?]

‘나는 죄가 없어.’

달콤한 속삭임은 왕일의 마음을 안정시켜 나갔다.

그 속삭임은 밤에 휴식을 취할 때 왕일의 마음을 파고들었고, 꿈속에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왕일을 위로했다.

결국 왕일은 그 목소리의 유혹을 받아들였다.

복면인을 만나 자신이 쌓아온 것에 대한 노력이 하찮게 여겨진 순간부터 조금씩 무너지던 왕일의 빈틈을 파고들어, 여인과 아이의 죽음을 목격하여 무너진 순간 왕일을 조금씩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일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해석했다.

자신에게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에 만족한 것이다.

불사지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였다.

왕일은 불사지존이 미쳤다는 것과 감정이 없을 것이란 사학자들의 추측을 믿었다.

그래서 자신은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사지존은 이미 천오백여 년 전의 인물이었고, 그에 대한 추측이 절대 옳은 것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간과하고 있었다.

과거의 아픔과 슬픔, 웃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착각이었다.

‘응?’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비의 차가움을 느끼며 음기의 유입을 즐기는 그때, 음기의 유입으로 날카로워진 오감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누군가 온다.”

왕일의 말을 들으며 천이 서둘러 운공을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내공을 얻기 위한 운공이 아니라 몸의 피로를 풀려는 요상 목적의 운공이었기에 깊은 곳까지 의식을 침잠시키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일의 말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고, 운공에서 깨어난 것은 천이 가장 빨랐다.

그것으로 무공의 수위뿐만 아니라 내공의 운용에서도 그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음…….”

내공을 돌려 주위를 감지하던 천이 침음을 흘렸다.

다가오는 속도도 빨랐지만, 그 방향이 정확하게 그들이 숨어 있는 협곡의 동굴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다가 의문이 들었다.

급박하다면 급박한 순간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든 의문이었으리라.

자신도 그 침입자를 발견하느라 기를 끌어올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먼저 안 왕일이 어째서 이런 급박한 순간에 말을 했느냐는 의문이었다.

물론 쏟아지는 빗소리와 거리 때문에 들릴 리는 없겠지만, 신중하지 못한 왕일의 모습에 천은 주의를 주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전음으로 대화하지요.

추격자가 가까이 오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상대의 역량에 따라서 대화소리도 들릴 수 있었다.

“난 전음을 쓸 수 없어. 그리고 아무리 조심해봤자, 이미 글러먹었어.”

말을 마친 왕일이 천천히 빗속으로 걸어 나갔고, 뒤에 남은 천은 황당한 상황이었다.

‘전음을 못한다?’

그럼 지금까지 보여준 무위와 경신술, 그리고 사람의 기척을 찾아낸 모습은 뭐란 말인가?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더라도 순수하게 육체의 능력만으로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경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하기에는 시작이 촉박했다.

왕일의 말대로 전음을 쓰든 쓰지 않던 간에 추격자는 이미 그들의 시야에 보일 정도로 다가왔던 것이다.

“준비해라.”

천의 말에 아홉 명이 모두 검을 꺼내더니 조용히 천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동굴에서 기다렸다가 기습할 수도 있었지만, 현재 그들이 있는 동굴은 그렇게 넓지 못했다.

그리고 그 길이도 짧았기에 혹시 밖에서 무너뜨린다면 난감한 상황에 빠질 것이었다.

왕일의 옆에 천이 섰고, 지 등은 그들 주위에 둥그렇게 매복을 하였다.

-다행히 혼자인 모양이군요.

그들을 향해서 달려오는 이는 복면을 썼는데, 아무런 특색도 없는 밋밋한 것이었다.

다만, 비로 인해서 착 달라붙은 옷이 그가 여인임을 알려주었다.

굴곡이 졌던 것이다.

‘여자라…….’

거침없이 달려온 복면인이 왕일을 바라보았다.

“네가 왕일이냐?”

복면인의 말에 왕일은 물론이고 천도 놀랐다.

쫓아온 것에 그치지 않고 왕일의 정체마저 알고 있었으니까.

“어찌 알았지?”

“그게 중요한가?”

“어디서 왔느냐?”

“어디서 왔을까?”

마치 왕일을 놀리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지를 비롯한 수하들이 여인의 주위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듣던 대로 정말 눈깔 하나는 봐줄 만하구나.”

번쩍번쩍 내리치는 낙뢰가 왕일의 붉은 눈을 더욱 요사스럽게 만들었다.

다시 낙뢰가 세상을 밝혔고, 그 빛이 사라지면서 만들어내는 어둠 속에서 현과 황이 여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흥!”

펑! 펑!

두 번의 폭음과 두 마디의 신음.

현과 황의 가슴은 어느새 한겨울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얼어 있었고, 옷은 바스러졌다.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내상도 당한 모양이었다.

단 두 번의 손짓으로 두 사람을 전투 불능으로 만든 것이다.

“주제 파악을 못하고 또 나선다면 이번엔 살려두지 않겠다.”

몸을 날리려는 우 등을 일별하며 숨어 있는 그들을 마치 보고 있기라도 하듯 정확하게 시선을 마주치며 말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녀가 일으킨 기가 빗방울을 튕겨내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으음… 호신강기…….”

왕일과 천이 동시에 침음을 흘렸다.

그 정도로 여인이 보여준 한 수는 그들의 전의를 앗아가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호신강기를 일으키려면 적어도 구대문파의 장로급, 그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최소한 무림 백대 고수에는 들 정도의 실력이라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길보다는 흉이 더 많을 것 같았다.

“너! 너는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여인이 왕일을 지목했지만, 그 앞을 막아선 것은 천이었다.

왕일의 목숨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천을 비롯한 열 명의 목숨도 같이 있는 것이다.

왕일이 죽는 것은, 천 등이 모두 죽은 후에나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다.

“나서지 말라고 했을 텐데.”

펑!

여인이 또 장력을 발출했고, 그것을 검을 이용해 막은 천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호오~ 그런대로 한가락 하는 놈이었구나. 그렇다 해도 그 따위 무위를 믿고 다시 내 일을 방해한다면 그대로 죽여주겠다.”

천은 비킬 의사가 없었지만, 그런 그를 밀치며 왕일이 앞으로 나섰기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무슨 연유에서인지 죽일 의사는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언제 바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에게 볼 일이 있나?”

“볼 일이 있으니까 왔겠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인이 장력을 발출했다.

그 모습을 본 천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나설 수는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흥!”

장력이 다가오자 코웃음을 흘린 왕일이 도를 들더니 그대로 내리찍었다.

쾅!

도과 장력이 만났는데, 이제와는 다른 폭음이 터져 나왔다.

놀라운 것은 왕일보다 더 뛰어난 천도 장력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건만, 왕일은 어찌 된 것인지 겨우 한 발 뒤로 물러섰다는 것이었다.

반탄기를 사용해 장력에 깃들어 있는 기의 대부분을 되 튕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부를 이용하지는 못했다.

덕분에 그의 입가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지금은 음기의 유입이 한없이 자유로운 밤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음기는 그의 다친 내장과 혈을 치료하고 있었고, 그 속도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백회를 열면서 조금씩 빨라지던 자체치유력이 근래 들어서 더욱 그 위력을 높이고 있었다.

왕일은 그 공격을 막으며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느꼈지만, 천은 그런 왕일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왕일을 공격한 장력에는 자신을 공격했던 것만큼의 힘이 들어 있었다고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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